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제목 : 강신주의 확신에 찬 직설, 불편한가요?
http://media.daum.net/entertain/star/newsview?newsId=20140204150708107
"확신하건대…XXX는 기교를 중요시할 터이다."
'확신'과 '~터이다(추측)'가 공존하는 이상한 문장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 최윤이 자신의 에세이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일상대화에 널리 퍼진 수사법 중에 '~한 것 같다'는 표현이 있다. 한 사고를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일종의 이 완곡한 표현이 유행하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늘 흑 아니면 백의 단정적인 표현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어법이 묘미 있는 것으로 드러날 수는 있으나 너무 분명하고 누구나 다 아는 일차적 진실을 얘기하면서 '것 같다'라고 덧붙이는 데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확실히 ~한 것 같다'라고까지 말해 어떻게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이 어울릴 수 있는지 자문하게 한다. 이런 표현 속에는 외교적 완곡성보다는 말하는 사람이 그 자신의 생각에 대해 가지는 자신없는 불투명성이 노출되며, 더 나아가 스스로 발생한 내용에 대한 책임까지를 모호하게 회피해보고자 하는 복합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마치 정확한 의사표명이 누라도 끼칠 것처럼, 표현된 것을 얼버무려 지워버리는 표백제 어법들이 덧붙여진다. …이 습관은 주체가 얼마나 축소되어 있고 그런 만큼 그 문화가 얼마나 정신적인 혼란을 겪고 있는지를 표현해주는 예들이다.
-최윤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중에서
예리한 지적이다. 나는 이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 역시 '~한 것 같다'나, '~할 테다'같은 문장을 쓸 때는(꽤 자주 쓴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답에의 비난을 회피하려는 미묘한 심리가 반영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반성할 일이다).
심지어는 그 미묘한 심리에 대한 가책(?)에 대한 반동심리로 말미에 '아님 말고'를 툭 내던질 때도 있다. 예컨대,
나에 대한 그의 험담은 쓸데없는 자격지심에 불과하다고 본다. 뭐, 아님 말고.
이건 그러니까, 아예 대 놓고 '내 말이 틀리면 할 수 없고'라는 투의 무책임 발언이다. 가책의 무게를 덜고 싶을 때는 이처럼 '배째라'식의 어투로 뻔뻔함의 가면을 쓰는 거다(이래서 '글은 곧 필자의 정신'이라는 거다).
그런데 그게 전적으로 문장 작성자를 향한 비판에 대한 면피에의 의지가 반영된 탓만은 아니다(지금 이 문장을 쓰면서 '반영된 탓 만은 아닌 것 같다'라고 쓸 뻔했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자기 확신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아니, 한몫을 한다.)
언젠가 모 음악 사이트에서 "롤랑 디앙(Roland Dyens)의 곡 <탱고 앤 스카이(Tango en ski)>에서 나오는 '라-시b-도#-미-솔-시b-도#-미'의 진행은 화음인가요,아니면 스케일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해, 이것이 스케일이냐 화음이냐의 문제로 거친 공박이 오가던 적이 있다. 나는 이렇게 댓글을 달아 주었다.
"제 생각에는 화음이지만, 스케일이라고 생각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대답은 꽤나 진솔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예나 지금이나 100% 화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답은 "A7(b9)코드의 아르페지오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한 이유는 '확신에 찬 직설'을 한 분들이 인터넷의 커뮤니티에서 돌을 맞는 것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오답을 주장하는 분들의 심기까지 배려하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상당히 귀찮기 때문에 나중에는 미운털이 박히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대놓고 말하기는 했다. 물론 그 결과 내 편이 줄어드는 건 충분히 납득하고 있다.
확신에 찬 직설을 거북하게 받아들이는 것…확신에 찬 직설에서 화자의 독단을 읽어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수용하는 쪽의 비관용적 태도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이 '표백제 어법'들은 때론 '외교적 완곡성'을 위해 요구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선생님께서 애써 소개해 주신 학술회의에 꼭 참가하고 싶었지만, 밥벌이를 위한 일들이 발목을 잡아 불참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대신, "밥벌이 하느라고 불참합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아마도 돌아오는 말은 '이런 싸가지 …'가 될 거다.
완곡한 외교적 수사의 또 다른 목적은 진심의 은폐인 경우가 있다. '불참할 것 같습니다'하고 말하는 이유는 실제 불참의 이유인 소위 '귀차니즘'이나 내막을 상세히 밝히는데 대한 심리적 거부감을 외피적 상세함이나 정중한 말투로 은폐시키려는 의도인 경우가 있다는 거다.
니콜라 엥겔 과장이 문틈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방해돼?"
"아니, 들어와." 그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과장이 문을 닫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책상 앞에 서서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건 때문에 많이 힘든 거야?"
그는 뭐라고 대답하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지쳐서 적당히 둘러댈 예의 바른 대답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
"주변 상황이 힘들어서 그래." 그가 대답했다. "벤케, 하세(의 일), 그리고 피아랑 나에 대한 비방까지."
"(그 비방의 내용은)사실이 아니잖아. 그렇지?"
"말하면 입만 아파."
(…)
그는 술병을 들어 그녀의 잔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따르고 자기 잔은 넘칠 만큼 가득 채웠다. 그녀는 눈썹을 치켜 세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술잔을 들어 맞은편 잔에 부딪힌 후 단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진짜 이유가 뭐야?"
