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잡글쓰기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에 대하여

Snufkin 2014. 1. 28. 01:23

 

 

 

 

 

90년대 초반에 보다가 말았던 만화책들 중에 <캠퍼스 러브 스토리(원제 : 동경대학 이야기)>라는 작품이 있다. 대략 5권까지는 주인공의 심리가 리얼하게 묘사되는 재미(게중에는 충족되지 못하는 성 욕구로 인해 학업에 지장을 받는 장면도 포함되어 있다)가 제법 쏠쏠해서 즐겁게 봤지만, 이후 상식을 벗어나는 변태적 상황에 도무지 공감을 할 수가 없어서(사실은 그 만화책을 소장하고 있었던 한 후배가 더 이상 구입을 하지 않아서)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그저 그런 수준의 성애물 만화'로 치부한 만화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장면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경대를 목표로 하고 있는 전교 1등생 '성민(원작 이름은 '무라카미')'은 다른 반 여학생인 '수희(원작 이름은 '하루카')'에게 연정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수희'를 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 '성민'은 그녀의 반을 찾아가지만, 용기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냥 뒷문의 창을 통해 훔쳐보기로 결심한다. 문득 그러자니 무심코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너, 지금 좋아하는 여자애 훔쳐보는 거지?"라고 말하는 듯하여 신경이 쓰인다. 물론 이런 건 지나친 소심함에서 비롯된 피해망상이다. '성민'은 마음의 불안감을 떨쳐낼 묘수(?)를 생각해 낸다. 그 층에 있는 모든 교실의 뒷문 창을 기웃거리기로 한 거다. 이때 '성민'의 마음의 소리는 이렇다.
'이러면 비록 모든 교실을 기웃거리는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지언정, 수희를 훔쳐본다는 혐의는 벗을 수 있다.'

 

 


 

오늘 저녁, 음식물 쓰레기 봉투가 꽉 찼다. 아니, 사실은 진즉에 꽉 찼지만 귀찮아서 내다 버리지 않고 있다가 오늘 발생한 음식물 쓰레기로 꾹꾹 눌러 담은 탓에 터지기 일보직전인 상태다. 일종의 과부하 상태가 유발한 누수(漏水)로 인해 국물(?)을 흘리지 않고 밖으로 가져가는 건 불가능한 상황. 하여, 어쩔 수 없이 싱크대 서랍에서 검은색 비닐봉지(우리에게 익숙한 말로는 '비니루봉다리')를 꺼내 뚝뚝 국물이 흐르는 그것을 담는다.

 

밖으로 가져가려고 봉지의 손잡이 부분을 잡는 순간, 문득 이런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이 상태로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에 넣는 것을 만일 누가 본다면…, 예컨대 수거함이 놓여있는 담벼락 너머의 3층 다세대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 우연히 보게 되면…그(녀)는 '음식물 쓰레기를 규격 봉투에 담지 않고 그냥 검은색 비닐 봉지에 담았네? 양심 없는 인간이구나'하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결국 검은 비닐봉지에서 그것을 꺼낸 다음 투명한 비닐봉지에 다시 담는다. 그런데 용적이 작은 탓인지 잘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용적이 작아서라기보다는 음식물 쓰레기 봉지의 과적(過積)탓이라고 보는 게 맞다. 결국 포기하고 다른 비닐봉지를 찾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검은색 비닐봉지와 적은 용적의 투명한 비닐봉지들 뿐이다. 한참을 뒤지다가 적당한 크기의 비닐봉지를 찾았다. XX바게트의 상표가 찍혀있는 봉지다. 아주 넉넉한 크기는 아니지만, 잘 쑤셔 넣으면 될 것 같다. 문제는 이것이 투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흰색에 가까운 반투명이랄까. 다시금 투명 비닐봉투에 생각이 미치려는 순간,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에라…, 이 '성민'이 같은 놈…"

