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찜찜함
건망증이 심하지 않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나는
외출 직전에 항시 소지품 따위 등 챙겨야 할 것을 점검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간혹 이럴 때가 있다. 외출 직전에 챙길 건 다 챙겼는지 점검하고는 누락한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그런데 기분이 좀 이상하다. 뭔가 반드시 챙겼어야 할 것을 집에 두고 온 찜찜한 느낌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두고 온 것은 없는 것 같다.결국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지만, 그 찜찜한 느낌은 단순한 기우(杞憂)가 아니었다. 집을 나온지 한참 지나서야 뭔가 챙겨야 할 것을 누락 했음을 깨달은 거였다. 그 찜찜한 느낌은 십중팔구 망각된 것이 있다는 것을 예시하는 마음의 작용이 분명하다. 의식에서 한시적으로 지워져 버린 대상이 마음에 던지는 구조 신호랄까. 몇 차례 그런 것을 경험했더니 이제는 그 찜찜한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한다.
'잘 모르겠지만, 오늘도 뭔가를 집에 두고 나왔군.'
아주 비슷한 느낌은 아니지만, 창작곡을 두고도 그런 느낌이 들 때가 꽤 많다. J.S.Bach의 '관현악 모음곡 3번 중 Air'를 편곡했을 때를 예로 들어 얘기해 보자.
Air를 1998년 즈음에 관현악 악보를 참조하여 클래식 기타 독주용으로 편곡한 바 있다. 이후 2003년 즈음에 약간의 수정을 하여 비공식 출판을 한 적도 있다. 몇몇 분들이 호평을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곡을 녹음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연주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운지의 난이도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것도 원인의 일부분은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건 아니었다. 뭔가 편곡에 문제가 있는 걸까? 그럴 것이라고 판단한 나는 Air악보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았다. 세월이 좀 지난 뒤에 보니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조금 눈에 띄었고, 이내 수정했다.
이후 그렇게 손을 본 악보로 즐겨 연주했을까? 아니다. 수정을 했어도 연주하지 않았다. 수정한 곳을 보니 딱히 이상한 건 없다, 이 정도면 기타 독주 치고는 훌륭하다, 이렇게 생각은 했지만 결국 연주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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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곡이 Air 하나만 있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편곡한 곡들 중 절반 정도, 특히 고전 음악 편곡물에는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보통의 경우라면 음악적 나르시즘 때문에라도 자작자연을 즐겨 해야 정상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끄적거린 곡들보다는 남들이 만든 기존의 곡을 연주하는 걸 선호했다. 아무래도 남의 떡이 커 보이는 탓이려니 했다.
자신의 작/편곡물에 대해서 이성적으로는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데 반해, 해당 곡을 반드시 실연으로써 재현해야겠다는 감정적 동인(動因)이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는 만족하지만 '가슴'은 뭔가 가당찮아 한다고나 할까. 오랜 세월동안 그 '음악적 찜찜함'에의 원인을 다른 데에서만 찾았다. 예컨대 해당 곡은 기타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둥, 좀 좋은 기타로 연주하면 괜찮게 들릴 거라는 둥….
경우는 다르지만, 망각에의 찜찜함이나 '음악적 찜찜함'은 사실의 은폐에 경종을 울리는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것 같다. 망각의 찜찜함과 마찬가지로 세월이 좀 더 지난 후에야 '음악적 찜찜함'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다. 그 찜찜한 기분이 내게 전하고자 했던 진실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아니야…이건 아니야. 이건 음악적 측량과 계산을 떠나 뭔가 좋지 않은 부분이 있어."
그리고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나서, 예전에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감각의 미세한 부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을 여기에 구구절절 다 얘기할 수는 없다.
클래식 기타 독주용 편곡물은 어차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한계는 종종 음악적 부실(不實)로 드러난다. 피아노 곡이나 관현악곡을 기타 독주곡으로 편곡하는 경우, 안 된 얘기이지만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더 많다고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듣기에 괜찮은 편곡 작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경우에도 작곡자가 마음에 들어 할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문제는 남는다. 음색이 피아노나 관현악에서 기타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 대체 어떤 점에서 장점을 찾아야 할까? 작곡자가 심사숙고 끝에 기재한 음을 편곡자가 마구 누락하는 걸 좋아나 할까?