그녀는 날카로운 관찰력의 소유자였고, 그를 잘 알았다.
-넬레 노이하우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중에서
오래전에 어느 지인 A가 내게 어떤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어느 학생에게 그 기술을 가르쳐야 할 일이 생겼는데,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더라는 거다. 간곡한 부탁을 받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요즘 급히 맡은 일이 있어서 자리를 뜨기 힘든 상황이라서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실제로 다급한 업무가 있었다. 따라서 나의 답변은 당시의 그런 상황과 판단이 내린, 나름 정당한 것일 수도 있다(그리고 정당한 것이라면, 이 때의 표백제 어법은 거절에 대한 미안함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나름 정당하다'라고 말하지 않고 '정당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쓴 이유는? 바로 100% 진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는 식의 표백제 어법은 은폐된 속내를 드러낸다. 물론 불확정 어투가 모두 은폐된 속내를 내포한 것은 아니겠지만, 당시에는 확실히 은폐된 것이 있었다. 그 은폐된 내용을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면 아마 다음과 같았을 거다.
"아, 그거요? 그거 기초적인 것만 설명하는 데에도 하루가 꼬박 걸려요. 인생은 짧고 시간은 귀한데 어떻게 그 문제를 설명하느라 하루를 소비하겠어요? 솔직히 귀찮기도 하고요…. 문제는 하루를 투자해서 그것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고 해서 그것을 그날 당장 수행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을 남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정도로 숙달시키려면 최소한 3~4개월 정도의 수련이 필요해요. 그런데 그런 걸 어떻게 한두 시간만에 배워서 그 다음날 바로 학생에게 가르쳐 줍니까? 그런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장자인 그에게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해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물론 위의 적나라한 내용의 말을 좀 더 완곡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상대방의 심기까지 배려하려는 과민한 노력은 때론 얼마나 피곤하고도 혈압을 올리는 일인가? 게다가 눈앞에 당장 해치워야 할 일이 산적한 상황에서는…따라서 나로서는 '적당히 둘러댈 예의 바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때론 위의 입장이 뒤바뀔 때도 있다. 즉 내가 타인으로부터 '적당히 둘러댈 예의 바른 대답', 즉 표백제 어법을 받아들여야하는 입장이다. "이번 등산 모임에는 제가 좀 몸이 피곤해서 못 참가할 것 같습니다", 혹은 "오늘 회식은 못 갈 것 같아요. 어제 과식을 했더니 속이 좀 아파서요." 등등. 물론 이 모든 답변이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순간에는 어떤 미묘한 상황적 뉘앙스를 통해 그것이 표백제 어법에 불과하다는 것을 간파하는 경우가 있다(이 때의 표백제 어법은 거절에 대한 미안함과 본심을 은폐한 것에 대한 자책이 섞여서 반영된 것일 테다). 그 때는 나 역시 니콜라 엥겔 과장이 그랬던 것처럼 "진짜 이유가 뭐야?"라고 캐묻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외교적 완곡성의 표현에 숨어 있는 말 없는 권유('더 이상 자세히 알려고 들지는 마십시오'라는 권유)를 잘 파악하고 있는 지금은 진의를 더 이상 캐물으려고 들지는 않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니 대개 알려고 드는 일이란 역시 피곤할 뿐더러 혈압을 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모르는 게 약이고, 그 약은 일종의 혈압약이다.
이처럼 상대방의 의중을 알 수 없거나, 또는 알려고 들지도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때는 스피노자의 경구를 다시 한번 음미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다.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Never mind>의 초대박으로 그 전작인 <Bleach(표백제)>는 커트의 맹아가 보이는 정도로만 평가되기 십상이지만, 데뷔 시절부터 그는 이미 완성된 싱어송라이터였다.
개인적으로 Nirvana의 음반들 중 4인조 시절에 제작된 이 데뷔 음반이 제일 맘에 든다. 이 음반의 수록곡들을 들으면 막힌 혈관이 뻥 뚫리는 느낌이랄까.
첫 곡 Blew에서의 '캐허접' 기타솔로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던가.
(비아냥 아님).
<Love Buzz>를 연주하는 Nirvana. 첫 시작부터 베이스 기타는 절뚝거리고, 이어지는 커트의 기타 배킹은 음이 안 맞는다. 연주 도중 조율을 해서 넘어가지만, 중반 이후 기타를 패대기치는 통에 기타의 튜닝은 다시 한번 엉망이 되고 만다. 연주 도중에 튜닝을 해보지만 여의치 않아서 결국은 '될대로 되라'는 식의 엉망진창 연주가 되고 만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그다지 위화감은 들지 않는데, 아마도 '캐허접'기타 솔로 같은 노이즈 미학(?)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커트에게는 소위 '실수'나 '미스톤'에 대한 개념이 없다. 다시 말하면, 실수 없는 완벽한 연주에 대한 강박증 따위는 없다. 엉성한 연주로 인한 무수한 노이즈 조차 자신의 음악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커트에게는 '~것 같다'는 식의 표백제적(?) 두루뭉실함은 없다. 틀리면 틀리는대로, 엉망이면 엉망인대로, 개판이면 개판인대로…. 과연 펑크(Punk)의 정신은 '잘난 것들, 혹은 제대로 된 것들에게 주눅들지 말고 항상 당당하라'는 것. 커트는 음악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것 같다? 뭐냐, 그 자신감 없는 어정쩡함은. 당장 집어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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