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언급해야할 말 :
이 잡글에서는 음악에 관한 얘기가 앞 부분에 조금은 나오지만, 음악 얘기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예전에 모 음악 사이트에서 누군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A : "대중음악은 클래식음악과는 달리 '코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수준이 낮다."
이 주장의 시비를 가리기 전에 먼저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에 대해 추측해보자.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코드(Chord)'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기 때문이다.
B :
1. '코드'라는 것은 (위의 도표처럼) 하나 이상의 소리(화음)를 동시에 내기 위해 건반악기나 기타의 특정 부위를 누르는 여러가지 방식, 또는 그렇게 누른(운지를 잡은) 손가락 형태를 뜻한다.
2. 또는 그 손가락 형태들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을 뜻한다. 예컨대 Cm7이나 Bbm6 따위.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시당초 '코드(Chord)'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위의 견해A는 오류다. '코드'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일단 B의 견해가 옳다는 가정하에서 얘기를 진행해보자. 이 경우, 견해 A는 타당한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않다.
B의 2처럼, 화음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을 '화음의 영문표기법(이하 '영문표기법'으로 표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화음의 영문표기법'은 수준이 낮은가? '수준이 낮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좀 더 세밀하게 따져봐야할 문제이지만, 지면(실제로는 화면) 관계상 자의적인 판단 하에 논의하도록 하겠다.
'영문표기법'은 완전한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화음이 자리바꿈된 양상이나, 화음들 간에 수평적으로 전개되는 대위법적 양상을 거의 드러내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완전히'라고 말하지 않고 '거의'라고 말한 이유는, 영문표기법은 최소한 최저음의 진행 양상만은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C-G/B-Am-Am/G-D/F#'의 표기에서 최소한 베이스의 진행 상황은 알 수 있다. 그것은 '도-시-라-솔-파#'이 된다).
반면에 클래식음악에서 사용되는 로마 숫자에 의한 전통적인 표기법(아래 그림에서 붉은 색 칸 안의 것)은 완전하지는 않아도, 화음의 자리바꿈 형태를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대위법적 진행을 유추할 수는 있다. 즉 화성의 진행 양상이 영문표기법에서보다 더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점에 비추어 전통적인 표기법의 압승일까? 화음의 구조를 비교적 자세히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이 방식은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영문표기법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일례로, 밴드의 트럼펫 주자가 작곡자이자 건반주자인 누군가에게 "이 악절 첫 마디의 화음이 뭐지?"하고 물었을 때, 건반주자는 "아, 거기는 '전조된 C단조에서 four minor의 5,6화음'이야."라고 대답하는 대신, "Fm6화음이야."라고 하는 게 훨씬 간편할 뿐더러 무엇보다 아주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 오선을 펼쳐 음정 계산을 해야할 일이 전혀 없어서 좋다.
만약 전통적인 표기법이 '수준이 높다'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화음의 구조를 밝히는 학구적(?)인 일이 실용적인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실상은, 전통적인 표기법조차 화음들 간의 대위법적 양상을 온전히 드러내주지는 못한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선에 표기된 음 하나 하나를 들여다 볼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실용성을 가치의 우위에 두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영문표기법이 우월한 것이 되므로 사실 수준의 높고 낮음을 가늠하는 건 별반 의미가 없다.
다시 원래의 얘기로 돌아가보자. "대중음악은 클래식음악과는 달리 '코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수준이 낮다."는 얘기는 과연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화음의 구조를 드러낼 수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가'하는 차원의 얘기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아니었다. 그에게 다음과 같은 옳은 답글을 남겼다.
"'코드(Chord)'라는 것은 음악에서의 경우, '화음'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즉 '화음'을 영어로는 '코드'라고 하는 것이다."
'코드=화음'이 되므로, 견해 A는 다음과 같이 고쳐 쓸 수도 있다.
A` : "대중음악은 클래식음악과는 달리 '화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수준이 낮다."
이 견해대로라면 클래식음악에서는 '화음'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건 비유하자면 헤비메틀 음악에서 전기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얘기나 현악 4중주에서 현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얘기와 같다.
