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ufkin 2013. 10. 11. 19:36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것이 인생. 그런 인생에서 절대 내리막을 허용하지 않으려 하는 것들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물론 의식주에 관련된 것이겠지만, 그런 것을 차치하면 자동차와 악기, 그리고 커피가 순위를 다투게 되지 않을까?
 그랜져를 타고 다니다가 형편상 소나타로 차를 바꾸게 되면 그것을 전락이라고 느끼는지는 (좋은 차를 타고 다닌) 경험이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차를 타고 다니다가 상대적으로 질이 떨어지는 차를 타고 다니게 될 경우 기호가치로서의 가치 하락은 차치하더라도 차 자체의 성능에서 기인하는 불만족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건 악기 역시 마찬가지다. 고가의 펜더 기타를 사용했던 사람이 국산 콜트 기타에 만족하기란 쉽지 않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싸구려 커피' 얘기를 하련다. 1994년의 11월의 어느 날, <제비꽃>의 노래 가사처럼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있고 싶'었던 K군과 내가 학교 정문 근처의 어떤 가게 앞에 세워져 있던 자판기에서 뽑아 마셨던 커피의 맛은 각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객관적인 맛이 그랬던 건 아니었을 테고, 아마도 시리지 않을 정도의 냉기와 새벽안개가 조장한 '분위기의 맛'이었을 거다. 

 덧붙여, 작금에 회상하는 그 맛의 실체란 당시의 새벽안개가 거리(街)의 윤곽을 불분명하게 만들어 놓은 것처럼 어쩌면 20여 년이라는 세월의 거리(距離)가 실제 맛의 윤곽을 지워 버리고 허상의 구미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는지.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커피는 K군이 자신의 자취방에서 끓여준 '달고 고소한 커피'다. 스탠더드한 찻잔에 '인스턴트 커피 두 스푼+프림 두 스푼+설탕 두 스푼'을 넣은, 이른바 '다방식' 커피. 이때의 맛은 위의 커피보다 조금은 객관적인 데가 있다. 그 맛은 아마도 끓인 물의 온도가 적당했던 데에 기인한 것이었으리라.

 

 지금은 인스턴트 커피는 잘 먹지 않고, 원두를 갈아서 커피 여과지에 넣은 다음 뜨거운 물을 부어 내려 마신다. 처음에는 핸드밀로 공들여 원두를 갈아 마시는 것이 너무 귀찮아 그냥 인스턴트 커피로 떼우려 했지만, 전동그라인더를 구입한 다음부터는 원두 특유의 향이 빠진 인스턴트 커피에 완전히 흥미를 잃게 되었다. 자판기 커피에 만족해 하던 싸구려 입맛이 조금은 고급스러워진 거다.

 

 

 

 

 

 요리를 소재로 한 만화를 가끔 보면 '그때의 맛'을 찾아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나온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어떤 요리의 1인자가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요리에 있어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나이가 지긋한 어떤 노인이 소문을 듣고 그 쉐프의 식당을 찾아오나, 그 노인은 단지 한 입을 맛보더니 수저를 내려놓고는 자리를 뜬다. 자존심이 상한 쉐프가 이유를 묻자 그 노인이 말하기를, 어렸던 시절에 어머니가 해 준 '추억의 맛'과는 거리가 멀다는 거다. 주인공인 쉐프는 그 노인의 추억의 맛을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결국 쉐프는 추억의 맛을 재현하는 데 성공하고, 그 노인은 그 요리를 입 안에 넣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되찾은 미각을 통해 추억을 강하게 환기하며.

 이런 식의 주제는 아마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선취한 것일 텐데, 소설의 재미가 어떻든지 간에 추억을 환기하는 미각의 힘에 관한 최고의 묘사가 아닐지 싶다.

 추억의 맛에 관한 또 하나의 기억. 초등학생 시절, 비 오던 어느 토요일 점심에 먹었던 라면 맛은 그 이후의 모든 라면 맛을 '모조'로 만들어 버렸다. 양은냄비에 당시로서는 흔하디 흔한 삼양라면과 김치를 넣고 석유풍로로 끓인 것인데, 그때의 그 맛은 내겐 '라면의 이데아'같았다고나 할까. 만약에 어느 분식집에서 그때의 맛과 똑같은 라면을 먹게 되면 나도 만화의 등장인물들처럼 눈물을 흘리게 될까.

 

 그 '라면 맛의 이데아'의 실체는 뭘까? 적절한 물과 스프의 양, 완벽하게 적절히 익은 면발, (몸에 해로움 여부는 차치하고)양은냄비라는 재질의 영향, 라면과 조화된 김치의 익음 정도, 석유풍로라는 화기의 영향, 당시의 기후, 내 배고픔의 정도, 그리고 할머니의 손맛 등이 화합하여 이루어낸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그때의 그 '맛의 이데아'란 일종의 환상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은 한줄기 미미한 빛에 불과하지만, 추억의 프리즘을 통과하면 고색창연한 빛깔을 띄는 것처럼.

 

 물리적 미각을 넘어 시간이라는 프리즘을 통한 감각적 과장이 개입될 여지가 많은 '추억으로 조장된 맛'의 재현 불가능성을 장담할수록, 만화책에서처럼 과거의 맛을 맛보고 눈물을 흘리는 노인은 맛에 관한 한 꾸밈이 없고 담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리즘을 걷어치워도 꾸밈없이 간직될 맛이라면 그 '맛의 이데아'는 허상이 아닌 실재일 테니까.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맛은 일종의 가상이 아닐까. 주관적 착각으로 아무리 '그때의 그 맛은 잊을 수 없다'고 말해봤자 결국은 '그때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그리움의 집체인 '그 시절'이라는 추상성을 특정 음식이나 인물로 실재화하는 것.

 맛의 절반은 추억이다.

 특정 사람에 대한 그리움의 실체가 그러한 것처럼
맛의 절반이 추억이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원두커피에 길들여진 지금의 입맛으로는 그 싸구려 자판기 커피를 그다지 맛있게 느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같은 얘기를 '그때 그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 지금의 '사람 보는 눈'를 지닌 채 과거로 가게 되면 여전히 사랑을 하게 될까?

 변화란 과거 지향을 지양하는 힘이다.

 

 

 



 

바람의 겨울은 추웠고
그리고 조금은 따뜻했다

겹겹이 쌓인

어둠의 두께를 뚫는

풀잎의 노래는 언제나 화려했고

그것이 바람은 슬펐다

 

이십오년 전의 낮은 하늘에

고기비늘 같은 눈이 내리면

다가설 수 없는

그리운 길에는

전설 속에서만 사는

새가

울다 날아갔다

 

 -신 진호, <겨울이야기>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