개털의 핵존심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유명한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작중 인물인 발칙한 깜찍녀 미도리는 부자의 최대 이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자의 최대 이점은)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가령 내가 친구한테 뭐 좀 하자꾸나 그랬다고 해요. 그러면 (부자인)상대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나 지금 돈이 없어서 안 돼' 라고. 반대 입장이 된다면, 나는 절대 그런 소리를 못해요. 내가 가령 돈이 없어 그런다면, 그건 정말 돈이 없다는 소리니까요. 비참할 뿐이지요. 예쁜 여자가 '나 오늘 얼굴이 지저분하니까 외출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과 같거든요. 못생긴 여자가 그런 소리를 해봐요, 웃음거리만 될 뿐이지. 그런 것이 내 세계였던 거예요. 지난 해까지 6년 간이나."
겨우 6년! 코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문득 초딩 6학년 때의 일이 너무나 명료하게 떠오른다. 오전 12시 즈음, 급우들 네다섯 명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그 전날 아차산에 놀러가기로 계획했던 터여서 급우들은 나를 데리러 우리집까지 찾아온 거였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못 가게 한다'는 핑계를 대고 불참의 뜻을 밝혔다. 사실은 참가비 1,000원이 없었던 거다. 천 원이 없어서 못 가. 이 말이 입에서 안 떨어졌다.
K 모 씨의 자취방에서 있었던 일. 그가 내게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 라면이라도 먹을래?" 개털 완전체인 나는 "됐어. 배 안고파('사실은 아사 직전이야…')"하고 대답했다. 10분 후, 그가 라면 냄비를 상 위에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 먹지 그래?" 나는 마지못하는 척하며 "그럼 한 입만 먹어볼까?"하고 말하며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쳐묵쳐묵 다 쳐먹었다. 국물까지 쪽쪽 빨아먹은 후, 일말의 양심 때문에, 혹은 존심의 회복을 위해 이렇게 말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20대 중반에 가수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어떤 선배와 게임비 내기 당구를 쳤다. 쓰리 쿠션에 약점이 있는 내가 졌다. 당구비 2만 원이 나갔다. 시간은 밤 12시가 넘었고, 집에 가려면 택시를 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돈이 없다는 것. 매니저 선배가 염려하며 말했다. "집에 갈 차비는 있니?" 나는 당당하게 있다고 대답하고 헤어졌다. 그리고는 집까지 걸어갔다. '가도 가도 끝없는 길, 3만리~' 같았고, 도중에 지쳐 벤치에서 자빠져 자기도 했다. 이 부질없는 남자의 '핵존심' 때문에!
그랬던 내가 조금은…아니, 꽤 바뀐 것 같다. 어제 친구 P 모 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미국에서 목사로 재직(?) 중인 친구 L 모 군이 간만에 귀국했단다. 일요일에 만나서 식사하기로 했는데 회비가 5만 원이라는 거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대뜸 "대체 뭘 (쳐)먹는데 한 끼 식사비가 5만 원이냐?"고 따진다. 이리저리 설명을 하는 그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린다. "나 요즘 완전히 개털이거든? 그러면 난 참석 못한다." 그냥 배 째라는 식이다. 개털 인생 30년이 넘으니 당당하다 못해 아예 뻔뻔해졌다. 글타. 이런 게 진정한 개털남의 핵존심이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 걸 그랬다. 나 요즘 얼굴이 지저분해서 외출하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