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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

음악의 인위성에 대하여

 

 

 

나는 특정 관점에서는 편곡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고 본다.

 

1) 원곡에 변화를 주어 새로운 느낌을 창출하는 편곡.

2) 원곡의 원형(Original version)을 가급적 유지함으로써 원전을 배려하는 편곡.

3) 단순히 음색만 바꾸기 위한 편곡.

 

 1)의 예로 나는 그 유명한 비틀즈의 <Fool on the hill>의 기타 2중주 곡을 든다. 레오 브라우워의 이 편곡은 원곡과는 색다른 훌륭한 시도를 함으로써 '원곡 변화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2)의 예는 보통 클래식 음악의 편곡에 많이 적용되는 것 같다. 간혹 바흐의 작품을 재즈적으로 해석하는 편곡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전통에 대한 배려인지, 아니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편곡할 때는 원곡의 오리지널을 가급적 유지하려는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사실 이런 태도는 이해 못 할 바도 아닌 것이, 예컨대 편곡자 주관대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화성을 새로 배치하는 것(리하모니제이션)은 상상만해도 꺼림칙하다. 이미 원곡 자체가 월등한 화성적 색채감을 자랑하고 있는데, 거기에 무엇을 덧대어 봤자 사족일 뿐이 아니겠는가?

(물론 누군가 원곡 이상의, 혹은 원곡과 다른 차원의 미감을 제공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원곡의 화성적 인상은 너무나 강렬해서 우리들 대개는 원곡과 다른 그 무언가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취할 것만 같다.)

 

3)의 경우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회성 감각적 유희 이상의 편곡을 추구하는 단계에서는 지양되어야 할, 하나마나한 편곡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피아노 독주곡을 기타 독주곡으로 편곡한다고 가정해보자. 피아노의 원곡을 기타로 그대로 가져다 쓰는 건 기타의 구조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경우, 열에 아홉은 다음과 같은 생략의 과정을 거쳐 기타로 편곡하려 한다.

 

A) 원곡의 화음을 간략화한다. 심할 경우엔 화음의 루트만 취하는 경우도 있다.

 

B) 화음의 자리바꿈에 의한 색채감은 방기하고 단순히 운지가 쉬운 방향으로 정해 버린다.

 

C) 화음이 바뀌어야 할 타이밍에 운지의 원활함을 이유로 이전 마디의 화음을 지속해 버린다. 그리하여 음악의 균형을 스스로 깬다.

 

D) 때로는 텐션음이 부가 된 화음이 외려 3화음 따위의 단순한 화음보다 운지상 다루기 쉬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텐션음에 대한 감각의 결여로 인해 고집스럽게 단순한 3화음이나 기껏 7화음에서 만족해 버리고 만다.

 

E) 대선율은 잘 다룰수록 좋다. 그러나 대부분의 편곡은 수직화음에 의존해 버리고 만다.

 

위의 문제는 왜 발생할까? 나는 아래의 습관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I) 기타 운지에 대한 고정관념이 좋지 않은 편곡 습관을 낳는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기타를 배운 사람들의 고질적인 악습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코드(화음)를 대위법의 발전에 따른 결과(수평적 '음대음'의 관계가 파생한 수직적 배열이 곧 화음)로 파악하지 않고 오로지 '코드 폼(C코드폼, F코드폼 따위의)'으로 화음을 배워왔기 때문에, 편곡시 화음을 다룰 때도 도통 이런 '코드 폼'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화성의 색채감은 단조로워지고, 코드 폼으로의 고집에 의해 기타가 다룰 수 있는 화음의 폭은 대폭 줄어들어 버린다.

 

 

다음의 악보를 참고로 얘기를 해보자. 아래의 악보는 어거스틴 바리오스 망고레의 <대성당>후반부에 나오는 아르페지오다.

 

그림1)

 

이 아르페지오는 단순한 수직화음의 배열에 의해 조직된 것이 아니다. 위의 코드 진행을 화음의 영문표기법으로 기보하면 다음과 같다.

 

Bm - B/A - E/G# - G7

 

만약에, 코드(Chord=화음)를 대위법적 구조의 부산물로 인식하지 않고, 단순한 수직화음으로만 파악하는 사람들(혹은 소위 '통기타'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처럼 코드를 단순한 '코드폼'으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위의 코드 진행과 (원곡과 똑같이 1번 선을 사용하지 않는)아르페지오 패턴(p-i-a-i-p-i)으로 아르페지오를 조직하라고 해보자(코드 폼은 아래 그림 참조).

