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 맘대로 리뷰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저자
볼테르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2-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볼테르의 철학적 사유가 녹아 있는 풍자 소설볼테르의 정치, 사회...
가격비교

 

 

  

 낙관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불신은 아주 오래 전에 <동물의 세계>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약육강식의 현장을 본 이후로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다. 강을 건너는 초식동물들이 악어에게 산채로 잡아먹히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자연의 비정함 앞에서 ‘이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는 생각은 자리 잡을 곳이 없다. 그것은 피식자(被食者)의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육식동물의 경우 자신의 생존은 초식동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기보존의 본능은 타 생명체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설계되었다는 말인가? 우리가 윤리의 총체라고 믿는 신(神)은 어찌하여 자연에 윤리성을 부여하지 않았단 말인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능히 이기적 유전자를 거슬러 소위 문명이라는 것을 창달하게 하기 위하여?

  삼겹살과 족발을 즐기는 약육강식의 주체가 자연법칙의 무자비함에 고개를 젓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기는 하지만, 약육강식의 자연법에 대치되는 동정심 또한 인간이 지닌 특성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란 자연법칙과 윤리의 중간지점에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다(물론 피터 싱어 같은 실천윤리학자는 그러한 딜레마를 극복하는 채식주의에의 강력한 논변을 펼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자연법칙이 반드시 동물의 세계나 야만의 소산인 것만이 아니라, 문명 세계의 인간들 상호 간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고대 노예제는 물론 근대의 유산계급에 의한 착취나 제 3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착취는 약육강식의 다른 얼굴 아니겠는가.

('제 3세계'라는 비개별적인 낱말조차 얼마나 배타적인 서구 중심주의의 산물인가.)

 

 인생이 아름답다고 누군가 말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름다움의 진위 여부 따위가 아니라 '그렇게 말한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것이리라. 깊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말하는 자라면 그 말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극단적인 위난(危難)이 없는, 배부르고 등 따뜻한 입장에서 외치는 맹목적인 낙관의 헛된 구호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전쟁과 거기에 뒤따르는 온갖 홀로코스트 같은 잔혹행위의 결과를 접하게 되면 서구의 뿌리 깊은 유신론에 회의감을 느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물론 전쟁의 행위 주체가 신이 아닌 인간 그 자신이라는 점에서 신의 면피를 주장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대기근이나 해일, 그리고 지진 같은 ‘자연적 악(惡)’에 대해서도 면책이 가능할까?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의 책임을 부실공사를 한 공사 관계자에게 묻는 것처럼, 지구의 부실에 대해서 신에게 책임을 묻는 건 부당한 일일까? 인간의 터전을 놓아주었다는 은혜를 생각했을 때 그 부실에 대해 책임을 묻는 건 지독한 배은망덕이 될까?

 

 

 

 

 

 <깡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볼테르는 세상의 비참을 한껏 경험한 주인공 깡디드의 말을 빌어, ‘이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적 낙관주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벌거숭이 오레용 족들이 이렇게 외쳤다. 
 “예수회 놈이야, 예수회 놈이라고! 원수를 갚게 되었어.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예수회 놈을 잡아먹자. 예수회 놈을 잡아먹자!”

 그러자 카캄보가 슬프게 말했다.
 “주인님,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제가 여자들이 해코지할 거라고 했죠?”

 그러자 캉디드는 가마솥과 꼬치를 보며 말했다.

 “우리를 굽거나 삶을 게 분명해. 아! 인간의 순수한 본성이 어떤 것인지 아시면 팡글로스 선생님은 뭐라고 하실까? 모든 게 최선이라고? 좋아. 하지만 퀴네공드 양을 잃고, 꼬 오레용족에게 잡혀 꼬치에 꿰여 죽다니, 이렇게 잔인할 수가!”

 카캄보는 어떤 경우에도 당황하거나 이성을 잃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니까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제가 이 사람들 말을 조금 할 줄 아니까 한 번 얘기를 해보겠어요.”

 그러자 캉디드는 낙심 중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꼭 해 주게. 인간을 잡아먹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이며, 또 얼마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가를 필히 강조해주게.”

