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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무소유

 


무소유 (양장)

저자
법정 지음
출판사
범우사 | 2001-02-02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인생의 참 진리를 전하는 법정 스님의 대표작! 지나치게 소유에...
가격비교

 

 

 

 17년 전이었을까. 강의가 끝난 후 캠퍼스 잔디 위에서 홀로 먼 산을 바라보며 사념에 잠겨 있는 한 후배를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있다. 눈이 채 녹지 않은 3월의 먼 산을 바라보는 그의 탈속한 듯한 모습과 옆에 놓여져 있던 한권의 책이 기억 난다. 그 책의 제목은<무소유>였다.

 그의 소개로 접하게 된 책. 법정스님께서 <법구경>보다 쌩택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더 좋아하셨다는 대목이 생각난다.

 

  법정스님은 <무소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 소개되어 있는 칼 맑스의 아름다운 전언.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커진다.'

  

 쟝 자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불평등의 기원을 '소유'에서 찾는다. 아주 먼 옛날-냉장고는 물론 제염법에 대한 지식도 없어 음식의 부패를 막을 방도가 없어 음식물의 소유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원시시대-를 상상해보자. 동물 한 마리를 사냥하면 어차피 한 명이 취할 수 있는 분량은 한정되어 있고, 먹다 남은 것은 부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분배의 개념은 자연스럽게 다가왔을 거다. 그러나 무언가를 오랫동안 저장하고 보유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순간 소유 개념이 증폭되고 그 시점부터 인간은 이기적 합리성의 결과로 불평등해지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루소에 의하면 "부가 다른 불평등들이 귀착되는 근원적인 불평등"이라는 것. 그래서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것인지도.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불필요한 것을 더이상 가지려 하지 않을 때 예상되는 결과는? 바로 자본주의의 종말이다. 검약적인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정신? 웃기는 얘기라고 어떤 학자가 말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과 소비를 자양분으로 그 덩치를 키운다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부귀가 제3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착취와 무관할까?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無-도덕적 팽창주의는 어떨까?  맑스-엥겔스의<공산당 선언>에서의,  '예언' 아닌 '예측'의 글을 보자.

 

 부르주아지는 무엇을 통해 이 공황들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는 대량의 생산력들을 부득이 절멸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들을 획득하고 옛 시장을 더욱 착취함으로써.

 

 2000년이 넘어서 개인적으로 좀 의아했던 건 바로 서점가를 중심으로 한 맑스의 부활(?)이었다. 물론 맑스의 부활이 곧 공산주의의 부활은 아니다. 현실 공산주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까. 맑스의 재발견은 아마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금융자유화-주주자본주의에 따른 기업의 투자 감소, 노동자에 대한 임금 인하와 비정규직화, 생산공장 해외 이전에 따른 해고 사태, 불공정 무역....
 기업윤리가 어쨌든 간에 자본 자체의 속성엔 윤리가 없다.

 

자본주의의 팽창적 속성에 대해 윌리엄 탭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금융자본의 힘이 이제는 국가보다 더 세지 않은가?" 정치학자들은 수백년 동안, 주권 국가가 존중되고 국가가 그들의 영토 내를 통제하던 베스트팔렌(Westphalian)체제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 체제가 이제 세계화에 의해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새로운 사건이다." 그러나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이 명확히 주장하듯이, "자본주의의 단위는 그 시작부터가 국민국가가 아니라 세계경제였다." 그에 따르면 자본의 야심은 "결코 국민적 영토 내에 제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The Amoral Elephant(W.K.Tabb저)'에서

 

 자본가들의 탐욕에 대한 이런 얘기가 있다.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느 날 그곳에 도착한 미국인들은 인디언들이 사소한 일 때문에 애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디언들은 보잘 것 없는 도구로 나무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미국인들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불쌍한 사람들 같으니! 우리가 이들을 구해 주어야겠다.'

 그들은 미국에서 큰 도끼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나무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는 강력한 도끼였습니다. 그 이듬해, 그들은 원주민들이 자기들이 준 도끼를 어떻게 쓰고 있는지 보기 위해 호기심에 차서 다시 마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느긋해 보이는 마을 사람들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그들을 에워쌌습니다. 그 때 추장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고마움을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이 도끼를 보내 준 다음부터 우리는 더 많은 휴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다른 관점입니다. 인디언들은 더 빨리 일을 끝내고 자유로운 시간을 가진 것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지만, 백인들은 그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해 더 많이 일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더 많이! 그 원주민들 머릿속에는 이 개념이 아직 주입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장 피에르 카르티에,라셀 카르티에 저)'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세계화의 간판을 내건 '부도덕한 코끼리'또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케인즈 주의가 저물기 시작한 70년대 이후로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 보라.

