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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근성의 힘

 

 

 

타인의 작품에 대해 불경스럽게 말해 송구스럽기 짝이 없지만, 웹툰계에서 제일 허섭스레기라 할 만한 작품은 아마도 김 모 화백의 <돌아온 럭키짱>일 거다(노력과 근성을 강조하는 이 작품에 비하면, 가모우 히로시의 <떴다! 럭키맨>은 '럭키맨'이 종종 '노력맨'을 이길 수도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얼마나 명작인가).

 

일례를 들면 이렇다. 배경은 2010년 즈음인데, 한 고등학교의 교장이 고딩이 주인공을 불러 이렇게 얘기한다. “월남전 때 자네 아버지가 자네를 내게 부탁했지.” 대체 이 고딩이는 몇 살인 걸까? 혹은 정충이라는 형태로 부탁하여 시험관 아기로…
이런 것도 있다. 한 무리의 고딩들이 카페의 1층으로 들어가자마자 치고받고 싸운다. 그러다가 한 고딩이가 한 대 얻어맞고는 창밖으로 나가 떨어지는데… 2층에서 1층으로 추락. 대체 언제 2층으로 올라간 걸까? 그 뿐만이 아니다. 맞은 건 얼굴인데 배를 움켜잡는다는 둥.

싸움의 서열도 ‘저 꼴리는대로’다. 예컨대 C는 B에게 상대도 안 된다. B는 A에게 상대도 안 된다. 그런데 C는 A와 맞장 떠서 이긴다. 문제는 ‘싸움이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라고 우기기에는 너무나 엉성하다는 거다. 그 C가 A와 맞장 뜨는 장면에서 C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녀석의 주먹이 먹이를 노리는 매의 부리처럼 급소만 노리고 들어 와. 하지만 결심한 것이 있어. 피하지 않아! 이 녀석의 주먹을 모조리 받아들일 거야. 그리고 버티어 낸다…그것은 곧 이 녀석 스스로에게 주는 나의 공포! 가슴속 깊이 박히는 핸디캡이 될 것이다. 그 핸디캡이야말로 나의 근성이니까.’

 

'나의 근성’이란다. 문득 궁금하여 ‘근성’을 사전에서 찾아봤다. 이렇게 적혀있다.

 

 

근성(根性)[근성]
[명사]
1.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성질.
2.뿌리가 깊게 박힌 성질.
유의어 :마음보, 본성2, 심보

 

근성(芹誠)
[명사]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마음. 충성스러운 농부가 임금에게 향기로운 미나리를 바쳤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모호하다. ‘저 놈은 근성이 없어’라고 말할 때의 ‘근성이 없다’는 말은 보통 인내심과 끈기가 없다는 말로 쓰인다.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얘기인데, 여기서 '정성(精誠)'은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전자의 ‘근성(根性)’이라는 의미는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성질’이 없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뭐, 인간은 이른바 '백지 상태(Tabula rasa)'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라면 근성(根性)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어쨌거나 후자의 의미인 ‘근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나는 아나운서들의 멘트가 있다. “태극전사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정신력으로 버텨야 합니다.”하는 따위들. 어떤 관점에서는 ‘솔까 개솔’이다. 저러다가 버티지 못하고 한 골을 먹어서 경기에 졌다고 치자. 그러면 “정신력이 결여되어서(혹은 근성이 결여되어서) 결국 졌습니다.”라고 평해야 하는 건가?

이런 얘기도 있다. 어린 자식이 무거운 뭔가에 깔려서 압사 직전이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초인적인 ‘정신력’을 발휘하여 평상시라면 절대로 들 수 없는 그것을 들어올린다. 헐, 솔까 개솔.
오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느 철인의 지적을 소개한다.

“마치 저수지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행위가 솟아나는 정신적 상태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찾아 헤매는(그리고 발견하는), 일종의 정신병이 있다.”

