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이런 말이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땅거지'라는 말이 있었다.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이들을 혐오하며 지칭하곤 했던.
땅에 떨어진 음식이니 병원균이 묻었을 거고, 병원균이 묻은 음식이니 먹으면 탈이 날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이 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일단은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하다는 의미일 테니, '땅거지'라는 말은 의미상 꽤나 적절해 보이기는 한다.
적당히 늦은 시간에 마트에 가면, 반액 할인해 주는 김밥이나 샌드위치 따위를 살 수 있다. 오늘 간만에 가 보니 삼각김밥이 겨우 400원! 평소에 4천 원이나 하는 샌드위치가 고작 2천 원! 아싸~!
하지만 마눌님께서 샌드위치를 조금씩 베어 물더니 죄다 남긴다. 조금 상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며. 여자들의 민감함을 과도하다고 생각하는 둔감의 마초인 내가 시식하여 보니 맛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다지 심하지는 않다. 결국 '이상 무'로 판결을 내린다.
꼰대 지양을 인생의 목표들 중 하나로 삼는 나임에도, 꼰대의 시각을 잘 거두지 못하는 게 하나 있다. 어릴 때 받은 교육의 영향 때문일까, 나는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밥을 남기는 걸 그리 아름답게 보아 주지를 못한다. 어쩌면 '너희들이 보릿고개를 겪어 봤어?' 하고 묻지 못하는(나도 못 겪어 봤으니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는지도 모른다. 대신 '아프리카에서는 30초에 한 명 꼴로 아사한다'거나, '밥 남기면 나중에 지옥 가서 남긴 만큼 다 먹어야 한다'고 애들에게 말하는 꼬락서니는 영락없는 꼰대의 그것이다.
남은 음식을 마주할 때면, 2007년 퓰리처 수상작인 코맥 매카시의 <더 로드>라는 소설이 떠오른다(비고 모텐슨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작품의 배경은, 극소수의 인간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동물이 멸종해버리고 더 이상 식물도 자라지 않아 불모지가 되어버린 미래 어느 시점의 지구다. 이 얘기는 다시 말해, 먹을 거라고는 미량의 남겨진 음식들(대개 캔 종류)을 제외하면 인육밖에 남지 않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상태가 되어버린 걸 의미한다.
그래도 인육을 얻기 위한 살인과 식인행위를 거부하며 '인간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과 그의 아들은, 얼마 안 남았을 먹거리들을 찾아 다니며 '땅거지' 생활로 연명한다.
이 소설과 영화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이후로 나는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가는 부자(父子)를 볼 때마다 주인공 부자가 생각이 나서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시큰해지는 게 아닌가(뻥 아니다)!
덧붙여, 주인공이 수분이 다 빠져서 말라 비틀어진 사과를 주워 먹는 장면은, 내가 남겨진 음식과 대면할 때마다 반드시 떠오르는 장면이다. 이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내가 저들의 상황에 있다면 과연 이 샌드위치를 안 먹고 버릴 것인가?'
하여, 변질의 혐의는 있지만, 둔감의 헝그리 정신은 민감한 부인의 미감을 애써 부인하고는 결국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그것들을 다 해치운다.
그 결과, 새벽 1시가 넘은 작금에, 질척한 카레를 흰색 용기에 풀고 있음으로써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있는 중이다….
땅거지는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을 훼손할지언정, 고통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땅에 방금 떨어진 것을 주워 먹은 탓에 배탈이 났다는 얘기는 평생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때로는 마트에서 반액 할인된 식품을 먹는 '반할거지'가 되느니, 그냥 땅거지가 되는 게 백 배, 천 배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교훈 :
여자 말을 듣자.
'좌충우돌 잡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Goodbye blue sky (0) | 2015.02.25 |
---|---|
근성의 힘 (0) | 2015.02.24 |
졸업 못하는 꿈을 또 꾸다 (0) | 2015.02.11 |
균형 깨기의 美 (0) | 2015.02.02 |
세월의 간극 (0) | 2015.0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