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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Tu imagen

 

 

오래전에 서툴게나마 연주하곤 했던, 어거스틴 바리오스 망고레의 <Tu imagen>이라는 곡의 악보를 거의 20년 만에 책장 구석에 쑤셔 넣은 악보 더미에서 발견했다. 몇 군데 반짝이는 화성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곡이다. 그럼에도 이 곡을 가끔 연주했던 것은 순전히 저 매력적인 제목 때문이었다. Tu imagen : 그대의 모습, 혹은 그대의 이미지(심상).
아마도 ‘Tu imagen’을 꽤나 떠올리며 연주를 했지 싶다. 청각적 불만족의 틈을 이미지로 채우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이미지 대상의 부재를 청각으로 달래기 위함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왠지 홍콩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처럼 쌍 권총을 쥐어주면 딱 어울릴 것만 같은 박인환 시인은 이렇게 썼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글쎄다. 내 생각엔 박인환이 문장의 멋을 부리느라 좀 구라를 친 것 같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다. 팩트는 아마도 이럴 것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안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없네.” 대개 이미지-심상(心象)은 이름보다 먼저 잊힌다.

 

                                           박인환 시인(1926~1956)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어느 교수가 제자와 대화를 하며 시골 농장 근처를 걷고 있었다. 이 교수는 문득 자신이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잊히었다고 여겼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자꾸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교수는 잊힌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어린 시절에 거위를 기르는 농장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거위 특유의 냄새가 산책 중이었던 그곳에서도 풍겨 나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유사한 예를 마르셀 프루스트는 무진장 지루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소개한다.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와 홍차를 마시는 순간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과거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밀려드는 것을 깨닫는다).

 

냄새가 환기하는 기억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하는데, 융이 이 일화를 소개한 것은 그것보다는 아마도 ‘무의식’이라는 차원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함일 게다. 의식 안에 없었던 기억이 불현 듯 거짓말처럼 의식 위로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 기억들은 그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걸까? 뭐, 이런 거다.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이런 경험이 없다. 만화 <맛의 달인>의 한 장면처럼, 명 요리사인 주인공에 의해 과거의 그 맛이 재현된 음식을 먹으며 방울방울지는 추억의 눈물을 흘려보고 싶은데 말이다. 예컨대 오래전에 ‘그대’와 함께 모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우연히 들른 한 식당에서 그때와 똑같은 맛을 느끼고는 기억의 연상 작용이 일어나게 되고, 그럼으로써 잊히었던 'Tu imagen'은 물론,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난 적은 없다. 다만 다소 변태적인 방식의 유사한 사례는 있다. 길을 걷는 도중에 무심히 나보다 앞서 걸어가고 있는 처자의 뒷모습을 본다. 당연히 얼굴은 볼 수 없고 다만 몸의 윤곽만을 볼 뿐이다. 그런데 어딘가 눈에 익는다. 그 순간 낮선 여자의 뒤태에서 ‘Tu imagen’이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순간 심장이 쿵. 잊히었던 'Tu imagen'이 무의식에서 의식이라는 빙산의 일각 위로 떠오르고, 비로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게 된다.

 

잠시 감상에 빠진 상태로 계속하여 거리를 걷는다. 그러다가 보다 명료한 현실적 대상에 압도당해 결국 수지나 현아를 닮은 듯한 지나가는 처자들을 바라보게 된다. 머잖아 ‘Tu imagen’이 다시 의식의 영역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는 걸 깨닫는다. 애써 환기하려고 애쓰지만 얻게되는 건 베이컨의 그림들처럼 마구 뭉개진 얼굴 이미지뿐이다 ‘Tu imagen’이 다시금 깜깜한 곳에 갇혀 봉인되어 버린 거다. 현실의 처자들은 역시 힘이 세다.

 

악보를 펼치고 간만에 연주해 본다. 음악이 기억을 환기해 준 사례가 있었던가? 아마도 무의식으로 꺼져 버린 기억은 불러일으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사례가 아예 없지는 않은가 보다. 뭐, 역시나 내겐 해당 사항 없는 일이다.
대체로 음악은 무능하고, 또 그만큼 순수하다.

 

 

                   개인적으로 이 곡은 이것보다 느리게 치면 더 좋으리라고 본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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