늘상 하는 말이지만, 모르는 게 죄는 아니다(만약 모르는 게 죄라면, 나 역시 모르는 만큼 징역살이를 해야 한다). 다만 진실을 충분히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나 토론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토론을 일종의 대결의 장으로 파악하고, 거기서 타자의 정당한 반론으로 인해 자신의 견해가 옳지 않은 것으로 판명이 날 경우 일종의 패배로 받아들이는 기묘한 대결의식을 지닌 상태에서 자신의 고집을 절대로 굽히지 않을 뿐더러 타자의 타당한 반론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어쩌면 토론의 차원이 아닌 정신병리학의 차원에서 다루어야할 사항인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견해 A를 제시한 이는 타자의 그 어떤 정당한 지적에도 끝끝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는 유신시대 국민학생(지금의 초등학생)이 포스터를 그릴 때 '때려잡자 공산당'이나 '자나깨나 불조심'같은 구호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처럼 '대중음악은 코드를 사용해서 수준이 낮다'는 주장을 그 어떤 반박에도 개의치 않고 반복할 뿐이다. 이쯤 되면 내가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입력된 내용 이외의 것은 말하지 못하는 로봇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토론을 중단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문제는 입력된 내용을 삭제하고 새로운 정보를 입력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유일한 입력의 주체인 그 자신이 올바른 정보를 입력하는 것보다는 그릇된 정보를 유지한 채 자신의 오류를 고집하려는 아집을 굽히지 않을 뿐더러, 또 그것을 일종의 '승리'라고 자위하려는 데 있다. 위의 문제는 물론, 이전의 무수한 논쟁에서의 행태를 보고 판단했을 때 개선의 여지는 솔직히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가장 인간적인 인간(The most human human)>에서 저자인 브라이언 크리스찬(Brian Christian)은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 시스템은 사용 기간이 사용 기간이 길어질수록, 상태가 이상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사람들은 재부팅이 안 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애들에게 이런 그림을 그리게 하는 세상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제 다른 얘기를 해보자. 한번은 열혈남아인 B 군과 어떤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가 그를 열혈남아라고 얘기한 것은 그의 '열폭' 상태를 종종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B 군이 세수의 누진적용 문제에 관해 그의 선배와 다툰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견해의 시비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다만 인상적인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B 군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선배를 지칭하는 과격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런 식의 대응은 나 역시 경험한 바가 없지 아니한데, 차이가 있다면 나의 경우 뒷담화의 대상이 아닌 직접적인 담화의 대상인 탓이었는지 '개XX' 소리를 듣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전에 그와 '개의 도축에 관한 합법화의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그의 견해는 예전에 작가이자 국회의원인 김홍신 씨의 주장과 같다. 김홍신 씨는 개고기 합법화 법안 발의시에, 잔인한 개 도살을 막기 위해서라도 '식용견'을 축산물가공처리법(이하 '축가공법')에 추가하여 정규 육류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B 군의 주장도 하등 다를 바 없었다.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은 다음과 같았다. "실천윤리학자인 피터싱어(Peter Singer)가 말하기를, 자신은 윤리적인 이유에서 동물을 도축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만약 그 동물들의 생전에 처우가 인도적이고 또한 도축시에 고통을 극소화할 수만 있다면 육식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이에 동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자. 우리나라 같은 생명윤리의식이 박약한(그래서 돼지 같은 비교적 고등한 존재인 포유류를 생매장하는) 나라에서 개고기를 합법화 하면 소위 식용견들의 처우가 개선될까? 몽둥이로 두들겨서 죽이는 도축 방식이 자연스럽게 안락사로 전환될까? 그렇다면 왜 현재 합법화 되어있는 닭들은 마리 당 A4용지 크기만 허용되는 공간에서 사육되어야 하고, 역시나 합법화 되어있는 돼지들은 왜 아이언메이든이라고 불리우는 철장에 갇혀 고개조차 뒤로 돌리지 못하는 상태로 감금되다가 소위 안락사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도축되는 걸까? 이들이 이럴진대, 과연 개라고 처우 개선을 기대할 수 있을까?"