그림2)

 

코드를 '코드 폼'으로 고착화시켜 인식한 사람들의 경우, 열이면 열 모두 다음과 같이 '코드 폼'에 의거한 아르페지오를 조직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림3)

 

위의 아르페지오를 수직화음으로 다시 기보하면 다음과 같이 각 성부의 진행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림4)

 

이제 위의 수직화음을 수평적 선율(분홍색 라인)로 분석해보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세 개의 성부를 얻을 수 있다.

i) 상성 : 레 - 레# - 시 - 시
ii) 내성 : 파# - 파# - 솔# - 솔
iii) 하성 : 시 - 라 - 솔# - 솔

여기서 부드러운 순차진행을 보이는 건 오로지 하성 뿐임에 주목하라. 상성의 경우, <레 - 레#>부분은 순차진행을 보이는듯 하지만, 직후에 등장하는 <시>음에 의해 훼손될 뿐만 아니라 급격하게 장2도로 하락하는 통에 선율의 부드러운 진행이 손상된다. <파# - 파# - 솔# - 솔>의 진행을 보이는 내성의 경우도 선율 라인의 불규칙성이 유발되어 각 성부 간의 통일적인 선율 진행을 방해한다.
게다가 마지막 화음인 G7의 경우 b7음인 <파>음이 누락되었다.

이제 원곡의 악보를 다시 한번 보자.

                                                     

                                                      그림5)

 

이 아르페지오를 보기 쉽게 수직화음으로 기보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6)

 

위의 악보와 마찬가지로, 위의 수평적 선율(분홍색 라인)을 분석해보자.

 

i) 상성 : 시 - 시 - 시 - 시
ii) 내성 : 레 - 레# - 미 - 파
iii) 하성 : 시 - 라 - 솔# - 솔

 

내성과 하성의 관계에 주목하라. 내성은 순차적인 상행 반음계의 진행을 보이고, 하성은 하행을 하면서 순차적인 진행을 이루고 있다. 하성의 경우, <시>음 이후부터 진행되는 < 라 - 솔# - 솔 >은 내성과 마찬가지로 반음계적 진행을 이루고 있다. 즉, 내성과 하성이 (하성의 <시>음만 제외하면) 완전한 반진행(두 개의 선율 라인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진행)을 이루고 있다. 위에서 내성과 하성의 분홍색 라인이 점차 벌어지는 시각적 현상을 청각으로 전환하여 느껴보라. 대위법에 기반한 화성 진행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르페지오에 내포된 대위적 선율은 J.S.Bach의 음악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아래의 반진행의 대위법적 아르페지오 악보 참조).

 

그림7)

 

그림6)으로 돌아가서 상성과 내성, 혹은 상성과 하성의 관계에 주목해보자. 상성은 <시>음의 연속으로 인해 내성이나 하성과는 사진행(두 개의 선율 라인에서, 하나는 수평을 유지할 때 나머지 선율은 아래나 위로 진행하는 것) 관계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성의 <시>음의 연속은 각 수직화음을 아우르는 '공통음'의 역할을 함으로써, 화음 전환의 급격함으로 인한 비연계성(단절감)을 방지하고 있다.

화음 전환의 급격함으로 인한 화음간 비연계성(단절감)을 방지하기 위해 각 화음들을 공통음으로 매개하는 것은 화성학의 전통적인 기법 중 하나다. 스탠리 마이어즈(S.Myers)의<Cavatina>에서의 화성을 보라.

 

                                                           그림8)


각 화음들을 공통음으로 매개함(각 화음들 간 단절감을 예방함)으로써 유려함을 유지함과 동시에, 각 성부들의 독립성도 유지하고 있다. 비록 <대성당>의 예처럼 절묘한 반음계적 반진행은 등장하지 않고 베이스를 제외한 모든 성부가 병진행을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1) 소프라노 : 솔# - 파# - 파# - 미
2) 앨토 : 도# - 도# -시 - 시
3) 테너 : 라 - 라 - 솔 - 솔