 

“정신력으로 버텨!” 이 말의 진의는 뭘까? 단순하다. 그것은 육체의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버티라는 거고, 따라서 육체의 힘이 남아 있는 한 어슬렁거리지 말라는 얘기다. 이 경우라면 아나운서들의 멘트는 그리 문제가 될 건 없다. 문제는 정신병에 걸린 혹자들은 다음의 의미로 타인을 채찍질하는 데 사용함에 있어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는 것. “육체의 에너지가 고갈이 되었다면, 정신으로 버텨라!” 이건 마치 약(?)이 다 떨어진 건전지에게 “약이 다 떨어졌다고? 그럼 정신력으로 에너지를 내 봐!”하고 명하는 것과 같다. 육체에 대한 정신의 우위, 혹은 완전한 지배력에의 맹신은 종종 열역학의 법칙까지 초월하려 든다.
물론 예상되는 반론이 있다. “배터리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다.”라는 식의. 글쎄, 그게 정신병이라니까, 하고 답하면 아마도 혹자는 ‘정신병’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정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누가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랬나. 정신 가지고 오바 떨지 말라는 거지.


 

 

다시 김 모 작가의 얘기로 돌아가자. ‘(급소만 노리고 들어오는)이 녀석의 주먹을 모조리 받아들일 거야. 그리고 버티어 낸다,’ 그리고 ‘나의 근성이니까’라고 했나? 내 생각에는 맷집과 근성(芹誠)은 별로 상관이 없다. '용가리 통뼈'의 그 근성(根聖)이라면 모를까. '우리들의 모든 행위가 솟아나는 저수지’가 김 모 작가에게는 ‘근성(芹誠)’인 모양이지만, 세상에 육체의 한계를 뚫고 솟아오르는 그런 근성 따위는 없다. 만약 누군가 근성으로 힘을 냈다면, 그것은 육체가 아직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자극이 들었는지 열공(?)하던 90년대의 추억을 재현하기라도 하듯, 어제 하루 기타 연습을 무려 10시간 가까이 했다. ‘보다 젊은 시절에 했던 일이 지금이라고 왜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늘, 다시 한 번 기타를 잡고 학구열(?)을 불태운다.
그러다가 두 시간 만에 진짜로 홀랑 불태워졌다. Burn out. 에너지의 소진, 고갈. 그리하여 오후 6시에 자리에 드러눕는다. 어쩌면 뇌혈관질환 후유증일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거다. ‘아니야…그래도 조금 더 버티고 손가락을 움직여보자’고 근성을 발휘하려 하지만, 깨닫는 건 이것뿐이다. 육체적 에너지의 소진 상태에서는 정신적 예술이란 불가능하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헨델을 소개하며 이런 소제목을 달았다. “뇌졸중을 극복한 헨델.” 이런 제목을 접하면 육체적 능력이 소진된 헨델이 초인적 정신력을 발휘해서 안 움직이던 손가락마저 움직이게 했다는 투의 내용을 상상하게 된다. 확실히 ‘정신병’이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는 뇌졸중으로 연주자 생활을 포기한 뮤지션들로 넘쳐난다(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유명 연주자들이 줄을 섰다).

 

고 또 맞아도 근성으로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실제로 제대로 맞아보지 못한 인간일 가능성이 100%다. 매 앞에 장사 없다.

<Die Hand>라는 저서의 서문에서 마르코 베어는 이렇게 썼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다.’ 이 유명한 말은 서양 철학의 시조로 꼽히는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오늘날까지도 많은 철학자들이 집착하고 있는 사고방식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 ‘진리’는 육체를 종종 필요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다. 이런저런 욕구로 귀찮게 하는 육체란 존재는 사유에 몰두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견해에서 손과 두뇌는 훌륭한 상호작용을 이루는 관계로 묘사된다. 두뇌없이 기능하는 손은 생각할 수 없으며, 손의 작용 없이 두뇌가 오늘날의 형태로 발전되었다는 생각 또한 가능하지 않다. 정신과 육체가 마침내 손을 맞잡게 되는 것이다.() 결국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 아니라 모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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