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 쓰기의 어려움
아르투어 슈니츨리의 단편 <이 무슨 멜로디인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천재인지도 그다지 자각하지 못하는 한 소년이 어느날 무심결에 떠오르는 선율을 악보에 적어 넣는다. 그러다가 바람결에 악보는 근처 숲속으로 날아가 버리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는다.
우연히 숲속을 지나가던 음악지망생 청년은 우연히 이 악보를 발견하고는 탁월함을 예감하여 그 멜로디로 피아노 변주곡을 만들고 여자친구에게 들려준다. 한마디로 '뻑간다.'
이후 청년은 그 곡으로 유명해지고, 평론가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찬사를 듣는다. "그 곡에 포함되어 있는 영감, 그것 하나만큼은 정말로 천재의 그것이 틀림없다."
문제는 후속작을 낼 수 없다는 거. 결국 청년은 자살하고, 원작자인 천재소년은 어느날 그 청년의 변주곡을 접하게 된다. 실력이 부족한 탓에 자신이 연주하지는 못하고, 자신의 피아노 선생이 연주하는 것을 감상한 거다. 인용하면,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세계가 그 멜로디에서 터져 나왔다.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존재하는 환상적인 장엄함, 이에 대한 예감이 소년에게 밀려 들어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분명 이를 느끼고 있었지만, 말로는 거의 표현해 볼 수 없는 그러한 장엄함....
그의 몸을 감싸 안고 있는 것은 아득한 옛날 고대 그리스의 무한천공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이었다.
"이 무슨 멜로디인가!"
저 못난 줄 모르고 도작(盜作)으로 유명해진 청년과 자신이 만든 선율이라는 걸 기억하지도 못하는, 저 잘난 줄 모르는 천재소년의 대비. 문득 신에게 영광을 돌리며 작곡을 했으나 재능 없음에 좌절하던 살리에리의 서글픈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모짜르트는 살리에리의 곡을 즉흥적으로 변주함으로써 원곡의 부족함을 보충한다. 천재성을 목격하고 십자가를 불태워 버리는 살리에리의 심정을 신은 알까.
오규원 시인은 <현대시작법>의 서문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조금도 과장되었거나 거짓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말하면 믿지를 않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대목이다. "문제는 시에는 좋은 시와 그렇지 못한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의 말에서 '시' 대신 '멜로디'를 대입해도 좋다. 솔까 '개나소나' 쓸 수 있는 게 멜로디다. 머릿속으로 아무런 선율이나 떠올려 보라. 작곡이 별 건가. 그게 작곡이지. 뭔가 산만해서 정리를 할 수 없다고? 문제 없다. 그런 건 악식을 공부하면 누구나 다 해결된다. 악식을 익히는 게 양자역할을 배우는 것 보다 천 배는 쉽다. 정리가 잘 되어서 모난 데가 없는 멜로디를 작곡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 무슨 멜로디인가!"하고 감탄을 하게 만드는 멜로디, 폐부를 찔러서 감동의 쓰나미가 밀려드는 (비유가 좀 구차하긴 하다....) 멜로디를 쓰는 일은 매우, 심히, 졸라 어렵다는 거다.
아니, 어쩌면 죽는 그날까지 불가능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 명의 작곡가가 일생 백 곡을 썼다고 했을 때, 그 중 단 한 곡만이 감동을 주는 명곡일지라도 그 작곡가는 성공한 작곡가이다."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선율의 조작이 어렵다는 걸 에둘러 말씀하신 것일 테다.
바흐, 차이코프스키, 로드리고, 모짜르트 등의 어떤 곡에서는 신이 내린 듯한 영감으로 가득한 선율을 지니고 있다. 음악에서 진정 신비로운 건 이 부분이다.
간만에 떠오르는, 제법 쓸만한 멜로디가 있어서 기타곡을 후다닥 썼다. 최초 떠오른 선율에 화음을 붙여서 연주하니 더욱 그럴듯 하다. 다만 딱히 이상한 부분도 없고 그럭저럭 들을 만한 멜로디를 만들 때마다 찾아드는 불안감이 마음에 걸린다.
'근데…이거 표절이면 어쩌지?'
비록 '천재적인 영감이 가득한' 선율에 범접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그럭저럭 모난 데가 없는 자작 선율을 듣노라면 이런 의혹을 떨쳐내기가 아주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자연스러운 선율을, 누군가 선취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자뻑'이 아니다. 작곡을 시도한 사람 중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거라고 본다.