정신분석학에서 뭐라 하든 나는 이런 심리를 일러, '양심비대증'이라 부르기로 한다. 재미있는 건, 그리 철두철미하게 윤리적으로 살지도 못하는 주제에 특정 사건에 대해 이런 '양심비대증'의 증세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거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아무리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나 자신만 떳떳하면 된다고. 양심비대증 환자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말은 못 된다.
몇 년 전에 시립 도서관에서의 일이다. 도서열람실에서 <뻐꾸기 둥지 안에 날아간 새>의 앞 부분을 조금 읽다가 문득 이런 저런 잡 생각에 빠져버렸다. 최초의 잡념은 아마도 폴 뉴먼 주연의 영화 <차가운 손>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실베스타 스텔론의 <영광의 탈출>이나 스티브 맥퀸의 <대탈주>이거나. 한동안 그렇게 영화가 촉발한 온갖 자유연상에 의해 망상의 늪을 헤맨 탓에 현실 감각을 순간 상실했던 것 같다. 도서관 사서에게 대여 등록도 안 하고 그 책을 옆구리에 낀 채 도서열람실 입구에 있는 도난 방지용 전자 감응기를 통과해 버렸으니 말이다. 당시에 현실을 일깨우는 '삑'소리 때문에 얼마나 당황스러웠던가.

당혹감의 심리적 근거는 억울함이었다. '어…, 내가 왜 등록도 안 하고 그냥 통과를….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저, 이 책 훔치려고 했던 건 절대 아니예요!' 마음속에서 이렇게 외쳤다.

 

물론 도서관 사서가 내게 도난의 혐의를 씌우기는 커녕, 의혹의 눈길 조차 보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무고함을 호소하지 못해 안절부절이다. 그런 심리적 불안정은 얼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서 오히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 같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짓말탐지기 조사라도 했다면 거짓말을 했다고 판명이 날 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한 일이지만, 사실 당황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도서관이라고는 생전 처음 오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이들이라면 대출 등록을 열람실 외부에서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딱히 수상할 구석은 없잖은가. 그럼에도 당황한 나머지 우물쭈물하다가 대출도 못하고 그냥 사서에게 돌려준 뒤 황급히 열람실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그런 태도가 외려 더 의심스럽게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한참 후였다.

 

이 날의 교훈은 이거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경우에 따라서는 도둑이 아닌데도 제 발 저릴 때가 있다.

 

 

 

 

 

오래 전에 한 후배로부터 다음의 얘기를 들었다. 인파로 북적이는 시외버스터미널 안에서 벌어진 일이란다. 그 후배가 개찰구를 향해 걷고 있는데 3m 떨어진 지점에 노란색의 빳빳하고 동그란 노끈이 바닥에 놓여있었다고 한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재미로(대체 이런 행위에 그 어떤 재미가 있는지는 본인도 자세히는 몰랐을 테지만) 노끈의 일부분을 살짝 밟았는데, 순간 똑바로 일어선 그 동그란 노끈에 관성의 법칙의 지배를 받아 보행하기를 멈추지 않은 나머지 발이 걸려서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단다. 직립보행이 진화론적 특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순간 들었어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으리라. 발에 걸리는 순간 곧바로 넘어졌으면 그다지 창피할 일도 아니었을 텐데, 발이 노끈의 상단에 걸리는 순간 흐트러진 몸의 중심을 잡으며 걸린 발을 빼내느라 그 자세 그대로 2~3m 정도 폴짝폴짝 외다리 뛰기를 하다가 결국 중심을 잃어 앞으로 고꾸라졌다고 한다. 당시 그 후배의 표현대로라면,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고.

한 친구가 겪은 일이다.  술자리가 파하고 돌아가는 길에 피곤이 몰려와 벤치에 잠깐 앉았는데 그만 깜박 잠이 들어버렸던 모양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눈꺼풀을 투과하는 빛에 잠을 깬 그는 눈 앞에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벤치에서는 언제 떨어졌는지 보도 위에 옆으로 누운 채였다고. 아마도 그 친구 입장에서는 노끈에 걸려 뒤뚱거리는 것 따위는 망신 축에도 들지 못했으리라.

