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변덕에 대하여
메토로놈을 발명한 멜쩰(Johann Nepomuk Mälzel, 1772∼1838)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베토벤의 친구였다. 베토벤은 자신의 친구가 만든 기기를 이용해 자신의 어떤 작품에 템포를 지정하였고, 흡족해했다. 그리고 한 달여의 세월이 흘렀다. 문득 한 달 전에 만든 그 작품을 확인할 필요를 느낀 베토벤은 자신의 자필악보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지다가 악보를 찾은 그는 그 악보를 잠시 읽어 보다가(혹은 연주해 보다가)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말했다. "뭐 이렇게 곡이 빨라? 템포를 왜 이렇게 지정했지?" 이후에 베토벤은 메트로놈을 멀리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제아무리 천재라도 인간인 이상 자신이 부여한 값이 언제나 절대적일 수는 없음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인간인 이상 변덕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출판계의 경우, 저자가 개정판을 낼 경우에 초판의 내용에 첨삭 없이 그대로 내는 경우는 아마도 거의 없을 거다. 작가가 퇴고와 탈고를 마친 순간에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초판을 찍고 난 이후에 행한 재독에 의해 종종 자신의 작품의 아쉬운 구석이 눈에 가시처럼 박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개정판을 낼 때는 첨삭을 하여 할결 더 완벽을 기한다.
그런데 음악계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하는가 보다. 일단 초연까지 했음에도 차후에 '개정판'을 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모양이다. 이는 연주가나 오케스트라를 당혹케 했는데, 왜냐하면 작곡가가 자신의 곡을 무수히 고친 탓에 여러가지 판본이 존재할 경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매우 짜증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타 음악 작곡가들은 어땠을까? 별로 아는 게 없어서 내가 예를 들 수 있는 건 고작 어거스틴 바리오스 망고레와 안토니오 라우로 정도다. 망고레의 경우 <대성당>을 상기해 보라. 야마시타의 연주와 존 윌리암스의 연주가 서로 다르다. 왜 그럴까? 뭐, 존 윌리암스가 자의적으로 친 부분도 없잖아 있겠지만, 그보다는 판본(?)이 다르기 때문일 거다. 어쩌면 망고레는 악보를 출판한 이후에 생각이 바뀌어서 다른 식으로 연주를 했고, 그의 제자들이 그 연주를 카피하여 출판한 건지도 모른다. 아님 말고.
안토니오 라우로는 그 유명한 베네주엘라 왈츠 3번, <나탈리아>로 꽤나 변덕을 부린 것 같다. 왈츠임에도 어떤 마디는 아예 2박으로의 변박을 시도하였다. 확인해 보자.
헐.....대박.....
일본의 미학자 와타나베 히로시는 이렇게 말했단다. "......최종고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초고'를 버리는 사고는 작곡가의 작곡 행위가 퇴고를 통해 작품의 질을 더욱 높이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이라는 시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시각의 배후에는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작곡가가 전심전력을 기울인 정신적 행위의 결정이라는 사고가 엿보인다."