※ 참고 : 이 얘기에 대해 월간지 <숨>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잔인한 개 도살을 위해 개고기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논리는 동물복지 개념의 명백한 오용으로서, 이러한 엉터리 논리가 대중과 정치인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은 부끄러운 것이다. 산업축산은 동물복지가 고려된 이상적 축산방식이 아니라, 이윤의 극대화를 지상과제로 하여 농장동물들에게 극한의 고통을 강요하는 동물학대적 생산 방식이다. 경악스러운 대규모 산업축산의 가혹한 환경을 점진적이나마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 최근의 농장동물 복지운동의 방향이다. 그러므로 개를 농장동물화 하여 산업축산에 포함시킴으로써 사육과 도살의 잔인성을 개선하겠다고 하는 것은, 측산의 현실과 동물 복지에 무지하기에 가능한 궤변이다. 왜냐하면 산업축산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개들은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학대상황에 처하게 되어, 기존의 학대적 행태가 더욱 심한 양상으로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조적 학대는 개별적 학대를 정당화하여, 일반 가정에서도 개에 대한 음성적인 학대가 늘어날 것이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
자, 어쨌거나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위 논의의 시비(是非)에 관한 것이 아니다. 얘기의 요점은 '대화를 중단해야할 시점'에 관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그날의 논쟁을 조금 더 언급해야 한다.
양극단에 있는 언쟁이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그렇듯이, 그날의 논쟁 역시 고성방가와 말 끊기나 끼어들기 따위의 점입가경 양상을 띄기 시작한다. 과열되어 폭발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기본적인 위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었으리라.
B : 개는 안된다고? 그럼 소나 돼지는 왜 먹는데요?
I (나) : 네 말이 맞아. 윤리적 이성의 논리를 따른다면 소나 돼지 역시 잔인하게 도축해서 먹으면 안 되는 것이지.
B : 그럼 선배도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근데 왜 먹는 건데요?
I : 나 역시 일관적이지 않으므로 잘못된 거지. 그래서 안 먹으려고 꽤나 노력하는 중이다(실제로 몇 년 동안 마트에서 고기를 산 적이 없기는 하다. 다만 회식 자리나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경우에는 내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아직까지는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언행불일치를 실천(?)중이다).
B 군 주장의 요지는 아마 이럴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현재 육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윤리적 일관성의 차원에서 개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개 식용을 반대할 자격이 없다면 마찬가지로 개고기의 합법화를 반대할 수 없다. 합법화된 축산 방식에 의해 도축되는 소나 돼지를 먹는 주제에 어떻게 개에 관한 축산의 합법화를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예컨대 마리화나를 아주 가끔씩만으로나마 피우는 인간이라면 양귀비 재배 반대에 동조해서는 안된다.
B 군의 말이 옳다. 윤리적 일관성의 관점에서 보면 같은 포유류임에도 개에만 예외적 조항을 두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개는 인간에게 친근한 존재라는 점은 그다지 훌륭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충분히 많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가끔씩만 육식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개 식용 문제에 반대할 자격이 없다'는 얘기는 그다지 틀린 얘기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윤리적 일관성이라는 잣대는 B 군의 발언에도 적용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그는 개고기 합법화를 주장하면서, 체계적인 관리하에서 동물학대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어떤 이가 개를 돼지와 똑같이 고개조차 돌릴 수 없는 비좁은 곳에 사육한다고 가정해보자. 동물학대를 이유로 그에게 정부 차원의 개선 조치를 내린다면 그는 뭐라고 대응할까? "돼지는 그렇게 사육해도 된다는데 개는 왜 안되는가? 일관성이 없잖은가?"라고 답변하지 않을까? 결국 개고기를 합법화한다는 것은 사육이라는 명분의 학대 대상을 하나 더 늘리는 것에 불과하다.
윤리적 일관성을 논하는 시점에서 간혹 발생하는 기묘한 논리적 오도에 대해서는 지적할 점이 있다. 위의 논리('어쩔 수 없이 가끔씩만 육식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개 식용 문제에 반대할 자격은 없다')가 타당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생명윤리적 차원에서 육식은 인도적이지 않다는 결론에 반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런데 간혹 논쟁의 중심에서 승패의 여부에 관심이 많은 이들의 경우, 이 둘을 혼동한다. 술꾼 아버지가 아들의 폭음을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음 자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실상 윤리학의 관점에서 개고기 논쟁은 결국 모든 종류의 육식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육식은 식물과 초식동물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는 견해는, 윤리란 자연 상태를 극복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견해로 재반박된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본능―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id의 욕망을 100% 용인하는 순간 윤리와 문명은 몰락한다. 그렇다고 완전히 억압할 수도 없다. 예컨대 10% 정도는 문명의 허용권 내에서 용인한다. 육식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이 10%란, 아마도 포유류를 제외한 어패류에 한정한 것이리라.