 

 세계 상류층의 20%가 세계 GDP의 86%를 얻고 있고, 하위 20%는 고작 1%를 얻으며, 중간의 60%는 겨우 13%만을 얻는다. 전 세계 200대 부자들의 수입은 1984년부터 1998년까지 수조 달러나 늘어 두 배가 되었다. 세계 3대 부자의 자산은 가난한 48개국의 모든 소득을 합한 것보다도 더 많아졌다.

                                                 -'The Amoral Elephant(W.K.Tabb저)'에서

 

 1982년에 12명이었던 억만장자가 2000년에 298명으로 증가했고 2008년에 1125명으로 증가했는데, 그들의 순자산액 합계는 4조4천억 달러에 이른다.

 미국의 경우 빈부격차는 1980년 이래로 겪은 적이 없을만큼 충격적인 수준이다. 미국인 가운데 상층 0.1%의 총소득은 하층 50%의 총소득액과 거의 맞먹는다.상층의 평균 소득액은 하층의 440배에 상당한다. 중국의 경우 최고 부유층 10%가 모든 사유재산의 40%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며,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최고 부유층 2%가 전 가계 자산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Slowmoney(Woody Tasch 저)'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살면서 윤리적 백색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거다. 이기적 합리성에 기반한 일부 투기성  매도-매수 행위에는 늘 얻는 자와 잃는 자가 공존하는 것이 시사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하의 개인의 삶은 타인의 손해를 기반으로 한다.

 

 아무 생각없이 대형마트를 애용하는 덕에 지역 경제가 죽는다. 아무 생각 없이 마시는 커피엔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가 연관되어 있다. 쌀이나 과일을 수확하기 위해 뿌리는 농약은 벌레 뿐만 아니라 그 벌레를 먹고 사는 새들도 죽인다. 12세 이하 동남아 어린이들에 대한 노동의 착취로 만들어진 공인구로 우리는 월드컵을 즐긴다. 식탁에 대량 가공되는 미국산 고기를 자주 올릴수록 다른 세계의 누군가는 굶주리게 된다(제러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참조).

 

 '소유'를 멈출 때 자본주의는 절멸한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야기한 모든 부조리도 절멸할 테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태곳적의 자연인(문명인의 표현으로는 '원시인')으로 회귀하는 건 루소의 말마따나 가능한 일도 아닐 뿐더러 소유의 절멸이 현실 문명 세계에서 오롯이 유토피아를 보장해주지도 않을 것 같다. 덧붙여,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항시 부정적 요소로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를 지양하고자 하는 태도에는 아마도 배금주의가 야기하는 소외에 대한 성찰과 생태주의적 관점이 있을 테고, 무엇보다 (소비 만연의 생활이 지속가능하지 않은 탓에) 현 세대의 선취가 야기하는 후세대의 빈곤에 대한 염려가 있을 터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자본의 절멸에 대한 원망(願望)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각성일 것이다.

 

 부언하건대 소유를 멈춘다는 건 절대적 무소유라기 보다는 불필요한 것을 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봐야할 터이다. 상품의 기호가치에 의존하여 개성을 획득하는 허위의 가치관과 수동적 정념에 의해 부추겨지는 삶을 지양한다는 의미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상위 1%만이 선택하는 차', '상위 1%를 위한 집.' 요컨대 기호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재화의 소유정도가 만드는 '차이'에 민감해지지 않는 삶을 지향하라는 의미이리라. 

 돈은 중요하다. 돈으로는 빵을 얻을 수 있기에 누구나 돈 없는 삶은 생각하지 못한다. 돼지는 싫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싫다. 표류한 무인도에서 누군가가 '순수이성비판'과 '빠리 바게트' 빵 중 택일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거다. 무엇보다 돈은 그것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대개의 불행(예컨대 고 비용의 병원비)을 예방한다.
 
다만 현대사회에서 '무소유'가 함의하고 있는 것은, 수동적 정념을 부추기는 기호가치의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돈벌이, 그리고 교환 수단을 넘어 목적 그 자체로 변질되는 것에 대한 지양적 태도일 게다. 인간의 자부심이 통장 잔고의 정도에 비례하게 되는, 자아의 왜곡을 경계하라는 것일 테다. 말 장난 같지만, 치부(致富)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세상의 치부(恥部)로 치부(置簿)하게 되는 태도에 대한 경계랄까.

 

 'Winner takes it all.' 이런 말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타인에 대한 대우의 정도를 재화 획득의 정도로 가늠하는 것을 자본주의의 논리로 정당화하는 태반의 사람들에게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란 얼마나 무의미한 개념이 되고 마는가.

 (이렇게 말하면 가난한 자의 노예도덕이 되려나.....ㅎㅎ....)