대중음악에서도 꽤 자주 이런다. 어떤 롹밴드는 라이브를 할 때 특정 곡을 음반 그대로 연주하지 않는다. 뭐, 이쪽 장르가 원래 즉홍연주를 중시하니까 그러려나 보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애드립 말고 원곡의 주요 선율들은 그 곡의 기둥이 되는 것이므로 왠만해서는 음반에서 하던 그대로 고수하는 게 관례(?)이지 않은가. 예컨대 Styx의 곡,<The best of times>은 언제 어디서 라이브를 하든 중간의 기타 솔로 선율은 거개가 음반과 똑같다. 애초에 애드립에 의존한 솔로가 아니라, 기타리스트가 작곡을 하듯이 공들여 만든 선율의 솔로이기 때문이다(주로 테크니션이 아닌, 다시 말해 애드립에의 공력이 비교적 떨어지는 연주가들이 곡 중간의 솔로를 곡을 쓰듯 꼼꼼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러니한 건 이렇게 만들어진 솔로가 대체로 명 솔로로 회자된다는 점이다. 뭐, 물론 100% 애드립임에도 누군가가 꼼꼼이 공들여 쓴 솔로보다 더 멋있는 경우도 많기는 하다. 예컨대 키스자렛의 쾰른콘서트).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 작곡하여 레코딩까지 마친 기타 솔로의 특정 부분을, 왜 이후의 라이브에서는 음반의 그것과 달리 바꿔서 연주하는 걸까? 라이브 할 때마다 모조리 다른 식으로 연주한다면 그건 그냥 애드립을 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그게 아니라 그 바뀐 선율을 모든 라이브에 똑같이 적용한다는 거다. 이럴 때 내 심정은 대체로 이렇다. '아니, 왜 음반에 나와있는 그대로의 선율로 연주하지 않는 거지? 이렇게 바꿔버리니까 후져졌잖아!' 그렇다면 '이렇게 후져졌는데 대체 그 기타리스트는 왜 바꾼 걸까? 물어보나마나다. 그 기타리스트는 음반에 녹음된 그 선율이, 레코딩 이후에 마음에 안 들어진 거다. 혹은 더 좋은 멜로디가 생각이 났거나. 물론 그의 창작이니까 선율을 고치는 건 그 엿장수 맘대로이기는 하다. 그렇긴 하지만, 라이브나 라이브 음반을 통해 그 바뀐 선율을 듣노라면 '아, 제발....음반 그대로 좀 치라고!'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뮤지션과 청자의 이러한 갭은 대체 왜 생기는 걸까? 뮤지션은 '바꿀거야, 바꿀거란 말이야...'하고 말하는데 반해 청자는 '그냥 좀 냅둬!'라고 외치는 모양새다.
청자의 이런 태도를 상기할 때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구가 떠오른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글타. 처음 대면했을 때의 인상이 가장 날카롭다. 그 '처음'이 반복되면 어느덧 그 선율에 익숙해져서 연주가나 작곡가가 선율의 일부라도 바꾸게 되면 마치 예쁘다고 생각했던 노란 단발머리 고준희가 졸지에 폭탄머리 오나미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거다(과장이 좀 심했다....).
"초고'를 버리는 사고는 작곡가의 작곡 행위가 퇴고를 통해 작품의 질을 더욱 높이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의 과정이라는 시각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최종고는 무조건 초고보다 훌륭하고 감동적일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아닌가 보다. 와타나베상은 이런 예를 든다.
"1866년에 쓰인 이 작품(브루크너 작곡의 1번 교향곡)의 '린츠고(稿)'라 불리는 초고를 20년 이상이나 지난 1891년에 고쳐 쓴 '빈고(稿)'가 오늘날 그다지 연주되지 않는 것은 후기 부르크너의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이 '린츠고'의 소박한 통일감을 손상시켜, 완성도로 보면 오히려 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소위 유명인들 이야기다. 이제부터는 무명인인 내 얘기를 해 보자.
나는 그동안 <제비꽃>의 기타 편곡을 세 차례 시도했다. 쉽게 말해 '재판'을 세 번 찍었다는 얘기다. '최종고'를 마쳤을 때 내 생각은 이랬다. '됐어! 드디어 엉성한 곳이 없어졌군.'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엉성한 곳 없이 '완벽한' 이 편곡물을 왜 그동안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던 걸까. 나는 경험상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내 이성은 '됐어! 이제 엉성한 곳이 없어!' 라고 생각하지만, 기실 감성의 깊은 어딘가는 계속 이렇게 투덜거리고 있었던 거다. '졸라 후졌어! 고친 게 더 후져! 떡칠 화장, 혹은 실패한 성형수술 같아!' 차가운 이성이 이 성토를 줄곳 외면하고 있었던 거다. '닥쳐! 조또 모르는 주제에...'하면서. 버뜨, 중요한 점은 손이란 놈은 감성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이 '최종고'는 왜 만들어졌을까? 그야 '초고'가 후지다고 판단해서다. 후진 것을 개선했으니 당연히 최종고가 더 좋아야 정상이다. 이게 이성적 판단이다. 문제는, 인간이란 인구에 회자되는 천재든, 듣보잡 범인이든 모두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점이다.