 “여보시오. 여러분은 오늘 예수회 놈 하나를 잡아먹을 작정이죠? 그건 정말 잘하는 짓이에요. 적을 그렇게 처치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지당하지요. 실제로 자연법은 우리에게 우리 이웃을 죽이라고 가르치고, 또 이 세상 어디나 그 법대로 시행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안 먹는 것은 단지 그것 말고도 먹을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우리만큼 자원이 풍부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적을 죽여서 먹는 것이 승리의 열매를 까마귀에게 주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렇지만......(후략)”

 

 

 

 

 관심 있게 본 책들 중에 한스 아스케나시(Hans Askenasy)의 <식인문화의 수수께끼(원제:Cannibalism : From sacrifice to survival>라는 저서가 있다. 식인문화를 풍습이나 재난 등 여러 가지 각도에서 조망한 책이다. 책의 내용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기근(飢饉)에 의한 식인행위에 관한 장이었는데, 그것은 모종의 부정적인 각성을 유도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초월적인 선의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다. 이 책에서 소개된 역사적 대기근을, 다소 장황하지만 열거해보자.

 

기원전 436년 : 로마의 기근.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 수천 명이 티베르 강에 뛰어 들었다.

기원후 42 년 : 이집트의 대기근

650년 : 인도 전역에 걸친 기근

879년 : 세계 전 지역에 걸친 기근

941년, 1022년, 1033년 : 인도에서의 대기근, 여러 지방의 전체 인구가 확연히 줄었으며, 살아남기 위해 식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005년 : 영국의 기근

1016년 : 유럽 전역에 걸친 기근. 식인 행위가 널리 퍼졌다.

1064년~1070년 : 이집트의 7년에 걸친 기근.

1148~1159년 : 인도의 11년에 걸친 기근.

1162년 : 세계 전 지역에 걸친 기근.

1200년 : 가뭄 중 이집트 전역에서 식인행위가 일어났다.

1315~1317년 : 유럽의 기근.

1344~1345년 : 인도의 대기근.

1396~1407년 : 인도의 더가 데비 기근.

1505년 : 헝가리의 기근과 식인행위.

1586년 : 영국의 기근. 이로 인하여 빈민구제법이 제정되었다.

1631년 : 인도의 기근.

1661년 : 인도의 기근.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1669~1670년 : 인도의 기근. 대략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1769~1770년 : 뱅골의 대기근. 인구의 1/3인 1천만 명 사망.

1783년 : 인도의 찰리사 기근.

1790~1792년 : 인도의 도지 바라, 즉 해골 기근. 묻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가 죽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 구전에 의하면 이것이 가장 심한 경우 중 하나이다.

1816~1817년 : 아일랜드의 기근. 73만 7천 명 사망.

1838년 : 인도 북서부 지방의 극심한 기근. 80만 명 사망.

1846~1847년 : 감자의 흉작으로 인한 아일랜드의 기근. 1백만 명 사망.

1861년 : 인도 북서부의 기근.

1866년 : 뱅골의 기근. 1백만 명 사망.

1869년 : 인도의 극심한 기근. 150만 명 사망.

1874년 : 인도의 기근.

1876~1878년 : 봄베이와 마드라스의 기근. 5백만 명 사망.

1877~1878년 : 중국 북부의 기근. 950만 명 사망.

1887~1889년 : 중국의 기근.

1891~1892년 : 러시아의 기근.

1897년 : 인도의 기근.

1899~1901년 : 인도의 기근. 1백 만 명 사망.

1905년 : 러시아의 기근.

1914~1918년 : 제 1차 세계대전 중의 기근.

1916년 : 중국의 기근.

1921~1922년 : 러시아의 기근. 3백만 명 사망.

1932~1933년 : 러시아의 기근. 3백만 명 사망.

1943년 : 인도의 기근. 150만 명 사망.

1960~1961년 : 콩고의 기근.

1964년 : 인도의 기근.

1970~1974년 : 서부 아프리카의 기근. 25만 명 사망.

1979~1980년 : 동 아프리카의 기근.

1982~1983년 : 아프리카 전역에 걸친 기근.

1985년 : 아프리카의 기근. 금세기 최악의 가뭄으로 인함.

1993년 : 소말리아의 기근.

 

 이 책에 소개된 기근은 역사상 일어났던 ‘모든’ 기근 상황을 총괄한 게 아니라, 주요한 것만을 간추린 것이리라. 기록되지 않은 사례나 문명 이전 시대를 고려했을 때, 이는 조족지혈에 불과할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본서가 이러한 대기근을 일일이 열거한 건 바로 이러한 시기에 식인행위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함이다. 즉, 세계의 비참은 어쩌다 발생하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시공적으로 일상적이었다는 얘기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볼테르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그런 끔찍한 재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이닥친단 말인가!"
 