4) 베이스 : 라 - 레 - 솔 - 도 

(물론 위에서 제시한 <대성당>의 후반부 아르페지오는 비록 아르페지오의 음형으로 대위법을 조직했더라도 템포의 빠르기가 상당하기 때문에 분산된 음에서 대위적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음에 반해, <카바티나>에서는 느린 템포로 인해 그런 대위적 움직임을 거의 느낄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렇게 정교하게 화성을 조직하려면 무엇보다 화음(코드)을 기타의 '코드폼'으로 인식하려는 습관부터 없애야 한다. 화음을 '코드폼'이 아닌, 각 해당 화음의 구성음(예컨대 C코드=도+미+솔)으로 인지함은 물론, 각 구성음의 음정관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예컨대 C코드에서 '도'는 1도, '미'는 3도, '솔'은 5도). 화음의 각 구성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 화성을 구조적으로 조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화음의 구성음을 외우는 것은 요컨대 요리사가 특정 요리의 재료를 기억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까?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 중에서는 괜찮은 편곡을 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게 보임에 반해, 왜 어쿠스틱 기타(전기를 이용하지 않는 모든 기타를 총칭) 쪽에서는 드문 걸까? 나는 코드(화음)를 대하는 자세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피아노(특히 재즈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화음을 구성음으로 파악하는데 익숙하지만 기타 쪽은 구성음보다 '코드폼'으로 파악하는데 익숙하다. 어쿠스틱 기타계에 능숙한 작편곡자가 비교적 드문 건 여기에 기인한다고 본다.

말이 길어졌다. 다음의 논의로 넘어가자.

 

II) '음악은 배워 익히는 게 아니라 역시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외려 감각을 초라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람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적어도 작/편곡 과정의 50% 정도는 '빛나는 영감'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 조작'으로 다루어지는 건 아닐까? 화음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언급을 했으므로 이번에는 리듬에 대해 얘기해보자.

흔히들 리듬은 지성으로 하는 게 아니라 감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얘기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토속적인 리듬을 연주할 때 악보를 펴놓고 리듬을 분석해가면서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주민들이 아니다. 이 점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타고난 그 무엇이 있을 수도, 또는 없을 수도 있다.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되지도 않는 감각으로 그들 꽁무니를 따라가려고 할 게 아니라, 먼저 이성적으로 접근해서 분석한 후, 그것을 익혀 내재화(감각화)해야 한다. 즉, 먼저 이성적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감각'에 의존한 자신의 리듬감이 사상누각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다음 시험(?)의 통과 여부에 따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1] 빠른 6/8박자의 악곡에서, 갑자기 3/4박자로 전환되는 음표들과 맞닥뜨렸을 때 주어진 템포를 정확히 유지하며 변박을 실행할 수 있는가?

 



[문제2] 3/4박자의 악곡에서 한 마디(세 박) 안에 일정한 시간적 간격으로 배열된 4개의 음(넷 잇단음표)을 템포를 그르치지 않고 연주할 수 있는가?

 



[문제3] 위 악보의 마지막 마디에 3박자의 내성을 삽입할 경우, 실행이 가능한가?

 


(위 문제들에 대한 방법론은 힌트만 제시하고 시간 관계상 생략한다. [문제1]은 '빵 두 개를 세 명이서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 방법'을, [문제2]와 [문제3]은 '빵 세 개를 네 명이서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 방법'을 강구하면 된다.)

 

[문제1]의 힌트 :

 

[문제2]와 [문제3]의 힌트 :

 

 

흔히들 '음악은 지성이 아니라 감각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감각'이란 문맥상 인식론에서 말하는 '감각'을 뛰어넘는 개념이다. 아마도 '영감'이나 '착상'같은 직관적인 것을 칭하는 것이리라. 혹자는 그러한 '감각'에 대해 '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음악 창작에 신성을 부여하고 싶겠지만, 나는 이런 태도는 오히려 음악적 보수주의나 권위주의만 유발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감각'이란 다름 아닌 '경험의 총체'에 불과한 것이다. 평생 인상주의 음악을 듣지도 못한 사람이 라벨이나 드뷔시의 화성을 감각적으로 쓰기란 어렵다. 천재라도 마찬가지다. 그럼 위 위인들은 어떻게 만들었냐고? 그들의 작품 역시 경험의 총체에서 비롯된 것임엔 틀림없다. 그들에겐 이미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적 지식과 경험이 환경과 교육에 의해 내재되어 있었고, 그들이 한 일은 '기존 전통의 작법들은 고리타분하니까 이걸 좀 비틀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애초에 '비틀만한' 음악적 재료들을 경험적으로 축적해 놓은 상태였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혹자들은 이런 맥락을 싸그리 무시한 채 오로지 선험적 영감(?)만이 음악의 원천이라고 고집한다. 그런 태도에서 엿보이는 건 창의성에 대한 우러름 보다는 (경험적 지식에의)축적에 대한 게으름 뿐이다. 그런 이들이 이렇게 얘기한다. "공부한다고 해서 작곡이나 편곡을 베토벤처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물론이다. 근데 그게 어디 예술 뿐이랴. 물리학과 천문학 공부한다고 누구나 다 스티븐 호킹처럼 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왜 '쓸데없이' 그런 공부를 하는가? '현대문학이론'을 공부한다고 해서 모두 다 이언 매큐언처럼 소설을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현대시작법'을 통독한다고 해서 김소월처럼 시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걸 안 보고도 잘 쓰면? 그건 천부적 재능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꼭 스티븐 호킹이나 이언 매큐언, 혹은 베토벤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소설가 이문열 말마따나 우리가 우주를 빚을 수는 없어도 한 송이 꽃은 빚을 수 있지 않을까?