 

..요컨대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利害)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쟝 쟈크 루소 저)'에서

 

 세상이 지저분해지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당위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의 결여 탓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운 좋게(?) 보호무역으로 부유해진 국가가 제 3세계 국가들에게 강요하는 규제완화나 철회는 당연한 일이 된다.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난 이들이 여성에 대한 월권을 부여받는 건 당연한 일이 된다. 운 좋게(?) 백인으로 태어난 KKK단원들의,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에 대한 경멸과 린치는 정당화 된다. 운 좋게(?)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가 전염병 걸린 돼지들을 생매장하여 살처분하는 건 지당한 일이 된다. 

 

 그러나 내 존재는 언제나 Major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약 재한 동남아 노동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어느 한국인이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지배를 받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자신을 향한 억압과 멸시에 대해 뭐라 항변할 수 있겠는가. 돈의 유무에 따른 차별적 행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배금주의자들은 이래서 위험하다. 이들은 황금이 손에 쥐여있지 않을 때는 자신을 파괴하고 손에 쥐여질 때는 남을 파괴한다.

 

 투기와 투자, 착취와 효율을 혼동하는 천민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오늘날에도 <무소유>가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속하게 되는 까닭이리라.

 

 

 

 

 

 좀 다른 얘기를 해보자. "착취 당하고 싶어도 더는 착취당할 기회조차 상실한 사람들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시대-'고용없는 성장'의 시대, '노동빈민'의 시대"에서 어쩌면 위정자들은 무소유를 주장하며 현재의 삶의 질 저하를 감내하라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이렇단다.

 

 통계청의 자료에 의하면....한국의 비정규직은 841만 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의 52.3%를 차지하고, 정규직은 767만 명으로 전체의 47.7%를 차지한다.

 ...성별로 보면, 남성은 56.8%(529만 명)가 정규직이고 43.2%(402만 명)가 비정규직이다. 여성은 35.1%(238만 명)가 정규직인 반면, 64.9%(439만 명)가 비정규직이다.

 ....남성은 비정규직이 20대 초반 이하의 저연령층과 50대 후반 이상의 고령층에서 더 많지만, 여성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또한 임금 수준을 보면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월급은 50%에도 미치지 못하고(48.9%), 여성의 임금은 남성임금에 비해 60% 정도(62.3%)에 불과하다. 남성 정규직을 100이라 하면, 여성 정규직은 67.4, 남성 비정규직은 50.8, 여성 비정규직은 39.1 정도다. 남녀차별과 비정규직 차별이 중첩되면서 명백한 피라미드 질서를 이루고 있다.>

                        -'리얼진보' 中 '모두 일하되 조금씩 일하는 사회로(강수돌)'에서 발췌-

 

 이건 <무소유>와는 좀 차원이 다른 얘기다. 비정규직 노동자 월평균 임금(2007년도 기준 117만원)을 받고 사는 이들에게 "소유욕을 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117만원이라면 자기 소유의 주택은 커녕 옥탑방이나 반지하방이 아닌 제대로 된 전세집도 구하기 힘들다. 결혼인들, 출산인들 가능하겠는가.

 오늘 날, 한국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2007년 기준 연 2300시간 정도로 OECD평균인 약 1800시간에 비해 500시간 더 길다. 일하는 시간과 임금의 이 괴리. 이 명확한 착취 상황에서도 기득권층은  티브이의 공익광고를 통해 "한국처럼 일하라"며 현상황을 미화한다.

 과연 누구를 위해서 더 많은 노동시간을 견뎌야 하는가?

 결국 중요한 건 '무소유'와 '착취'의 중심에서 균형을 잡고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사족:

 

<무소유>는 현재 법정 스님의 유언대로 절판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중고 매매 사이트에서 이 책이 고가(15만원)에 거래되는, 수요-공급 법칙에 충실한 지극히 경제적인 차원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무소유>의 역설이랄까.

 

 

 난 20대 초반에도 '맥도날드'따위를 애용하지는 않았다. 정치적인 이유는 없었고, 단지 별로 식욕이 당기지 않아서랄까. 그러던 어느 날에 한 친구를 따라 최초로 맥도날드 매장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고 난 후 그와 했던 얘기들이 새삼 기억 난다.

 

 나 : "겨우 일인분 먹었는데 왠 쓰레기가 이렇게 많이 나오냐...."

 친구 : "아마 지구는 쓰레기 때문에 망할 거야."

 

 쓰레기 때문에, 또는 방사능의 확산이나 원자재의 고갈 때문에 자본주의가 망하는 게 먼저일까, 아니면 인간의 탐욕에 대한 자각이 자정작용을 일으켜 '사회경제-대안경제'로의 전환이나 '생태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이르게 되는 날이 먼저일까?

 

 

 

 

 

 

 

※ 이 글은 몇 년 전에 쓰여졌고, 이전에 사용했던 블로그에서 옮겨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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