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인데다가 달리 할 일도 없어 오랫동안 계획했지만 미루고 미루던 일(?)을 드디어 시행했다.
낮술 때리고 뻗어버리기.
그런데 소주는 폐인 이미지인지라, 다소 우아해보이는 와인을 선택하기로 했다.
안다, 이런 게 편견이라는 것을.
홈플러스에서 닭강정과 칠레산 고양이 와인(Gato negro를 나는 이렇게 칭한다)을 샀다. 지난번에 세 명의 지인과 함께 마셨던 그 와인이다. 한 병을 세 명이서 나누어 먹었는데도 취기가 꽤 올라왔음을 기억한다.
그 술을 한 시간동안 혼자 다 마셨다.
뭐야, 멀쩡하잖아...
커피나 마실까하여 자주 가는 까페를 찾아 커피를 주문하고 <빨강머리 앤>을 읽는데 오 분쯤 지났을까, 빨강머리 앤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어느덧 나는 그리피스 왕자가 되어 백마를 타고 청공의 바다 같은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잠에서 깨었다.
그런데 뭐지, 이 비현실감은.
이런, 이런...고양이 와인을 너무 우습게 봤군...
20대 이후 이런 취기는 처음이다. 아니, 최악의 취기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20대 때의 만취와는 그 색채감이 다르다.
헤로인에 익숙한 인간이 새로운 LSD에 취한 느낌이 이런 걸까?
대낮에 비틀거리며 걷기는 또 얼마만인가.
향기가 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폐인의 향기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뻗음으로써 오랜 숙원을 풀었다.
이런 걸 혼절이라고 하나?
그렇게 다섯 시간이 흘렀다.
눈을 뜨니 밤 여덟 시.
우와~
이 현실감,
이 개운함은 대체 뭘까?
숙취 후유증이 전혀 없다!
역시 신의 물방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