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기사는 F.Sor의 <L`Encouragement op.34>에 관한 단상.
"고독한 두 영혼의 대화"라…멋지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연상하게 하는 이 대목은 심금을 울린다.
‘고독한 두 영혼의 대화’라... “인간은 모두 고독하고, 사랑할 때 더욱 고독을 느낀다”는 매우 상투적인 이 말은 아무래도 철학적 근거가 있는 것 같아. 삶과 죽음을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지만, 어느 생물학 책에서 “죽음이란 개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란 말을 읽은 게 기억나. 죽으면 모두 흐물흐물 흙으로 돌아가잖아. 사람이든, 곤충이든, 풀이든, 나무든 모두 마찬가지 아니야? 이 말은 뒤집어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개체의 벽 속에 갇혀 있다”는 뜻인 것 같아. 살아 있는 동안 나와 타인의 완벽한 합일은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모든 고독은 절대 고독인 거야. 사랑할 때 상대방과 합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고양되지만, 이 또한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니 더욱 고독할 수밖에 없는 거지. 죽고 나서 흙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타자와 섞일 수 있는 게 모든 생물의 숙명이라니... 개체의 환생 같은 건 없고, 모두 흙으로 돌아간 뒤 섞여서 다른 개체로 태어나는 거야. 그래서 나는 봄에 피어날 들꽃과 다르지 않은 것일까.
이 곡 링크 2분 21초 지점을 그래서 나는 ‘고독한 두 영혼의 대화’라 부르고 싶어. 두 대의 기타는 고독한 두 영혼이야.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지만 끊임없이 대화하며 조화를 이뤄. 고독하다고, 삶이 덧없다고 모두 무의미한 건 결코 아니야. 매 순간의 만남과 대화는 그래서, 아니 그럴수록 더욱 경이롭고 소중한 것 아닐까.
기사 본문에서는 어떤 자매의 연주로 링크를 걸었지만, <위안op.34>연주는 역시 존 윌리암스와 줄리안 브림 듀오가 한 획을 그었다. 존과 줄리안의 음색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능히 공감하겠지만, 그들 각자의 개성대로 존은 곡의 안정감에 치중한 반면 줄리안은 감정의 변화와 표현에 더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미묘한 '엇나감'이 발생한다. 줄리안은 감정에 충실하느라 종종 존의 정확한 리듬감에서 이탈한다. 주제와 변주 3의 경우에 곡의 템포까지 급격하게 빨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립적인 성향으로 인한 '엇나감'은 묘한 공존을 이루어 하나의 예술을 이룬다.
아주 오래 전,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라도 듣고 있으면 딱 어울릴 듯한 어느 나른한 초여름 봄날, <록키IV>의 조연인 돌프 룬드 그렌을 닮은 한 친구가 궁시렁대며 동방에 들어섰다. 나는 동방에 있던 오디오로 <위안>의 <안단테 칸타빌레>의 앞부분을 듣고 있었다. 여자한테 바람이라도 맞은 것인지, '돌프'는 뭔가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고 그것이 나의 음악 감상을 방해했다. 나는 <위안>을 다시 처음부터 틀었다.
잠잠해진 그가 <위안>의 대위법적 구성을 보이는 부분(위의 링크한 동영상에서 2분48초 지점)이 다 지나간 후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 정말 위안이 된다!"
기타를 연습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라고 한다면, 역시 <위안>을 연습했던 순간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밤의 정적만큼 기타 연습하기 좋은 공간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와 한 친구는, 따뜻한 바람이 불었던 5월의 어느 날, 예술관 건물과 인접한 보도를 잇는 낮은 층의 계단 위에서 <위안>을 연습했다. 암보도 되어있지 않았을 뿐더러, 총 18페이지 분량의 악보라 보면대를 사용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악보는 계단이 끝나는 보도 위에 쭉 늘어놓아야 했다.
밤의 정적이 과장한 정서에 기대어 연주에 심취해 있던 그때,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불어와 열여덟 장의 악보를 모두 날려 버렸다. '고독한 두 영혼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지만, 우리는 웃으며 바람에 제각기 날아간 악보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렇게 바람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몇차례나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는데, 그런 훼방을 무릅쓰면서까지 구태여 실내가 아닌 그곳에서 연습을 했던 이유는 밀폐되지 않은 정적의 공간이 저가의 기타가 내는 소리를 한결 과장하여 아름답게 꾸미는데 일조했기 때문이었다.
열여덟 장의 악곡을 다 연주했을 때는 밤도 제법 깊어 갔을 것이다. 행복한 시절의, 행복한 기억이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 술자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 바람에 흩날리는 <위안>악보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잠시 추억을 더듬던 그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근데 기타가 모두 몇 줄이냐?"
그가 덧붙이길,
"이젠 <로망스>도 까먹었다…."
비록 이럴지라도…근육의 활발함도, 손끝의 섬세함도 모두 세월의 바람에 날아가 버렸지만 추억의 부스러기는 남는다. 손가락에 비례하여 경화(硬化)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이젠 더이상 특별한 일이 아닌 상황에서 어쩌면 추억만이 유일한 '위안'일지도 모르겠다.
사족 :
가을 정기 연주회에서 <위안>을 무사히 연주한 우리는 연주회가 끝난 후 가진 축하연에서 마치 축제의 한가운데 있었던 양 고조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정 무렵 축하연마저 끝나고 모두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후…우리는 텅빈 아스팔트와 적요하고 쌀쌀한 밤 공기 속에서 모종의 허탈감과 고적함마저 느꼈던 것 같다.
'고독한 두 영혼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고, 두 번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작금의 고적함은 어쩌면 그때의 그 정서와 닮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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