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뉴스
뉴스 앵커나 기자들의 어투에서 상투적인 시적 표현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영하 13도의 한파가 들어닥친 후 한동안 동장군은 물러나지 않은 채…"
"오늘 인천 공항에서는 10만 명의 인파가 썰물이 빠지듯 해외로…"
"술 취한 20대가 한밤중에 광란의 질주를…"
"야박한 인심에 마음은 꽁꽁 얼어갑니다."
이런 식의 상투적 표현을 듣자면 문득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나타낼 때 쓰는 특정한 표현들을 매우 괴롭게 여겼다.(중략) 고작 하는 반응이라는 게 폭우에 대해서는 ‘장대 같은 비가 온다’, 쌀쌀한 날씨에 대해서는 ‘오리도 춥겠다’. 그리고 꽉 막힌 사람들에 대해서는 ‘바구니처럼 꽉 막혔다’인 사람들 때문에 그는 고통을 느꼈다.
(중략) ‘장대 같은 비가 온다’와 같은 구절에는 ‘바이바이’와 같은 허식이 전혀 없지만 그것은 가장 진부한 문장에 속하며, 이런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함축할 뿐이다. 프루스트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것은 표현에 대한 좀 더 정직하고 정확한 접근법을 옹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중략)
우리는 여기서 프루스트가 왜 너무 자주 사용되는 구절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는지 질문해 볼 수 있다. 결국, 달은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것 아니던가? 노을은 불타는 것처럼 보이지 않던가? 상투어란 바로 좋은 표현이기 때문에 인기 있는 것이 아닌가?
상투어의 문제는 잘못된 관념을 담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훌륭한 관념들을 피상적으로 조합해낸다는 데 있다. 해는 해질녘에 불타고 달은 어스레한 빛을 내지만, 우리가 해나 달과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이 이 주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첫 번째 말이라기보다는 최종적인 말이라고 결국 믿게 되고 말 것이다. 상투어들은, 한편으로는 단지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에게 심어주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는, 어떤 수준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처음에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중에서
물론 뉴스는 공공의 이해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독창적인 은유를 사용할 수는 없고, 따라서 진부한 표현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진부함이란 익숙함에 다름 아니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가끔 그들의 상투적인 표현이 웃기게 들릴 때가 있다. 딴에는 뉴스의 어투에 걸맞는 건조체(乾燥體)를 보완하기 위해 나름 공들여서 시적 표현을 삽입하는 것 같은데, 그 상투성이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는 걸 보면 분위기의 유화(柔和)라는 점에서는 나름 성공한 것 같기는 하다.
<시적(詩的) 뉴스>라는 제목의 방송이 있어서 상투적 표현을 배제한 뉴스를 한다면 어떨까? 나름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가정불화로 인해 가출한 10대 남녀 청소년들이 사랑의 미약인 양 부탄가스와 본드를 흡입한 상태로 야합하다가 급작스러운 동맥경화로 인해 남학생은 여학생의 배에서 요단강 건너는 배로 갈아탔으며…"
"내일의 날씨입니다. 내일 오후에는 칼국수 같은 비가 바지락바지락 내리다가, 밤부터는 가을을 재촉하는 별들의 소리(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초가을 밤의 대기를 적시는……"
이상신,국중록 作 웹툰<꽃가족>의 한 장면.
뉴스 방송이 다루는 사건들 중 가장 기묘하게 보이는 건 성차별에 관한 것이다.
"입사원서에 사진을 붙이는 일은 특히 여직원에 대해 외모 지상주의를 반영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런 뉴스를 보면서 어떤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어지간히 관례에 길들여진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뉴스 방송의 남자 앵커는 왜 여자 앵커나 리포터처럼 20대의 얼짱, 몸짱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