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오
간만에 들른 집 근처 식당에서 주방 아주머니가 한 얘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는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대학을 갓 졸업한 막내딸이 있는데, 얼마나 고집이 대단한지 자기가 원하는 물건은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라는 거다. 신품 핸폰은 물론, 가방과 구두, 그리고 의류 등....어릴 때부터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대단해서 해당 물건을 사줄 때까지는 학교도 안 간다고 협박(?)하곤 했다는 거다.
여기서 그 아주머니의 훈육 방식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냐오냐하며 다 받아주니까 결국 그 모양 그 꼴이 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남의 집 사정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입장에서 함부로 단정할 일은 아니다. 세상에 자식이 사 달란다고 넙죽넙죽 다 사다 주는 부모는, 무개념 졸부가 아닌 한 아마 거의 없을 거다. 온갖 회유와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막내딸의 똥고집을 감당하기엔 무리였으리라고 추측하는 게 사실에 가까우리라. 장녀는 막내딸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는 아주머니의 말씀을 근거로 추측하면 더욱 그렇다. 설령 꾸지람의 부족 탓이라고 해도 그 과소비가 반드시 그 아주머니 탓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문학평론가이자 철학자인 가라타니 고진은 <윤리21>이라는 저서의 첫째 장에서 '부모의 책임을 묻는 일본의 특수성'에 대해 얘기한다. 이른바 '고베 시 중학생 사건(초등생 피해자의 절단한 머리를 학교 교문에 올려놓거나 경찰과 매스컴에게 도전장을 보내기도 한 어떤 중학생에 의한 연쇄 살인 사건)'을 언급하며, 가해자의 부모가 매스컴을 통해 백배사죄를 하는 일반적인 태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대리 사죄를 가해자의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 다시 말해 아이의 범죄는 교육을 잘못시킨 부모의 책임이므로 그 부모가 TV에 나와서 백배사죄해야한다는 일본 사회의 논리는 어딘가 기이한 점이 있다는 거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원인을 추적해 가면 부모, 학교, 환경, 현대사회라는 식으로 소급하게 된다. 그 결과 그러한 행동을 한 사람의 책임은 묻지 않게 된다.(중략).....보통 자연과학에서 '인과성'이란 'A면 B다'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원인이란 B라는 결과가 나올 때만 A라는 원인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A는 B를 규정하지 않는다. 알튀세르(L.Althusser)는 이것을 '구조론적 인과성'이라 불렀다. 어떤 증상이 있을 때 A라는 원인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결코 'A라면 B가 된다'는 식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인이 발견되어도 그 책임은 물을 수 없다.
무엇을 해도 결과적으로 잘 되는 경우가 있고, 아무리 적절하게 해도 기대에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좋은 의도로 이런 말 하는 건 알겠지만...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거다.
고로 막내딸의 지나친 소유욕에 어머니의 훈육 미비라는 원인이 설령 발견되었다고 치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같은 조건(훈육 미비)하에서 모든 자녀가 된장남이나 된장녀가 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적절한 훈육이 전제되어도 된장남녀는 발생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광고가 미치는 영향력의 정도가 어떻든지 간에, 된장남녀는 타고 난다. '멀쩡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일지라도 떨어진 장소가 어디든 상관없이 멀쩡하지 않을 가능성은 항시 존재한다.
몇 년 전에 어떤 친구가 내게 한 얘기가 생각난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하는 얘기들 중에 내가 그다지 인정할 수 없는 말이 뭔지 알어? 바로 '넌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격이 온유하다'는 거야. 이게 말도 안 되는 얘기인 게, 같은 환경에서 자랐어도 우리 형은 성격이 아주 다혈질이거든."
가라타니 고진과 위 친구가 한 말의 핵심은 이거다.