결국 위와 같은 생각은 '좋은 편곡=원작에의 모사(模寫)'로 귀결되고 만다. 결국 원작보다는 못한 '짝퉁'을 만드는 셈이다. 물론 원작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중요하다. 문제는 원작의 모사에 집착한 나머지 기타라는 특정 악기의 특색을 지워버리는 경우다. 원전(原典)을 중시하는 건 고전 음악의 편곡에서는 특히 지향해야 할 일이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기타라는 악기에 발생하는 무리수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경우가 없잖아 있다는 것. 반면에 기타라는 악기의 장점을 부각하기 위한 편곡을 시도할 경우(예컨대 선율을 연주할 때 1번 선 보다는 표현력이 풍부한 2번 선으로 시도하는 것 등), 원곡의 구조가 훼손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든 완벽을 보장하기는 어렵다. 대체 기타 독주곡에서 '완벽'이라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일일까? 아니, 그 전에 기타라는 악기는 피아노 음악을 담을 수 있을 만큼 독주 악기로서 완벽하기나 한 걸까?
(이렇게 얘기하면 기타 연주자나 애호가들은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오해는 말자. 변명이 아닌 진심으로 말한다면, 세상에 완벽한 독주 악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플룻은 화음 연주가 안 되고, 피아노는 글리산도나 비브라토가 안 된다. 화음이 되고 비브라토 등이 되는 기타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악기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인상주의 음악 이후의 음악가들이 추구했던 화성의 재현과 찰현악기의 진한 호소력에의 표현이 어렵다는 걸 생각하면 완벽이라는 낱말을 쉽게 꺼낼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결국 이 세상에 완벽한 악기란 없다. 아니, '완벽'이라는 것 자체가 꿈이요, 허깨비다. 캐비어가 완벽한 요리인가? 그 요리엔 된장 맛이 안 나서 완벽하지 않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자. 결국 고전 음악의 기타 편곡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상호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맞서고 있다.
1) 원전(原典) 그대로의 음악적 구조를 가능한 한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
2) 기타의 개성을 원전성보다 앞세우려는 욕망.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작/편곡자인 롤랑 디앙(Roland Dyens)은 '당신의 편곡 작품은 왜 그렇게 연주하기에 어렵나?'라는 항변 아닌 항변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기타를 위해 음악을 희생할 수는 없다고. 이 얘기를 잘못 오해하면, 위의 1)을 중시하고 2)는 경시해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단순한 얘기는 아니다. 롤랑의 얘기는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 노력으로 음악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면, 난이도의 정도를 고려하지 말고 가능한 한 그렇게 해라, 물론 '음악의 효과'에는 '기타 특유의 효과'도 포함된다.
그저 빤한 얘기로 밖에는 귀결되지 못할 것 같다. '음악적 찜찜함'은 내게 해당 곡의 편곡이 미숙함을 알려주는 신호다. 고전 음악 편곡에 있어서는 대개 1)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이다. 빤한 얘기지만, 특정 악기의 개성을 뒤로 한 채 원전성에 연연하면 그런 결과가 나온다(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편곡'이라는 것 그 자체에 '원전'의 훼손, 또는 변화를 함축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다. 개성을 지나치게 앞세우면 원곡 자체의 품위가 손상된다. 세상 일의 대개가 그렇듯이 중도, 혹은 절충의 묘가 요구되는 거다. 이 절충에 뭔가 부족함이 있을 때 마음은 신호를 보낸다. '뭔가' 찜찜하다고.
찜찜한 느낌이 해소될 때 비로소 손가락은 자주 악기의 지판을 더듬게 된다. 절충의 절묘한 지점을 찾은 경우다. 물론 그 절충의 결과가 음악적으로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악기의 개성을 살리다보니 원전의 맛을 해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단지 악기의 개성으로 인한 음악적 효과가 단점을 덮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위에서 이미 말했듯이 어차피 세상에 완벽한 악기, 아니 완벽한 음악은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완벽한 음악은 역시 있다고 생각하지만, 기타 독주용 편곡물에서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신의 건강에 좋다. 세상에는 화음에서 중요한 3음이 누락된 기타곡들도 많다(물론 이런 오류도 다음과 같은 나름의 심오함은 던져 준다. '3음의 누락이 해당 화음의 성격(장화음인지 단화음인지)을 알 수 없게 만드는 건 아니다. 언어에서 동음이의어의 혼동을 문맥으로 타개할 수 있는 것처럼, 해당 화음의 성격은 음악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3음을 '상상'으로 들음으로써 누락된 것을 채울 수 있다.').
결국 '음악의 원전성을 100% 보장하지도 못할 뿐더러 구조적으로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악기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원전 재현에의 의지와 손을 맞잡을 때 최선의 편곡이 나온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의 기타 독주용 편곡 작품이라면 '음악적 찜찜함'은 사라져 버릴 테다. 이렇게 위화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록 약간의 올이 풀린 그물일지라도 만족할 만한 음악의 고기는 낚을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즐겁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율. 바흐는 진실로 천재적인 멜로디 메이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