덧붙여 말하자면, 소위 재능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해당 분야에 대해 거저 먹으려 든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현대문학이론'까지는 들여다보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해당분야의 문학작품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그냥 보고 즐기기만 한 게 아니라, 대사와 지문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인칭 시점일 경우 장단점은 뭔지, 전통적 구조를 해체할 경우 어떤 반대급부가 있는지 적어도 꼼꼼하게 들여다 본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음악-그것도 클래식 기타 분야에서는 그저 '많이 듣고 즐기기만 하면' 악상이 완성된다고 믿는 소위 '무임승차자'들이 왜 이리 많은 걸까? 분야는 다르지만 어떤 경제학자 그러지 않았나? "공짜 점심은 없다"고.

 

 

III) 마지막으로, '작업의 열의'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자.

어시던트를 두지 않는다는 만화가 미우라 켄타로는,  우리가 보는 5초 분량을 그리기 위해 몇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을까?(위 그림의 섬세함을 보라!) <크리스마스의 악몽>에서 5초간 등장하는 특정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했다는 팀 버튼의 강박적 노력은 또 어떤가?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의 필사본에는 몇 번이고 수정을 한 흔적이 있다고 하며, 쇼팽은 8마디를 쓰는데 2주가 걸린 적도 있단다. 물론 편곡보다 어려운 작곡에 관한 사례이지만, 이들이 편곡을 한다손 치더라도 그들의 완벽과 독창성에 대한 강박증을 고려했을 때 비교적 장 시간을 소요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물론 시간 소요의 정도로 성의를 언급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바흐와 비발디의 작품은 1,000곡이 넘으며, 30분 만에 작곡을 해치운(?) 비틀즈의 곡들도 있다. 쇼팽이나 베토벤 같은 창작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우선 작품들의 상대적 이질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컨대 음형적 음악은 성악적 음악보다 선율을 조직하는 점에 있어서 훨씬 더 다양성이 보장되며, 오페라틱 롹 밴드 '퀸'의 음악보다는 펑크 밴드인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음악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훨씬 적을 것이다. 물론 섹스 피스톨즈가 쇼팽이나 베토벤 같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성학이나 대위법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섹스 피스톨즈의 노래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시간의 절대적 소요량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에 부여하는 창작자의 음악적 깊이나 예민함, flow(현재에 완전히 몰입하는 몰아(沒我)적 경험)에 관한 것이다. 5초 분량을 일주일 동안 만들기 위해서는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섬세함과 병적인 조탁(彫琢)에의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일드,<리갈하이>의 한 장면                                                                               

                                                    

작곡이든 편곡이든, 영감이 내린대로 속전속결로 끝내야한다는 믿음은 악성(樂聖)의 신화에서 기인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일체의 어떤 악기의 도움도 필요없이 오로지 상상만으로 악보를 그려나갔다는 모짜르트에 대한 신화나 오선지에 기보된 음악은 실상 기보되기 직전에 이미 음악가의 머리속에서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었을 거라는 신화는 이런 악성신화의 일부다. 음악학자 니콜라스 쿡(Nicholas Cook)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신화적 가공을 옆으로 치워놓으면, 이제 베토벤이 음악을 착상한 방식이 얼마나 기보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래 그림과 같은 스케치가 증거로 보여 주는, 쓰고 또 쓰고 지우고 다시 초고를 쓰는 험난한 과정은 베토벤이 슐뢰서의 말대로 결코 그에게서 지워지지 않는 예정된 '기본적인 아이디어'로 차곡차곡 진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반대로 음악이 펜과 종이라는 모루로 해머질을 하는 것처럼 벼려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실체 없이 정신으로만 행해지는 과정이 아니다. (중략)....
(물론) 베토벤의 경우로부터 다른 작곡가들도 그렇게 했으리라고 일반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작곡가들이 음악으로 충만할 때까지 그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종이 위에 모두 쏟아낸다는 식의 설명은 믿기 어렵다(당시의 설명에 따르면 모짜르트와 슈베르트가 여기에 가장 가까운 예였지만, 그들조차 종이 위에다 스케치하고 수정하고 재수정하는 식으로 작업했다). (중략)...
우리는 종종 진정한 음악가는 건반이 아니라 책상에서 곡을 쓴다는 견해를 듣는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작업한 작곡들이 있다. 프랑스의 모리스 라벨이 어느 날 본 윌리엄스의 서재를 방문해 이 영국 작곡가가 책상에서 작업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라벨은 그 모습에 질려 "자네는 피아노도 없이 어떻게 새로운 화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또한 쇼팽이나 말러 같은 작곡가들이, 제 때에 악기를 배달하지 못해 작곡에 제대로 착수할 수 없게 만든 무능한 피아노 상인을 질타하는 분노의 편지들이 남아 있다. 이는 다른 작곡가들 역시 라벨과 비슷한 입장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건반으로 작업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는 생각은, 음악은 순수하고 형태가 없는 것으로 영혼의 영역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19세기 신화의 또 다른 예에 불과하다. 작곡가들은 음악이 날씨처럼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Music : A very short introduction>중에서