"네가 정신차려도 '그 어떤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교육의 힘을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결정론적인 상태는 어찌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고등학생 시절의 한 급우는 대체로 잘 놀면서도 늘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는 반면, 난 그 반대였다(확실히 '공부 할 줄 아는 머리'도 타고난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에게 책 읽는 모습을 자주 보여줘도 독서와 담을 쌓고 지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화목한 가정에서도 패륜아는 등장한다. 부모가 평등하게 키워도 둘 중 하나는 비뚤어질 가능성도 있다. 나병환자 요양소를 소재로 한 빅토리아 히슬롭의 소설 <섬>에는 그런 자매가 등장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녀간의 정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차츰차츰 큰딸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그는 같은 부모한테 태어나서 똑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자매가 왜 이렇게도 다를까 한없이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결국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타고 난다. 좀 유식한 척 말하자면,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자연적 인과(因果)의 지배를 받는 결정론적 존재라는 거다.
일드<야마토나데시코>의 지존급 된장녀 마츠시마 나나코
경험의 정도에 따라 늘기는 하겠지만, 주량(酒量)의 정도도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시뻘개진다는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나 한 잔의 맥주에도 취해 버리는 주제에 술 예찬론을 펼친 중국의 작가 린위탕 선생 같은 분들도 있는 반면에, 소주 5병 정도는 기본으로 마시는 술꾼도 있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대학시절, 한 학년 아래의 어떤 후배가 내게 여자친구의 주량에 대해 자랑 아닌 자랑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여자친구는 왠만한 남자보다 소주를 더 잘 마신다는 거다. 한번은 그녀의 자취방에 갔더니 방 구석에 빈 소주병이 세 병, 침대 밑에 세 병, 침대 머리맡에 또 두 병이 있더란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너, 그래도 여자인데 술을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니?"
그러자 그녀가 대답하기를,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많이 줄였어....요즘엔 술자리에서 딱 세 병만 마셔."
당시 그녀가 좋아했던 소주는 <참이슬>이니 <처음처럼>보다 더 독한 <경월>이었다.
J선배라는, 더 엽기적인 애주가 분도 있었다. 그 분은 사무실의 책상 아래에 약 19리터 용량의 생수통을 비치해 두고 생각날 때마다 거대한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마시곤 했다. 물론 그 분이 마신 건 물이 아닌 소주였고, 안주는 아예 없었다. 한번은 안주 좀 드시라고 뭔가를 좀 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안주는 안 먹어. 술 맛 떨어져."
이쯤 되면 애주가를 넘어 주신(酒神)의 경지다.
중국의 작가 린위탕(1895~1976)은 저서<생활의 발견>에서 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남들이 다 알 만한 얘기로 예찬한다.
술이 얼큰히 취하면 사람들은 대개 기분이 의기양양해지고 모든 어려움도 다 뛰어넘을 자신이 생기며.....
대학의 동아리방에서 회원들과 술판을 벌였을 때의 일이다. 대체로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장난기가 발동한 후배들 중 누군가가 지름 30Cm 정도의 양푼에 막걸리 세 통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었던 젊음의 객기로 인해 양푼 안에는 안주 삼아 몇 개의 담배꽁초가 넣어졌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아예 재떨이를 통째로 빠뜨렸다. 이후....망가질대로 망가진 우리들(지금의 심정으로는 '우리들'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고 그냥 '그들'이라고만 말하고 싶다) 중 누군가는 '막걸리는 걸쭉해야 맛'이라며 입안의 타액을 추가했다. 이쯤되면 그 누구도 그것을 사람이 마실만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거다. 따라서 그냥 막가기 시작한다.....시간이 지나 모든 이물질의 투입이 완료되었을 때, '이렇게 타액이 둥둥 떠다니면 누가 이걸 마시겠어요'라고 어떤 후배가 말하고는 나무젓가락으로 휘저어 용해시키기 시작, 나중엔 완벽한 용해를 위해 운동화로 휘저었다. '기분이 의기양양해진' 우리들 중 누군가가 이번에는 벗은 양말로 마저 휘저으며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남겼다. "저, 무좀 있어요."