먹는 문제는 직접적인 생존에 결부되어 있는 문제이므로 경우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윤리적으로 생각해보자.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는 만약 도살장의 벽면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어서 누구든 그것을 볼 수 있다면 모두 채식주의자가 될 것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채식이라는 생존의 다른 방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존재에게 극심한 고통과 생명의 절멸을 야기하는 행위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쉽게 용납되기에는 인간의 윤리 의식이 너무나 공고하다.
언젠가 머리에 대못이 박힌 길고양이들이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다. 누군가 대못총으로 쏘아 맞춘 것이다. 이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아마 대부분의 도덕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론을 상상할 수도 있다. 고양이 머리에 대못총을 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면, 돼지나 소를 도축하는 행위는 윤리적인가? 이에 대한 상투적인 반론은 아마도 먹기위해(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이는 것과 재미로 죽이거나 고통을 가하는 행위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일 게다. 그러나 포식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피식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들 입장에서는 도살장에서 거대한 말뚝이나 망치에 맞아 100% 사망하는 것보다는, 비록 머리에 못을 달고 살지언정 조금이라도 생존율이 높은 쪽이 그나마 나아 보이지 않겠는가? 결국 식용을 위한 도축이 정당화된다면, 재미로 대못총을 쏘는 행위가 정당화되지 못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아래 웹툰의 도살자의 행위가 비난 받아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뱀을 죽이는 행위는 어떻게 생각하야할까? 고백하건대 나 역시 군대 시절에 우연히 발견한 뱀을 군화발로 밟아 죽인 일이 있다(물론 지금은 그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 요즘은 직접적인 위해가 없는 한 쥐조차 죽일 생각이 없다). 그랬던 내가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어떤 이가 지하실에 숨어 살던 고양이 새끼를 집어 던져 죽였다는 얘기를 듣고 분노를 한 적이 있다. 윤리적 일관성이라는 차원에서 나는 과연 분노할 자격이 있는가? 윤리적 특성을 지닌 인간은 이성적 일관성과 감정의 편향성 사이에서 항상 줄타기를 해야 하는 신세일지도 모른다(이에 대해서는 글의 말미에 나오는 '윤리적 경계긋기'에 대한 글을 참조하라).
이산 作, 웹툰 <검은피> 중에서. 이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철학자 칸트는 동물학대가 결국 인간에 대한 잔혹행위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비윤리적이라고 했다. 그의 견해도 사실 인간의 관점에 불과한 것이라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데, 첫째는 동물학대 경험자의 다수가 새디스트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보고도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도축행위의 잔혹성 자체에 대한 성찰을 육식주의의 옹호를 위해 의도적으로 생략했다는 혐의가 들기 때문이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참혹한 소의 도축 과정을 우연히 목격한 뒤에 각성하여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톨스토이의 성찰은 근본적으로 오류라는 말인가?
예상되는 반론 하나는 짚고 넘어가자. 혹독한 기후로 인하여 농업이 허용되지 않는 극지방 사람들의 육식에 대한 문제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그들의 상황을 실례로 그들과는 달리 채식의 가능성이 훨씬 보편적인 우리의 상황을 정당화하는 건 그다지 온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1973년에 안데스 산맥에 추락한 비행기의 조난자들이 90일 동안 인육으로 생존했다고 해서 그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은 우리들의 식인 행위가 허용되는 건 아니다.
자연상태에서의 욕망의 충족에 대해 철학자들은 예로부터 다음과 같이 통찰했다. 욕망의 제어 없는 해소를 '자유'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욕망의 무분별한 해소는 돌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언덕 아래로 구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율적이라는 것이고, '자유'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할 줄 아는 상태인 것이다. 즉, 문명과 윤리란 자연적 종속으로부터의 이탈에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다(이보다 더 정교한 채식주의 옹호의 논리가 많지만, 여기서 자세한 논리는 생략하겠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피터 싱어나 제임스 레이첼스, 그리고 마크 롤랜즈 등의 저서를 참고하라).