'XXX1004'님이 내가 2003년 즈음에 편곡하여 녹음을 한 <제비꽃>을 <클기휴>카페에 올려주셔서 오랜만에, 진짜 오랜만에 들었다. 그 소감은 이랬다. '음....초창기의 엉성한 순진함이 엿보이기는 하네.' 그러고 나서, 옛날 생각도 나고, 또 비도 내리겠다, 감상에 젖어 '최종고'의 악보를 꺼내 연습을 했다. 기타로 악보를 쭉~읽어나가는데....뭐야, 이 부분은 왜 고쳤지? '초고'가 훨씬 낫잖아? 이거 미친 거 아냐?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금 2003년의 '초고'연주를 들어 보았다. 멘붕이다. '예전에 내가 후지다고 판단하여 애써 수정했던 그 원래의 부분이 훨씬 더 낫잖아! 대체 이걸 왜 고친 거지?'
19ⅩⅩ년의 어느 날, 여친을 만나기 위해 S시의 모 건물로 향했다. 일찍 출발했는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약속 시간까지 한 15분 정도 남았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그저 무심히(사실은 유심히) 지나가는 처자들을 바라보면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림에 지쳐 몸이 근질근질하려는 찰나,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찰나의 순간, 내 머리에 스친 못된 생각은 이랬다.
'아.....별로다.....'
헤어진지(내가 차였다. 차여도 싸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녀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카페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카페 입구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때의 내 심정은 어땠을까? 어쩌면 황지우 시인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처럼,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이런 심리였을까? 아마도 전혀 아니었을 거다. 오히려 이런 쪽은 아니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처자들의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지루한 일 있을까/
그렇게 카페의 문이 몇 차례인가 열고 닫히며 어여쁜 처자들의 향기를 실어 날라주다가, 어느 순간 다시 열리며 무심한 표정의 얼굴을 좌우로 돌리는 모습의 한 처자를 들여보냈다.
그녀다.
나는 생각했다. '
아....이쁘다....'
이 거대한 미학적 뒷북. 인간이라는 존재는...., 아니, 나라는 존재는 항상 이 모양이다.
지난 주에는 <그녀는 예뻤다>를 보다가 '원주민'님에게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불과 2주일 전에는 '박Ⅹ진'이라는 친구에게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김혜진이 세상에서 제일 이쁘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 나온 화두가 떠오른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 뿐이다. 이를 내 식대로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광녀의 산발머리와 소복 차림을 한 듯한 여친의 자태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헤어가 깨는 겁니까, 옷차림이 깨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헤어도 아니고 옷차림도 아니며, 홀랑 깨는 건 무릇 네 마음 뿐이다.
카페 안에서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을까? "말해 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말해 봐요....." 혹은, "그렇다고 돌이킬 순 없잖아요."
아니. 악보는 돌이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초고'가 없다. 아마도 이사할 때나, 혹은 수정본을 완성했을 때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찢어 버린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하여 결국은 '샤콘느1004'님이 올려주신 2003년의 내 연주를 듣고 채보를 해야만 했다. 세상에 자기가 만든 걸 자기가 채보하는 찐따가 어딨냐.....
개발새발로 끄적이며 채보를 끝냈다. 깨끗하게 필사하려는 순간 나뭇가지가, 아니 내 마음이 한번 더 흔들렸다.
그 흔들림의 결과가 위 사진의 악보다. 2003년의 '초고'와 2014년의 '최종고'의 장점만을 추려서 섞었다. 이로써 초판 이후 네 번째 수정본이다. '됐다, 이제는 완벽하다!!'
'완벽하다!'고 외치는 것, 이것도 어쩌면 마음 흔들림의 산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설핏 스친다. 아마도 3년 뒤 즈음에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아니야....그냥 2011년의 두 번째 수정본이 제일 좋았어....'
황정민 말마따나 인생은 고통이다.
'My Guitar Mus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Cavatina (0) | 2016.04.19 |
---|---|
love waltz (0) | 2016.04.19 |
Romance no.3 (0) | 2015.10.24 |
November(with String) (0) | 2015.10.23 |
Romance no.2 (0) | 2015.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