그리고는 후배들을 향한 반 협박(?)의 시음 권유. 물론 시음을 시도할 이는 한 명도 없을 거라는 건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낮은 채도의 추억에 선명함을 더하는 돌발 행동은 가끔가다 있기 마련. 누군가 말했다. "후배님들이 못 마시겠다고? 그렇다면 선배가 모범을 보여야지." 린위탕이 말했듯이 취기는 '모든 어려움도 다 뛰어넘을 자신'을 부여한다. 그는 양푼을 들고는 그것을 들이켰다('그'가 누구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 직후 후배들 중 누군가가 그걸 마셨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에 없다. 분명한 건, 정작 그 오물주(汚物酒)를 마신 사람은 멀쩡했건만 외려 마시지도 않고 그저 구경만 한 몇몇 후배들이 대신해서 구토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 누군가는 오물주를 능히 마시지만, 그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구역질하는 걸 보면, 역시 비위도 타고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추잡한 오물주(汚物酒)도 추억의 만화경을 통하면 샤또 마고가 된다.
술에 관한, 추억 아닌 추악 하나 더. 창피한 얘기이지만, 젊은 시절 부린 여러 종류의 주사(酒邪)들 중 하나는 폭력에 관한 거다. 대학 1학년 시절, 입에도 잘 안 붙는 소주를, 과도하게 마실 줄 알아야 성인 티가 난다는 황당한 착각에 빠져서 폭음을 일삼던 시절의 얘기다. 그 날도 어김없이 1차부터 과음을 했고, 아쉬운 마음은 2차를 요구했다. 생활비가 빠듯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술집에는 갈 수가 없어서 J의 자취방에서 술판을 이어나갔다. 한 잔, 두 잔...한 병, 두 병...어느덧 도가 넘은 폭음으로 인해 시야가 뿌옇게 번지더니, 곧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강한 통증 때문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흐린 영상 속에서 J가 나의 왼쪽 팔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장면이 드러났다. 그는 (아마)만면에 웃음을 띄고 이렇게 말했다. "야, 이 개XX야...그만 자빠져 자고 일어나서 술 쳐먹어."
물론 그 말과 행동은 형식적으로야 공격적이었지만, 사실은 친근함의 표현에 불과했으므로 문제시 될 건 없었다. 문제는 그의 전언과 행동을 일종의 '도발'로 받아들인 나의 의식 상태.
외관상 표현 : "퍽퍽(주먹질)" & "야, 이 개XX야...술 쳐먹어."
내적 의미 : '우린 이렇게 주먹질과 쌍욕을 주고받아도 화가 나지 않을 절친 사이' & '술을 권하는 이유는 흥취의 분위기에 동참토록 하기 위함.'
문제는 당시의 체내 알코올 농도는 현실을 왜곡하기에 적합했다는 것. 나는 친근함의 표현을 모욕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벌떡 일어나서)뭐야, 이 ㅆㅂ놈아...왜 자는 사람을 패고 지랄이야..."
그리고는 그의 안면에 라이트훅을 날렸다...그 후일담은 이렇다. 다른 친구들이 말렸고, 결국 나는 집 밖으로 나갔지만 분에 못 이긴 J가 쫓아와선 다시 한번 매치-업 : 심야의 골목길에서의 데쓰매치. 그러다 패는 데 지치고 맞는 데 지친 내가 결국 말리는 친구들의 등 떠밂에 의해 다른 친구의 자취방으로 전략상 후퇴. 아니, 피신. 이불 덮고 잠을 청하려는데 창 밖으로 들려오는, 원한에 사무친 J의 목소리. "야, 이 ㅆㅂ놈아, 너 그 안에 있지? 빨랑 나와! 안 나오면 죽여버린다!" 결국, 말리는 친구들에 의해 그는 살의를 거둔 채 돌아갔고, 나는 그날 단잠을 잤다는 건 분명히 기억한다...
다음 날, 메슥거림과 함께 지난밤의 퍼포먼스들이 떠올랐다. 아...폭력의 상스러움.
저 위에서 나는 '체내 알코올 농도가 현실을 왜곡'했다고 말했다. 그 날의 폭력은 내 탓이 아니라 다 술 탓이라는 거다. 좀 고상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 폭력은 분명 내가 행한 것이다. 그러나 내 탓은 아니라고 본다. 그 날의 폭력은 전적으로 과음 탓이었다. 난 과음한 탓에 내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내 의지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마치...나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조종되듯, 내 의지 밖에 있었다. 그렇다. 술이 나를 조종한 것이다."
정신 안에는 절대적인 의지, 다시 말해서 자유로운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은 이와 같은 또는 그와 같은 것을 의지하도록 (어떤)원인에 의해 결정되고, 이 원인도 마찬가지로 다른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다시 이 후자도 또다른 원인에 의해서 결정되어 무한히 나아가게 한다.