이처럼 채식주의의 윤리적 정당성이, 다시 말해 육식주의의 정당하지 못함이 이미 입증된 상태에서 B 군이 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유일한 방법은 약간의 육식을 하는 어중간한 채식주의 찬성론자들의 언행불일치라는 덜미를 잡아채는 것이다. 덜미를 잡는다고 해서 육식의 윤리적 정당성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님에도, 그런 공박이 승리를 가져왔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언행불일치 자체는 공박 당할 여지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막대한 액수의 세금을 포탈한 모 기업의 회장이 "온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건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뭐, 내가 막대한 양의 육식을 행하는 건 아니다만….
어쨌든 승패의 결과는…,
B군 : I (나) = 1 : 0
덜미를 잡음으로써 순간적으로나마 논쟁의 우위를 점유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채식주의 논리의 정당성에 타격을 준 것은 전혀 아니다. 하여 B 군과 입장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논쟁의 우위를 더욱 공고하게 하려면 채식주의 논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공략해야만 한다고 대개 생각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의 공박 내용이 하나 같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채식주의 논리를 공박하기 위해서 일관성의 문제를 들이댄다.
B : 따지고 보면, 낫으로 풀을 베는 것과 개를 베는 것은 같은 행위 아닌가요? 풀은 '생명' 아닙니까?
그럴듯한가? 내가 보기에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논박은 나(필자)를 향해 던져야할 성질의 것이라기보다는, 누구보다 그렇게 물은 자기 자신에게 향했어야 할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공박한다.
I : 만약에 어떤 인질범이 너의 식구들 중 한 명을 인질로 잡았다고 가정하자. 만일 그가 너에게 '네 식구를 살리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낫으로 저 들풀이나 진돗개 중 하나를 베어서 죽이면 네 식구를 살려주겠다'라고 제안한다면, 너는 그 상황에서 들풀 대신 진돗개를 죽이는 것을 선택할 건가?
"개나 풀이나 똑같은 생명인데 죽이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는 견해는 마치 상식인양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다. 나만 해도 이런 견해를 각기 다른 상황에서 네 명의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갓 태어난 유아를 살해하는 것은 범죄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도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체내에 수정된지 두 달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태아를 낙태하는 행위는 범죄인가? 외국의 경우 대체적으로 3개월 미만은 임산부의 자율에 맡기고 6개월 이상은 엄격히 제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2~3개월짜리 태아는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이 의문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아마도 개월 수에 상관없이 낙태는 모두 불법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형체를 아직은 갖추지 못한 태아에 대한 낙태 또한 불법이라고 한다면(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형체를 갖추지 않은 태아에 대해 "영혼이 없다"고 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아직은 인간의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인간의 맹아라고 할 수 있는 정자를 파종에의 적절한 장소를 찾지 못해 욕실의 하수구에 배출하는 행위를 불법이라고 말하지 못할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극단적인 일관성에 대해 할 헤르조그(Hal Herzog)는 자신의 저서 <우리가 먹고 사랑하고 혐오하는 동물들>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윤리에서도 불가피한 경계긋기가 필요하다. 피터 싱어(실천윤리학자)가 본래 '작은 새우와 굴 사이에' 경계를 그은 반면, 탐 리건(동물운동가)은 적어도 1년 된 포유류 및 조류에 선을 그었다. 싱어와 리건 둘 다 인간이 사는 곳은 현실세계이지 지식인들이 모여 사는 가상의 도적적 창공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래서 이들은 때로 상식을 수용하기 위해 타협도 했다. 이를테면 두 사람 모두 다른 종보다 관심을 더 많이 받는 특정 종이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싱어는 쥐덫 제거보다 영장류의 법적 지위 개선을 위한 캠페인 활성화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그리고 리건은 만약 네 명의 일반인과 골든 리트리버가 넷만 태울 수 있는 구명보트에 초과 승선했다면, 개가 배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도 썼다. "개의 죽음은 그 어떤 인명피해와도 견줄 수 없다."
만약 도덕적 허용선을 긋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어리석은 일관성은 미숙한 영혼에 나타나는 도깨비"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중략)
논리를 극단까지 몰고 가는 사람들을 일컬어 철학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이론의 도랑에 빠졌다(Caught in the grip of a theory)'라는 표현이다.
