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책장이 무너졌다. 한군데에 너무 많이 적재해 둔 탓도 있지만 노후된 탓이 더 클 것이다. 대충 임시방편으로 보수한 다음 흩어진 책과 책장 구석에 처박아둔 CD를 꺼내 쌓인 먼지를 닦고 있는데 어떤 공CD가 눈에 띈다. 순간 '아오이 소라의 동영상인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기대를 접었다. 추잡한 증거물 따위를 남길 리가 없으니까.
정리가 끝난 후 궁금증에 CD를 노트북 안에 삽입했다. 왠 생소한 기타 음악이 흘러나온다. 계속 듣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기타리스트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랑 스타일이 비슷하구나. 모든 곡에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토닉을 M9코드로, 그리고 도미넌트 7화음을 주로 캄파넬라를 이용한 9화음으로 쓰는 것, 팝 스타일의 기타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의 슬라이드 주법, IIm7-V7을 이용한 특정 진행 등등…. 그리고 약간의 미스톤까지.
대체 어떤 기타리스트일까? 중간에 베이스 기타가 나오는군. 확실히 이건 내가 녹음한 건 아닌데....'
그리고 오늘, 차 안에서 다시 한번 들어보았다. 1번 트랙이 끝나고 2번 트랙의 곡이 시작되는데…왠일일까? 1번 트랙과 똑같은 음악이 나온다. 왜 같은 곡을 두 번이나 넣었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내가 그런 건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이 CD는 내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내 책장에 있었던 걸까?
궁금증이 가중되는 차에 2번 트랙의 음악이 흘러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기타와 함께 보컬이 들려온다. 아, 이 2번 트랙은 보컬이 삽입된 것이었구나.
그러니까 1번 트랙은 그냥 반주만 담은 버전이고, 이 2번 트랙은 기타와 보컬이 함께 나오는 버전. 그런데…어라? 보컬의 음색이 낮설지가 않네? 앗?! 보컬은 바로 XXX 형님!
소년 탐정 김전일처럼 마음 속으로 외친다. '수수께끼는 다 풀렸다!'
글타. 이것은 수 년 전에 이XX형님의 곡에 내가 반주를 붙이고, 베이시스트 박XX 님과 함께 녹음한 거였다. 그리고 이 CD는 녹음이 완료된 직후 녹음실 기사 님이 집에서 들어보라며 내게 건냈던 거다.
세션을 많이 한 연주자라면 능히 이런 일도 가능하겠지만, 가뭄에 비 오듯이 할 뿐인 주제에 자신이 만들고 연주까지 한 곡을 완전히 생소하게 받아들이다니…내 기억력이 어떻게 된 건 아닌가?
음악노트 :
제목은 <낙화>.
이XX 형님이 곡을 쓰셨고, 나는 반주를 만들었다. 기타는 파코 마린을 사용했고, 후반엔 약간의 더빙을 했다.
보컬이 포함된 버전은 저작권 때문에 올릴 수 없고, 다만 반주 버전만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