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말 오랜만에 호수공원을 찾았다. 온갖 나무들과 호수 위로 비치는 햇살, 그리고 현대미술 작품들을 둘러보는 도중 저 멀리 동물 사육장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공작새 사육장이다. 몇 마리의 혜택 받은 닭들과 같이 살고 있다.
30세 전후의 한 엄마가 공작새를 보여주기 위해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아를 높이 들어올리며 공작새에게 말을 건넨다. "공작새야~너의 날개를 좀 활짝 펴 주면 안되겠니?" 그리고는 자신이 공작새가 되어 대답한다. "내가 날개를 펴면 얼마나 예쁜지 아니? 하지만 난 기분이 좋을 때만 날개를 펴."
마치 동화책을 읽어주는 듯 하다. 사랑스러운 분위기다.
문득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네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아가야~ 배고픈데 저 공작새를 확 잡아먹어 버릴까?"
영락없는 동화나라의 늑대다. 한 대 얻어맞을 것 같아 관뒀다.
이 짓꿎으며 호러블한 충동을 어이하리. 내 맘속에는 악마가 산다.
2.
호수공원을 산책하는 중에 어디선가 '뽕짝'이 들려온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어떤 어르신께서 휴대용 미니 오디오를 들고 산책 중이시다. 마치 힙합을 틀어놓은 미니오디오를 어깨에 걸쳐 메고 거리를 다니는 미국의 젊은이들 같다. "여기는 공공 장소이니 가급적이면 이어폰을 사용하시든가, 아니면 볼륨을 좀 줄여주실 수 없을까요?"라고 간청하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전통적인 경로사상에 충실하기로 마음 먹고는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가버린다.
한참을 걸어서 '뽕짝'의 소음(개인적으로 '데쓰메탈'은 들을 수 있어도 '뽕짝'은 못 듣는다)에서 해방되려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자전거를 탄 어르신께서 역시나 '뽕짝'을 큰 음량으로 틀어놓으며 지나가신다. <전국 노래 자랑>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늘상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인들은 정말 노래를 좋아한다.
공중 예절이라는 개념을 아예 물 말아 드시지 않은 한, 아마도 그 어르신들의 속내는 이런 것일 테다. '이 ...음악은 아주 좋은 것이고, 따라서 타인에게도 좋은 것이다.' 혹은, '이렇게 좋은 노래가 타인에게 해가 될 리가 없잖은가?'
문득 대딩 1학년 때의 일이 떠오른다. 학우 H 군이 자취방에 찾아왔다. 무료하여 이런저런 음악을 들려주며 내가 말했다. "이 음악 한 번 들어봐, 끝내줘." 혹은, "이 음악 죽이지 않냐?"
언젠가 그가 술자리에서 내게 이런 충고를 한 적이 있다. "너는 다 좋은데, 딱 하나 고쳤으면 하는 게 있어. 네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좀 강요하는 듯한 버릇이 있는 것 같아." 물론 '다 좋은데'는 다테마에(겉치례)이고, 그 이후의 것은 혼네(진심)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어쨌거나 이 충고를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을 보면, 둘 중의 하나는 틀림이 없다. 깊이 반성했거나, 졸라 기분이 나빴거나.
반성을 했다면 그 이후의 행태에 변화가 있었어야 마땅하거늘, 이후에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놈의 빌어먹을 주관주의는 여전한 걸로 봐서 아마도 후자의 경우였나 보다. K 모 씨가 "윤아, 예쁘잖아?"라고 말했을 때, 나의 답변은 이랬다. "삐쩍 말라서 개뼉다귀 절벽녀인데 뭐가 예뻐?" 또, P 모 씨의 신민아 예찬에는 이렇게 대꾸했다. "동남아시아 삘이 펄펄 나는데 뭐가 예쁘냐?" 이렇게 나는 안티-페미니스트에 인종차별주의자를 자초하고 만다.
계속해서 호수공원을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일 저 어르신이 뽕짝이 아니라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틀어 놓으셨다면, 그렇게까지 불쾌감이 들었을까?'
'그렇게까지는' 아닐 것 같다. 이로서 나는 안티-페미니스트와 인종차별주의자에 덧대어 문화의 엘리트주의를 신봉하는 소위 '대중사회론자'가 된다. 대뇌 어딘가에서 적신호가 번쩍인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예술에 전당>의 콘서트홀에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벌, 땡벌~'하는 따위(?)의 뽕짝이 무대에서 불리어져도 괜찮을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결국 골룸처럼 자문자답한다. '뭐...그것도 나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데쓰메탈 밴드 카니발콥스가 "She was so beautiful. I had to kill her…Raped before and after death…they're all Dead"하고 노래부르는 것에 비하면 훨 낫잖은가?예술의 전당이 무슨 성전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럼에도 역시 뭔가 꺼림한 건 어쩔 수 없다. 역시 고정관념은 힘이 세다.
이성과 감정이 분리되는 순간이다. 감정은 여전히 '땡벌'을 거부한다. 그런 감정을 거부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은 한다. 어쩌면 이런 행태도 진심이 아닌 가식일 뿐인가? 구태여 자위하여 닐 암스트롱의 명언을 살짝 비틀어서 말하자면, 이성적으로나마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쓴다는 것 자체가 '현자들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한 도약'일는지도 모른다.
3.
어린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모아 둔 벽의 장식들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개별적인 하나의 그림은 천진하기는 해도 그다지 잘 그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렇게 한 곳에 모아 두니 마치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그림들처럼 예쁘다.
4.
풍차 모양을 본 뜬 이른바 '타이니 하우스(Tiny House)'가 눈에 띤다.
타이니 하우스는 내 오랜 소망이기도 하다. 아주 어렸을 적에 자주 동네에 있는 빈 깡통이나 종이 박스들을 주워다가 두세 평 남짓의 작은 집을 옥상에 만들자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실행을 하지 못해서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지만, 어린 시절의 소망은 아직까지 건재한 모양이다. 여전히 작은 공간이 좋아서 카페도 부러 조그만 곳만 찾는다. 태곳적 아늑함에 대한 향수일까?
어쩌면 헨리 데이비스 소로우가 쓴 <월든>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작은 오두막에서 살고 싶다. 100평 남짓의 꽤 넓고도 럭셔리한 집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단 한 번도 집이 넓거나 럭셔리해서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진심으로 작고 단순하게 살기를 원한다.
5.
호숫가에 2인용 그네 의자가 한 대 놓여 있다. 문득 한번 앉아서 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어떤 년 부부가 떠날 줄 모르고 계속해서 그네를 타는 통에 멀찍이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결국 돌아서고 말았다.
하지만 서운한 건 없다. 오히려 계속해서 그네를 타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흐뭇한 생각마저 든다. 적어도 저 순간만큼은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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