재즈나 19세기 후반의 클래식 음악처럼 마디 단위로 조성을 바꾸어 스케일을 다양하게 전개해 나감으로써 표절의 위험을 해소할 수도 있지만, 잦은 조바꿈으로 친숙함(대중성?)을 해치게 될 우려도 있다. 잦은 조성을 억제하는 대신, 선율 리듬의 측면에서 하나의 음표에 두세 음절을 삽입한다거나, 16비트 단위로 선율의 리듬이 세분한다거나, 혹은 싱코페이션 따위로 조직한다든지 하여 선율의 변화를 다방면으로 꾀하는 방법도 있다. 이런 방식이 널리 사용되는 소위 팝 계열의 음악이라면 표절에의 근심이 '비교적' 덜 들지도 모른다. 위의 재료들로 변화를 추구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스타일의 정적인 기악곡을 어떤 필요에 의해 써야 할 경우가 문제인데, 비의도적인 우발적 표절이 유발되기 쉽기 때문이다
(기실 19세기 이후로 클래식 음악에 점점 난해해졌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독창미학'이라는 것도 어쩌면 표절에 대한 두려움을 에둘러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기악곡을 쓸 때 표절을 피하는 가장 수월한 방법은 '성악적 스타일' 대신에 '음형적 스타일'을 선택하는 거다. 예를 들자면 <백조의 호수>나 <트로이메라이>처럼 선율이 강조되어 사람이 입으로 노래할 수 있는 곡을 쓰기보다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의 제 1번 프렐루드 C장조>나 빌라로보스의 <연습곡 제1번>처럼 성악적 주선율이 없는 스타일의 곡을 쓰면 표절의 위험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작곡가에게는 성악적 선율을 쓰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있다. 선율에 감동 받고 싶어하는 음악적 본성이랄까, 뭐 그런 걸 무시할 수만은 없다는 게 문제다.
다시 '성악적 선율'의 문제로 돌아가자.
인간의 심성에는 다소 고약한 부분이 있어서, 타인의 작품에 대해 '티'를 찾아내려는 못된 버릇이 있다. 20년 전 즈음에 미디로 작곡한 곡을 한 친구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처음 멜로디는 '라시도라'였는데, 한참을 듣고 나서는 그 친구가 이렇게 지적을 하는 거다.
"음…괜찮은데? 좋아…근데 한 군데 아쉬운 부분이 있는데…처음 부분 네 개의 음은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Eye in the sky>랑 똑같지 않니?"
하마터면 '네 놈 여친의 슴가도 전 여친의 것하고 똑같이 생기지 않았냐?'고 내뱉을 뻔했다.
고맙게도, '비의도적' 표절, 혹은 '무의식적' 표절에 대해서 나 같은 무명의 작곡가가 무자비한 청자들로부터 쉴드를 칠 수 있게끔 전례를 남겨 주신 아주 유명한 작곡가가 계시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그 유명한 <시네마 천국>의 테마 음악의 앞 부분 선율은 르네상스 시대 작곡가인 윌리엄 버드의 <솔즈베리 백작에게 바치는 파반느>와 비슷하다.
물론 표절 혐의를 입증하는 마디 수를 채우지는 못했기 때문에 표절은 아니다. 그래도 법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심정적으로는 표절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옥에서 티를 찾는데 변태적 쾌감을 느끼는 못된(?) 인간은 있기 마련이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그 자신의 권위로 그 모든 의혹을 무화시킬 수 있지만, 나 같은 무명 씨는 '라시도라'에 대해서 해명해야만 한다.
그 '못된' 시각(정확하게는 '청각')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Big Brother is watching you. 내게 있어 '빅브라더'는 쥐나 닭 이전에 '라시도라'를 지적한 그 친구놈 같은 인간들뿐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세운 엄격의 눈이기도 하다. 표절했다는 혐의 자체보다는 비의도적인 무의식적 표절 자체가 두렵다. 표절했다는 부당한 혐의는 내 양심의 소리로 무시할 수 있다. 하지만 비의도적인 무의식적 표절은 그럴 수도 없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각본가인 임병석(최민수 분)이 자조적으로 내뱉은 인상적인 대사가 생각난다.
"그래, 모든 걸 다 인정할게. 하지만…하지만 한 가지만 믿어줘. 난 널 속인 게 아니란 말이야. 정말이야. 나도…나도 내 자신한테 속은 거야. 모든 게…모든 게 내 창작인 줄 알았어…무슨 말인 줄 알겠니?"
나도 나 자신에게 속을까봐 두렵다.
대체 21세기에 '독창적이면서도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대중적인' 선율의 조작이 가능한 일일까? 천재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것만은 저들도 인정할 것 같다. 이미 훌륭한 '음들의 결합'이 지난 시대의 천재들에 의해서 선취되었다는 사실. 때를 놓쳐 이미 다른 이들이 상당수를 캐어 간 냉이 밭에서 열심히 호미질을 하고 있는 처지의 고달픔을.
현대음악의 난해성은 필연적 결과일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