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드 <일본인도 모르는 일본어>중에서
아래의 장면은 일본 드라마 <일본인도 모르는 일본어(日本人の知らない日本語)>에서 한 중국인이 일본어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는 장면이다. 그토록 다채로운 색감을 가지고 있는 일본 사람들이 왜 파란색과 초록색은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 우리나라와 똑같다. 과거의 한일 강제 병합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중국에서는 안 그렇다'는 중국인 학생들의 말에 일본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초록색과 파란색을 혼용하는 일본인의 습관에 대해 일본인 선생이 답변하기를,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어떤 평론이 생각난다. 그 중 일부를 옮겨 보자.
…그러나 '나오코'는 그 직후 실종되어 버리고, 그 후 '나'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나오코'가 교토의 산 속에 있는 아미료라는 요양소에 들어가 있음을 그녀의 편지를 통해 알게 된다. 이 무렵, '나'는 진한 색깔의 '미도리(綠)'를 만난다. 미도리는 같은 대학의 1학년생이며, 마치 봄을 맞아 세계로 갓 뛰쳐나온 작은 동물처럼 싱그러운 생동감을 발산시키고 있었다. 이리하여 두 여성―교토 산 속의 나오코와 도쿄의 미도리―사이를 오가는, '나'의 격렬하고 슬픈 연애가 진행된다.
나오코가 들어가 있는 교토의 요양소는 '외계(外界)와 차단된 조용한 세계'이다. 거기서 살고 있는 나오코는 조용한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고, 고무공 같은 미도리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요양하고 있는 나오코와 발랄한 이미지의 미도리. 이 두 사람은 각각 '정(靜)'과 '동(動)', 혹은 '사(死)'와 '생(生)'등의 무라카미 류의 두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1987년작) 작품론>중에서
이와는 모순되게도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의 '숲'이 상징하는 '초록'에 대해서는 "깊은 숲을 연상시키는 녹색은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평론가의 해석이나 작가의 실제 의도가 어떻든, 일반적인 상식으로 녹색이 의미하는 건 '생명력'임에는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성장의 정점에 선 수풀이 아니라 새싹의 이미지, 바로 그것.
그러고 보니 '신록(新綠)'이라는 낱말도 있다. 재미있는 건 '녹(綠)'자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푸를 녹'이라고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전에서조차 푸른색과 초록색을 혼동하고 있는 거다. 위의 드라마로 추정하자면, 한중일 3국이 모두 초록색과 파란색을 혼용하고 있는데 그나마 중국은 조금 덜한 모양이다. 초록색 신호등을 보고 '파란불'이라고 하는 건 한일 공통인데, 어떤 역사적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궁금하여 '두산백과'로 검색했더니,
한국에서는 예부터 초록 ·남 ·곤 등의 총칭으로서 청(靑:파랑)으로 흔히 써왔다. 이것은 중국에서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 5색을 정색(正色)으로 삼았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며, 초록빛 나뭇잎을 푸른 잎[靑葉], 나라의 제향 때 조관들이 입던 남빛 웃옷을 청삼(靑衫)이라고 했다. 또한 청매(靑梅) ·청과(靑果) ·청상(靑孀) 등에는 미숙 또는 신선하다는 뜻이 있고, 심리적으로 냉정 ·신비로움 등을 느끼게 하는 데서 문학작품에도 ‘파란 꿈’ ‘파란 잎새’ 등의 표현이 있고, 미지의 행복을 나타내는 ‘청운의 꿈’도 일반화된 말이다..
한국에서는 예부터 초록 ·남 ·곤 등의 총칭으로서 청(靑:파랑)으로 흔히 써왔다. 이것은 중국에서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 5색을 정색(正色)으로 삼았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며, 초록빛 나뭇잎을 푸른 잎[靑葉], 나라의 제향 때 조관들이 입던 남빛 웃옷을 청삼(靑衫)이라고 했다. 또한 청매(靑梅) ·청과(靑果) ·청상(靑孀) 등에는 미숙 또는 신선하다는 뜻이 있고, 심리적으로 냉정 ·신비로움 등을 느끼게 하는 데서 문학작품에도 ‘파란 꿈’ ‘파란 잎새’ 등의 표현이 있고, 미지의 행복을 나타내는 ‘청운의 꿈’도 일반화된 말이다.
아래는 위키백과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대한민국과 중국, 일본 등 동양 국가들은 초록색과 파란색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푸르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왔다. 대한민국에서의 청색, 즉 ‘푸른 색’은 청(파란색), 녹(초록색), 남(푸른빛을 띈 자주색), 벽(짙은 푸른색) 등 넓은 의미의 색상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녹색 빛이 감도는 과일을 청과라고 하며, 초록 숲이 우거진 산을 청산이라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전통적으로 두 가지 색의 개념을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았던 문화적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들어서 초록색과 파란색이 일부 구분되어 사용되어 왔으나, 신호등에서는 관념에 따라 이를 구분하지 않고 여전히 푸르다, 파란색을 초록색까지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푸른색과 초록색의 혼용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잘 모르겠다. 원근(遠近)에 따른 숲이나 산의 색깔 변화 ―가까이 있는 숲이나 산은 실제의 색인 초록색으로 보이지만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은 푸르게 보인다― 에 기인하는 걸까. 하지만 이런 건 동북아 외의 외국도 마찬가지 아닌가. 호주의 명산 'Blue mountain'이나 'Into the blue forest'라는 음악(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색소폰 주자인 클라렌스 클레몬스Clarence Clemons의 솔로 음반 수록곡)의 제목을 보면 그들도 원근법에 의한 색조의 변화를 의식하고 있음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우리나라나 일본 만큼 파란색과 초록색을 혼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초록색 신호등을 보고 '파란불'이라고 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 위의 드라마에 나오는 중국인 여성의 의문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에서는 신호등의 초록색 불을 보고 '파란불'이라고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한국과 일본만 이럴까? 위키백과를 보자.
한국에 교통신호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40년으로 오늘날과 같은 둥근 점등이 아니라 기차역 플랫폼 입구에서 기차의 홈인(Home-in)을 유도하던 날개식 신호기였다. 기둥에서 3색 날개가 번갈아 튀어나오는 형식으로 서울의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앞, 을지로 입구, 조선은행 앞에 설치되어 교통경관이 손으로 조작하였으며, 그 속에 전등이 없어 밤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오늘날과 같은 주등식(柱燈式, 신호철주에 매달린 신호등)은 광복 이후 미군이 상륙하면서 3색 전기신호기가 나타나 도심에 하나 둘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신호등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 일제 강점기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한일 강제 병합이라는 역사적 이유가 있는 것일까?
사족 :
태양의 색깔에 관한 것도 재미있다. 일드<일본인도 모르는 일본어>를 보자.
그럼 우리나라는? <아침 이슬>의 노래 가사를 보면 역시나 빨간색이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후략)
<붉은 태양>으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확실하다. 우리에게도 역시 태양은 붉다. 팥죽을 먹는 관습의 유래를 봐도 명백하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어 음(陰)의 기운이 강한 동짓날에 붉은 팥죽을 먹는 건 양(陽)의 기운으로 음기를 물리치기 위함이다. 양(陽) 중에 가장 큰 건 태양(太陽)이고, 팥죽의 붉은색은 태양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어쨌거나 위 드라마의 장면으로 보아 동양의 3국(한,중,일)이 모두 그런 건 아닌가 보다.
강제 병합이라는 역사적 이유 이외의 근원적인 이유가 있는 걸까? 역시나 일본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