 

우하하

 

후배와 친구의 치부 거리(사실 이 정도는 치부 거리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를 일방적으로 폭로(?)하자니 어쩐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평하게 나의 치부도 하나만 까발리자. 아주 오래전―황사의 하늘, 또는 불모지처럼 황량한 고뇌가 마음에 가득했던 젊은 시절의 어느 날, 2호선 전철에 탑승했을 때다. 전철 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석인 상태여서 비교적 복잡하지 않았다. 목적지를 알리는 안내방송을 듣고 자리에서 벗어나 출입구로 향하던 순간, 돌발적인 기침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기침이 음향의 형식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제법 걸쭉한 물질의 형태를 갖춘 채 체외로 튀어나왔다는 것.

 

체액과 체면의 동시다발…아니 동시쌍발적 자유낙하.
단지 쪽팔리고 마는 정도가 아니다. '초자아 비대증'은 걸죽한 그것의 표면에 비친 무수한 눈동자들을 실제 이상으로 과장하여 본다. 그리고 그 눈동자들을 통해 힐난의 음성을 듣는다. 동시에 심리적 자기방어기제를 동원하여 마음속으로 '소리없는 아우성'을 친다.

'그저 있을 수 있는 실수일 뿐…. 절대로 일부러 뱉은 거 아닙니다!'

또는,

'지하철 실내에 토하는 인간들도 있는 거에 비하면 뭐 이 정도야….'
그러나 이런 자기합리화는 결과적으로 드러난 사실―이 '사실'에 현실감을 더하는 건 그것의 걸죽한 질감이다―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반사된 눈동자들은 한결같이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라며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라는 듯 버티기로 한다. 조금 있으면 전철이 설 것이고, 탈출구가 열릴 것이다.
다만 문제는 양심비대증 환자의 시간감각으로는 일 초가 여삼추(如三秋) 같다는 점이다.

 

 종종 경험하는 일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새로 구입한 책의 하얀색 겉장에 찻물이 떨어져서 얼룩이 졌다. 다 마른 후에 얼룩을 지우기 위해 성능 좋은 펜텔 지우개로 박박 문지른다. 그러자 얼룩은 자취를 감춘다. 다만 문제는 문지른 종이의 표면이 너무 닳아서 너덜너덜해졌다는 것, 그리하여 원래의 얼룩보다 더 지저분해졌다는 것인데, 복원(復原)에의 강박증은 그 후배의 왼발처럼 관성의 법칙에서 그다지 자유롭지가 않아서 계속하여 방안을 강구한다는 게 고작…수정액으로 덧칠하기.

최초의 녹차 얼룩이 차라리 깔끔했다.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OTL

 

 

지하철 안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눈 앞에 걸죽한 그것이 있다. 기분에 모든 이들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만 같다. 따라서 그것의 질감과 색감을 무화시킬 필요가 있다. 아직 그것에 다다르지 못한 눈길을 차단함으로써 비난의 양적 무게를 조금은 줄여야한다. 다만 그 시도는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나는 그것의 존재를 모른다. 따라서 걸죽한 그것은 나라는 초연한 소의 우연한 뒷발질에 밟히는 쥐새끼여야 한다.
그것을 '사뿐이 즈려밟고' 간다. 순간…그것의 형체를 없애는 데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눈치 채이지 않게 살짝 발을 끈다. 직후에 어쩌면 살짝 발을 저는 체 했을지도 모른다. 발을 바닥에 끌은 행위에 자연스러움을 더하기 위해서.

 

 

자연스럽지 않았던 행위가 있었다면…범행 현장을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는 것. 시도는 일면 성공한 듯이 보인다. 걸쭉한 질감과 희끄무레한 색감은 흩어져 사라진 듯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그것의 체적에서 높이가 감소한 만큼 넓이가 증가했다는 것. 결국 붓으로 찍은 듯 한 점에 불과했던 그것은 이제 한 획이 되어버려 전철 안을 갤러리로 둔갑시키고야 만다. 

이렇게 '긁어서' 단순한 과실은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라는 '부스럼'으로 격상(?)된다. 