(중략)
만약(…) 종 사이에 도덕적 경계긋기를 거부한다면, 그리고 두뇌 크기나 다리 개수에 따라 생명을 차별대우해서는 안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당신은 아마(…) 흰개미가 내 집을 갉아 먹을 권리가 있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사실 약간의 육식을 하면서 개 식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윤리적 경계긋기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돼지와 개 사이에 경계를 놓는 일은 돼지와 고등어 사이에 경계를 놓는 것처럼 그다지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피터 싱어의 말마따나 생물학적이나 외형적으로 침팬지가 조개나 말미잘보다는 훨씬 인간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단지 언어 능력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개와 침팬지 모두를 '동물'이라는 범주에, 그리고 사람과 침팬지는 각각 '인간'과 '동물'로 분별하는 것 만큼이나 불합리하다.
어쨌거나 이쯤 되면 B 군과 나의 스코어는 '1 : 1'이 되어야 마땅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상식을 일탈하는 '승부뒤집기쇼'가 펼쳐지고 만다.
흰개미가 갉아먹은 집
나의 질문에 B 군은 허를 찌르는 답변을 한다.
B : 풀과 개 중 어느 것을 베냐고요? 저는 아무 거나 다 벨 거여요.
당황한 나는 이렇게 반박한다.
I : 너는 지금 네 논리의 일관성을 관철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어!
B : 거짓말이요? 아닌데요. 전 정말 그럴 겁니다.
그 진돗개가 이빨을 들이대며 죽자고 달려들지 않는 한, 그가 정말로 개를 선택할 거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시 모르지, 그 녀석이라면…' 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없다. 이것은 유아 살해를 범죄라고 분명히 단정할 그가 욕정에 등 떠밀려 자신의 잠재적인 자식을 욕실의 하수구에 버리는 행위를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확실히 그는 논리의 일관성을 위해 패자(敗者)의 길보다는 잔인한 악당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그의 발언의 진정성을 시험할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면, 논쟁의 승패 여부는 담화 자체만으로 한정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는 또 졌다.
이로써 스코어는 0 : 2.
승리를 위해 진정성보다는 기만적인 일관성을 선택한 이를 이길 수 없다. 대화는 이 시점에서 중단되어야 한다. 이길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논의의 진정한 핵심에 다가서는 것을 원하기보다는 담화시 유리한 위치를 점하여 승률을 높이는 것에 논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금성철벽(金城鐵壁)을 두른 이를 설득할 방도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진작에 그만 두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금성철벽의 뻔뻔함에 맞닥뜨리기 전 자가당착이라는 덜미를 잡혔던 그 순간에 말이다. 기만적 일관성이나 자가당착적 언행불일치나 모두 승부욕이 자극한 일종의 오버페이스가 아니었을까.
브라이언 크리스천의 저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The most human human)>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확실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체스처럼 득실의 합계가 항상 제로가 되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에서도 한 명의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이기려면 상대 플레이어는 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둘 다 승자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해 상대 플레이어의 성과를 최소화하는 것과 나의 성과를 최대화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보더라도 같은 전략으로 여겨진다.
(중략)
책 중에는 유혹, 인터뷰, 협상 같은 상호작용들의 대립적인 관점에서 서술한 것들이 많다. 인터뷰 기자 로렌스 그로벨은 "상대의 약점을 잡아내는 것이 내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형사 재판과 같은 사건에서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일반적으로 대화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 최상의 대화는 상대방에게 훌륭한 것들을 말할 기회를 제공하므로 최소·최대나 최대·최소가 아닌 최대·최대(maximax) 더 가깝다. 우리는 점수를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을 주고 받는 것 자체를 위해서 경기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기꺼이 고공 패스나 어시스트를 즐긴다.
(중략)
…안타깝게도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자주 접하게 되는 토론이라는 의사소통 '게임'은 대립적인 제로섬 게임의 형태를 띨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 상대의 주장을 약화시키는 것은 곧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논변, 논쟁, 불일치 따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는 비유들은 대부분 전투적이다. 나의 진술을 방어하고 상대의 입장을 공격하며, 약한 주장으로 후퇴하기도 하고 비난에는 또 다른 비난으로 역공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는 오로지 진실을 향한 공동의 작업이자 즉흥적 공연이며, 파트너와 박자를 맞추며 추는 탱고와도 같은 것이다. 대화는 결투라기보다 이중주에 가깝다.
브라이언 크리스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