 

 

날씨처럼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을 음미해보자. 음악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므로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한다면 이 말의 진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얘기는 다음과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음악은 감성적 느낌으로 접하는 것이지, 이성적 생각으로 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성적 생각이 감성적 느낌을 도울 때가 있다. '알고 보니 더 좋게 느껴지더라'는 식의 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조적 속성은 느낌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의 성질이라기보다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의 것이다. 한없이 자연스러운 진행의 선율이라고 느껴졌던 음악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리고 그 구조를 성립시킨 사전 조작을 알고 나면, 음악이 영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 조작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중략)....
좋은 음악의 가치에 감복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힘으로 그 음악이 만들어진 것 같은 신성스러움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구조 분석 공부를 하다 보면 그 신성스러움도 인간이 조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음악의 값어치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추어에게는 비하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프로에게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강숙 저, <음악의 이해>중에서.

 

이 말은, 음악 창작에 영감의 영역은 배제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영감만이 음악 창작의 원천이라는, 이른바 '공짜 점심'을 바라는 태도를 경계하라는 의미다. 영감 만능주의(?)는 연구와 분석, 그리고 그에 따르는 시간의 지연을 의심한다.

영화<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끝마치며 :

신이 내린 선율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축적된 경험으로 음들을 조직하는 능력에 수정과 수정을 가하는 집요한 노력으로 최상의 것을 선택하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보봐리 부인>을 쓴 프랑스의 19세기 작가 플로베르의 천재성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책상에 오랜 시간 동안 붙어 앉아 집필을 할 수 있었던 능력이라고 한다(그는 12시간 넘게 커피로 버티며 집필을 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천재는 다만 인내에 대한 대단한 소질일 것이다.
(중략)

보들레르는 규칙적인 훈련의 역할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낭만주의 예술>이란 저서에서 들라크루와와 에드거 앨런 포우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천재는 숙련된 곡예사처럼 관중 앞에서 춤을 추기 전에 남몰래 수없이 뼈를 부러뜨리는 위험을 겪어야 한다. 한 마디로 영감은 일상적인 훈련의 보상일 뿐이다."
(중략)
창조자 자신들은 천재성을 유일하게 드러내 주는 노력의 가치를 강조한다. 자극제가 무엇이든간에, 집요함은 작품을 계속하는 가운데 드러나 이해되는 천재의 으뜸 가는 자질인 듯하다.
(중략)
세잔 또한 훌륭한 예가 되는데, 그는 '그림 솜씨를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집요함을 통해 자신을 이룩하는데 성공한다. 고갱은 그에 대해, '그는 천재성이 있기 때문에 그리는 것이 아니고,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천재성이 있다'고 말한다.
(중략)
무한한 인내심을 부여받은 프레더릭 쇼팽 역시 지속적인 작업의 고통에 자신을 속박하고, 피아노를 위한 악곡에서 명료함을 추구하면서 한 페이지를 완성하는데 6주가 걸렸다. 그러나 음악의 영역에서 베토벤의 열정과 에너지, 집요함은 가장 주목할 만하다. 계속해서 머무른 저택들이 주는 밤의 고요 속에서 그는 새벽 3시까지 정열적으로 작품을 썼으며, 짧은 수면에 만족하고 새벽부터 다시 일에 착수해 오후가 시작될 때까지 계속했다. 

                                               -P.브르노 <천재와 광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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