 

헉

 

후배는 말했다.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고. 내 생각에 그는 진심으로 쪽팔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진심으로 쪽팔리다면 '쪽팔려 죽는다'는 따위의 진부한 표현으로는 그 심정을 다 헤아려 표현함에 부족함이 있다는 걸 충분히 깨달았을 테다. 그날의 '쪽팔림'을 나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 걸쭉한 것이 낙하하는 순간, 그때까지 가슴에 멍울져 있던 고뇌는 '새하얗게' 잊히었고(더불어 그 고뇌의 대상이자 유발자였던 '그녀'에 대한 모든 관념은 증발되어 버렸고), 그 빈 자리는 오직 구겨진 체면과 면피에의 강구만이 차지했을 뿐이었다."

 

그날의 교훈 :
고뇌는 그보다 더한 고뇌, 혹은 망신살로 잊힌다. 혹은,
긁기 전에 멈춰라.

 


 

 

 

믿거나 말거나 초연함을 얻는 방법 :

1. 세상 사람들은 그리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2. 세상의 주연으로서가 아닌, 엑스트라로서 자신을 보는 법을 깨닫는 것.

1. 어느 여름날 밤, 아파트 근처의 한적한 보도를 거닐며 C군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러이러한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때 그가 한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별로 신경 안 써요."

글타.

2.  이보다 10년도 더 이른 어느 초봄의 오후, K군의 자취방에 인접해 있는 발코니에서 담배를 태웠을 때 그로부터 들은 얘기 :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 혹은 주연이라고 여기며 살지만, 그거야 말로 불행의 근원이다. '나는 주연이 아니다, 단지 엑스트라일 뿐이다'라고 생각하면 남의 이목을 과도하게 신경 쓸 일이 없다.


 

                                                         일드 <동경대학 이야기>중에서


 

그러나 이런 좋은 말도 당장 눈 앞의 개망신 앞에서는 사상누각일지니…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어떤 엄중한 순간에도 방귀를 뀔 가능성이 현존함을 인정하는 것.
또는 형이상학적인 사랑이 정동(情動 emothion)의 급류를 지나 허리하학적 변기로 배출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고귀한 인간이라는 강박에서 조금은 해방되는 것.

초자아 비대증 환자에게 타인의 이목이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존귀에의 기대치가 투영된 것이 아니겠나.

 

아니…, 실수라 해도 공공장소에서의 불순물 배출은 역시나 '쪽팔린' 일이라 이런 생각 역시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거다….


 

 

 

 

 

                                                                    <동경대학이야기>중에서

 

                                                                    

       

 사족 같은 이야기, 아니
그냥 '족 같은' 이야기 첨부 :

 

이별의 아침, 정확히 말하자면 이별한 직후 용량을 초과하는 음주로 인해 떡이 되어 자리에 뻗은 지 예닐곱 시간이 지났을 아침 무렵, 요의를 느껴 흐느적 흐느적 변기로 다가갔을 때의 이야기다. 새벽 정기로 인한 근육 경화 탓에 '세워 총' 자세를 하고 있는 그것과 변기와의 각도를 맞추기 위해 근육 긴장(쉽게 말해서 '근육 당김')이라는 고통을 감내한 채 손으로 그것을 눌러 총구를 억지로 아래로 향하게 하여 엉거주춤한 자세로 배뇨를 하고 있었을 때, 잠이 덜 깬 탓이었을까…, 순간 손가락이 총을 놓쳤고, 관성에 의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버린 총구에서는, 변기에 인접한 벽면 위까지 연장되어 부착된 거울 위로 여전히 총알이 발사되고 있었다는 얘기를, 스미골 같이 생긴 친구 P군으로부터 들은 바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총알 세례 덕분에 얼룩진 거울 속에서 찌그러진 동시에 웃고 있는 얼굴을 이별의 아침에 바라보는 소감이 어땠을 것 같냐고.

그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헤어진 다음날 아침에도 발X는 되더라."
글타.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반드시 오는 새벽처럼 젊은 날의 그것 또한….

 

그가 말한 것의 함의는 아마도 이런 것이었으리라. 
살다보면 종종 비극의 무대에서 방귀를 뀔 때도 있다는 것, 또는 사적 감정을 배제하는 자연이 강제하는 영구한 욕망에의 불가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