 다음은 유의적(有意的), 혹은 목적론적 세계관에 대한 볼테르의 조소.

 

  "그럼 이 세상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을까요?"

  "우리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죠."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카캄보는 “자연법은 우리에게 우리 이웃을 죽이라고 가르치고, 또 이 세상 어디나 그 법대로 시행됩니다.”라고 말한다. 냉철한 인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들만의 사회계약이라는 알량한(?) 종차별주의의의 산물을 걷어내어 버리면, 자연법칙의 입장에서 식인행위는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물론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옳거나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말한 건 예수회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식인종들에게 유화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말의 진의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아마도 그 함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 ‘적어도 약육강식의 신의 설계의 결과라면, 우리 인간이 그 설계도가 지시한 것을 따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황금률의 사회계약이 파기되는 대기근 같은 상황이 오면- 식욕이 동정심을 능가하여 최소한의 윤리적 능력마저 박탈되어 버리는 상황이 오면 언제든지 자연 상태에서 살육과 식인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이런 상황이 닥치도록 방기한 신에게 어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살육이나 식인 이전에 아사(餓死)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뭐, 대충 이런 의문을 카캄보를 통해 볼테르는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요컨대 ‘증거적 악의 문제(the evidential problem of evil)인 것이다(여기서 ‘악’은 살인이나 강간 같은 인간의 행위에 의한 악 이외에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재해, 즉 ‘자연적 악’도 포함하고 있다). 전능한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의 무수한 고통과 괴로움은 어째서 존재하는가? ‘고통과 괴로움이 있어야 행복과 즐거움을 알 수 있다’고 대답을 하려는가? 아니면 자유의지 논리―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악이 발생했으나, 그로 인해 얻는 선이 더 크다는 논리―를 얘기하려는가?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반론도 가능하다. ‘어째서 세상의 행복과 즐거움을 알기 위하여 필요 이상의 어마어마한 고통이 존재하는가?’ 예컨대 사랑이나 행복을 깨닫기 위해 내 어린 자식이 지진이나 해일에 목숨을 잃거나, 아프리카에서 비타민A의 결핍으로 인해 5초 당 한 명 꼴로 어린이들이  시력을 잃어야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하나, 이미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악으로 세상의 불행은 그 대극으로서의 행복을 깨닫기에 이미 충분할 분량일 터인데 왜 자연재해가 추가로 더해져야 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대기근으로 인한 사망자들의 수를 보라…….

 대충 이런 정도가 철학자들이 선한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는 이유이리라.
 (자세한 건 스티븐 로(Stephen Law)의 <왜 똑똑한 사람들이 헛소리를 믿게 될까?>를 참조하기 바란다.)

 

 

 

 

 

 자연재해 같은 ‘자연적 악’에 대한 또 하나의 방어논리는 ‘인간의 악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는 견해다. 11세기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사람들이 보인 반응 역시 이와 같다. 흑사병이 창궐하기 대략 1세기 전에 이탈리아에서 각종 역병과 기근으로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을 때 많은 이들은 그것을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여겨 속죄를 위한 순례행각을 벌였는데 그럴 때마다 쇠조각을 붙인 가죽으로 만든 매로 스스로를 체벌하며 거리를 활보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플래질런트(flagellant : 채찍질 고행자)라는 사회 현상으로까지 발전하고, 흑사병이 창궐한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1260년경 하늘에서 한 통의 편지가 왔는데 플래질런트만이 구제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 편지가 1343년 다시 성지에 당도하였다. 천사가 예루살렘의 성 페테로 성당에 갖다놓았다."

 

2011년의 일본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쓰나미와 지진에 대해 조 모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광신(狂信)이 비이성의 또 다른 이름임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일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와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가기 때문에 (이번 일은)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아의 홍수에 관한 성경 내용을 패러디한, 소설<10½장으로 쓴 세계역사>의 첫 장에서 저자인 줄리언 반스는 의인화한 나무좀벌레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하느님이 자신의 창조물에 진노하셨다는 것은 우리(동물들)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휘말리게 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었습니다(뱀에 관한 이야기를 정말로 믿지는 않으시겠지요? 그것은 아담의 흑색선전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결과는 우리에게 똑같이 혹독했습니다. 