-스피노자 <에티카>중, 제 2부 정리 48
심오한 스피노자의 얘기를 되는대로 풀어보면 대충 이런 얘기일 거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술을 많이 마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음 행위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혹자의 경우에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추동한 거다. 그런데 이 욕망도 자신의 의지-선택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이 욕망은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책망 받은 주체(나)의, 부모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욕의 발로다.
그렇다면 이 인정욕은? 자립하기를 두려워하는 의존성향에서 온다. 그리고 의존 성향은 주체(나)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어머니와의 분리감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이 공포감은 가난 때문에 돈 벌러 가야 했던 어머니의 부재로부터...이 가난은 아버지의 무능함 때문에...아버지의 무능함은 시대적 상황과 할아버지의 지나치게 엄한 교육이...할아버지가 엄한 이유는....무한소급(無限遡及).
뭐, 위 얘기의 인과관계가 실제로 성립되는지의 여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이거다. 내 책임이 아니라는 거다.
근데 이게 말이 되는 얘길까?
금주를 할 수 있는 자유의지 또한 네게 있지 않았느냐고 몰아세워도 방어할 구석은 있다. 자신의 주량을 넘어선 과음을 했다는 것 자체는 도적적으로 크게 비난 받을 일은 아니다. 비난 받을 부분은 폭력 행위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폭력 행위는 나의 의지로 행한 것이 아니다.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나의 행동을 추동한 것은 술이나 내 의지 바깥의 그 무엇이다. 술이 죄지 내가 죄냐…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류의 책임 인가적 자기 방어의 태도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사람을 죽여 놓고는 "술 먹어서 기억이 안 납니다." 여아를 강간하고서는 "술 때문에 이성을 잠시 잃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접하면 우리들은 두 번 분노한다. 범죄 행위 자체에 대해서 분노하고, 투사(投射)적 태도에 대해 한 번 더 분노하는 거다.
그런데 이런 책임 전가는 꼭 범죄자의 전유만은 아니다. 매스컴도 종종 그런다. 오래 전에 학교 폭력이 일어났을 때, 매스컴이 찾은 원인은 '용'이라는 제목의 일본 만화였다(일제강점기 시절이 배경인 이 만화는 조선인에게 아주 호의적인데, 그런 사실과는 별도로 만일 이 만화가 소위 '폭력물'이라면 '드래곤 볼'은 스너프다). 비슷한 시기에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매스컴이 주목한 것은 '카니발콥스'라는 데스메틀 밴드의 음악이었다. 매스컴의 이런 태도는 심층적인 원인으로 작용한 것에 대해 저작자의 책임을 물으려는 저의가 살짝 엿보인다.
물론 역겹기는 하다만.....
물론 범죄의 원인을 '용'이나 '카니발 콥스'에서 찾는 건 소용없는 일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애호가들이 더 많으므로 인과의 증거를 찾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럼에도 소아 성폭행범 XXX은 음주행위를 근거로 정상참작되어 감형되었단다. 어쩌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취지였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영화 <넘버3>에서 마동팔 검사(최민식 분)가 한 말이 생각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좆같아 하는 말이 뭔 줄 알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야. 솔직히 그 죄가 무슨 잘못이 있어. 그걸 저지른 사람놈의 새끼가 잘못이지."
고진의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하면서 글을 끝내자.
어떤 증상이 있을 때 A라는 원인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결코 'A라면 B가 된다'는 식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인이 발견되어도 그 책임은 물을 수 없다.
그러니까 '원인'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라는 얘기는 마동팔 검사의 표현대로라면 '술이 무슨 책임이 있어? 술을 쳐먹은 사람놈의 새끼가 잘못'이라는 거다. 고로 과거의 폭음으로 인한 어글리 퍼포먼스는 다 '내 탓'이다. 인과의 사슬이 무의식을 어떻게 조작했든지 간에, 술이 그것을 어떻게 촉발했든지 간에.
이래서 코난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약 중독자가 되었다....
"우쥬 노우~마이 네임~이프 아이 쏘 유 인 해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