(중략)

……노아와 그의 참모진은, 어떤 종들은 연중 어떤 기간에는 동면한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았고, 어떤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보다 걸음이 느리다는 더욱 분명한 사실도 참작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특히 느긋한 느림보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장담하건대, 더없이 우아한 동물이었지요간신히 나무에서 아래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하느님의 복수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 다음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이런 것을 뭐라고 부릅니까 ―자연도태라고 합니까? 나는 그것을 직업적 무능력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것은 자연재해 같은 ‘자연적 악’에 대해 ‘부정한 것에 대한 심판’이라는 방어논리를 펴는 것에 대한 재반론이다. 인간의 타락이 홍수로 인한 절멸의 이유라면, 애꿎은 동물들은 왜 그런 고통과 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절멸의 필연성이 요청될 정도로 노아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인간이 타락했는가? 게다가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타락이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악이라면, 향정신성약물 따위로 타락한 인간이나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법에 의거해 사형에 처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타당한가? 결국 노아의 홍수는 비유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윤리적 정당성을 잃고 만다.

 캉디드의 단언에 대한 '마르틴'의 빈정거림을 보라.

 

 캉디드가 마르틴에게 말했다.

 "보세요. 범죄는 징벌을 받지 않습니까? 네덜란드 선장 놈은 저렇게 죽어도 싸요. 인과응보니까."

 그러자 마르틴이 되물었다.

 "그건 그래요. 하지만 배에 타고 있던 무고한 승객들은 어쩌지요? 그 사기꾼을 벌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익사시킨 건 악마의 짓이겠죠."

 

 

 

 

 

 결국 '악의 문제(problem of evil)'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어 낙관주의를 포기한 캉디드는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말한다.

 

 이슬람교 수도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악이 있습니다.”

캉디드가 말했다.

“악이 있건 선이 있건 그게 뭐 대수인가? 황제 폐하께서 배를 보낼 때 배 안에 사는 쥐의 안위를 신경 쓰시던가?”

 

 '황제 폐하'를 기독교적 유일신으로 보든 스피노자의 자연신으로 보든, 세계의 엄청난 재난과 죽음을 보노라면 신은 개체의 불행이나 죽음보다는 종(種)의 존속에만 치중하는, 비유컨대 전체주의의 양상을 보이는 것 같다. 그것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개체가 '일자(一者)'의 빛으로 파생되었다가 종국엔 그것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설(說)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다음은 낙관주의에 대한 볼테르의 조소.

 

 “그런데 낙관주의가 뭐예요?”

 카캄보의 질문에 캉디드가 대답했다.

“아! 그건 나쁜데도 불구하고 좋다고 마구잡이로 우기는 거야.”

 

 이렇게 라이프니츠는 크로스카운터를 얻어맞고야 만다.

 

 줄리언 반스가 ‘직업적 무능력’을 언급한 것이나 볼테르가 ‘황제폐하’를 언급한 것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무신론이 아니라 다만 비정하게 방기하는 무능한 신에 대한 성토로만 보인다. 또는, 적어도 볼테르의 경우 단순히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볼테르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헛된 공리공론은 집어치우고 일이나 합시다. 그것이 삶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악한 신'이나 수수방관의 유일신을 인정할 수 없었던 볼테르의 경우, 무신론을 허용하지 않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는 단지 무신론을 에둘러서 표현한 것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세계의 비참에서 무신론을 유추하는 건 논리적 오류겠지만, 전통적인 유신론의 논리-신은 전능하고, 비(非)존재이면서 전능하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를 고려하면, 악의 문제로 신의 전지전능이 훼손되는 순간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맞부딫히게 된다.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든지, 아니면 무신론을 주장하든지).

 
 헛된 추측은
다 집어치우고 일이나 하자.

 

 

 

 

 

 

 신앙과 진실 사이의 간극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법이다.

                                                -손턴 와일러,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중에서

 

......................................................................VS.......................................................................

 

 

 "하지만 신앙이란 사랑과 같아서 이성(理性)에 매인 건 아니란다. 이성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그리고 그러한 때가 되면 믿음과 위안이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원하게 될 거야."

                                                    -헤르만 헤세, <청춘은 아름다워>중에서

 

 

 

 

 

 

'내 맘대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소유  (2) 2013.08.19
책을 읽는 방법  (0) 2013.07.19
첫사랑  (0) 2013.04.11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0) 2013.04.10
배빗  (0) 2013.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