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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세월의 간극

 

 

여자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K대 훈련병 시절의 얘기다.
사병 식당에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섰을 때, 나와 내 동기들보다 2~3주 먼저 입소하여 화생방 훈련 및 행군을 다 마친 선임병들이 하필 그 옆을 지나가며 연민을 가장한 사디즘의 눈빛으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는데, 가장 인상적인 말은 이랬다.
“아직도 그 지옥 같은 행군을 안했다고? 나 같으면 자살한다.”
그래, 니 똥 굵다.


작가 김훈은 ‘꼰대론’을 다음과 같이 논한 바 있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 고생담 얘기하는 걸 큰 자랑으로 여긴다.” 내 경험상, ‘꼰대’만 그런 게 아니다. 젊은이들 중에서도 일단 경험적으로 우위에 있게 되면 미경험자들에게 정신적 우월감을 느끼는 부류들이 있다. 아니, 꽤 많다.

이왕 K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소위 ‘후반기 교육’을 위한 시설인 김해 소재의 공병학교에서 해병대 훈련병들과 같이 내무실을 공유한 적이 있었다. 한번은 내무실 침상에서 각 잡은 자세의 어떤 해병대 훈련병이 우리들 육군병들을 꼬나보며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 적도 있었더랬다.
“뭘 쳐다봐? 이 시벌놈들아. 우리 해병대는 니들 훈련 따위는 다리 한 쪽으로도 받을 수 있거든?”
그래, 니 똥 굵다. 시벌놈아.


아래의 내용은 똥이 조금이라도 굵은 ‘꼰대’ 입장에서의 감회랄까, 뭐 그런 비슷한 거다.


 

차 안에서 간만에 Toto의 명곡 <로잔나>를 듣다가 문득 이 곡이 세상에 나온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동시에, 한참동안 <로잔나>와 <아프리카>가 수록된 명반 <TOTO IV>를 반복해서 감상하던 시절도 떠오른다. 당시에 그쪽 음악에 심취한 대개의 학생들이 그러했듯이, 나 역시 80년대뿐만 아니라 60년대의 음악까지 두루 섭렵하려고 무진장 애썼더랬다. The Doors의 <Light my fire>나 Cream의 <White room>을 들으면서 분명 이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토토의 그 음반과 크림의 그 음반의 발매 시기는 무려 15~17년이라는 차이가 있다. 우와! 15년 전이라니!’
정말 그랬다. 80년대에 바라본 60년대 후반이라는 과거는 당시 호랑이 담배 피던 ‘고릿적’ 시절로, 그러니까 ‘long long ago'의 느낌으로 다가왔더랬다.

 

물론 그렇게 느껴진 데에는 녹음기술의 진보가 한몫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60년대 후반에 발매된 음반과 80년대 초반에 발매된 음반(예컨대 Yes의 <Owner of a lonely heart>)의 음질을 비교해 보면, 단순한 기술상의 차이를 장구한 세월의 간극으로 인지(혹은 착각)하게 되는 거다. 마치 스마트폰에 익숙한 작금의 10대들이 90년대 중후반의 TV리모컨만한 핸드폰을 보고 세월의 간극을 과장하는 것처럼.

2005년 작금에 15~17년 전의 음악이 그렇게 ‘올드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아마도 이런 탓이 아닐까. 2000년에 발매된 존 메이어(John Mayer)의 데뷔 음반을 떠올리면 80년대 중반에 60년대 후반의 음악들을 떠올리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다.
“존 메이어의 그 데뷔 음반? 그거 엊그제 발매된 것 같은데 벌써 15년이 지났어?”
뭐 이런 느낌이다.
아니, 좀 더 거슬러 올라가도 무방하다. 예컨대 1991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무려 24년 전에 발매된 너바나(Nirvana)의 <Nevermind>음반을 떠올리면 역시나 “엊그제 들은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되었나?”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당시의 록음악 레코딩 기술과 작금의 기술이 60년대와 80년대의 그것처럼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한다……

……고는 하지만, 작금의 10대나 20대들이 내 말을 긍정할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들 역시 80년대의 나처럼 이렇게 말하리라.
“너바나하고 라디오헤드의 데뷔음반이 90년대 초반에 발매되었다고요? 우와! 완전 까마득한 옛날이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럴 것만 같다. 글타. 80년대에 내가 느꼈던 세월의 까마득한 간극이란, 기실 레코딩 기술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대딩 시절 얘기다. 동아리의 여름 워크샾에 대선배님이 간만에 찾아주셨다. 그 선배님을 처음 봤을 때의 소감은 솔직히 이랬다. ‘대선배님이라 그런 지 역시 중년의 무게감이 느껴지는구나.’ ‘중년’이라고 그랬나? 당시 그 선배님의 연세는 고작 32세였는데!

나이를 가늠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당시 그 분의 나이가 32세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중년’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는데 일말의 위화감도 없었던 거다. 그랬다. 당시 만 19세의 내가 보기에 삼십대란, 그저 ‘중년 아저씨’에 불과했던 거다…

그랬던 내가 진짜 중년 아저씨가 되어 만 19세~20세에 불과한 후배들과 이런 식으로 대화한다.
“니들이 보기에 현아와 수지 중 누가 더 예쁘냐?”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이렇게 묻는다.
“니들 부모님도 니들한테 현아나 수지 얘기 하시냐?”
물론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나는 한다. 나이 값 못하는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다. 생각해 보라. 젊었던 내가 32세의 성인 남자를 ‘중년 아저씨’로 봤다면, 작금의 스무 살 후배들은 32세를 훨씬 더 넘긴 나를 대체 어떻게 볼 것인가? ‘중년’을 훌쩍 넘어선 ‘말년 아저씨?’ 그런 말년 아저씨가 현아와 수지 중 누가 더 예쁘냐고 묻는다. '헐…'아마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주책이 가능한 것은 아마도 시간에 대한 기묘한 감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80년대에 바라본 60년대의 음악이 ‘고릿적’ 대상으로 느껴지는 것과 반대로, 2010년대에서 바라보는 90년대라는 과거는 단지 ‘엊그제’로 여겨지는 탓이다. 이런 시간 감각을 가지고 있는 ‘말년 아저씨’는 자신의 청년 시절과 작금과의 간극을 그다지 넓게 인식하지 않는다. <응답하라 1994>를 보면서 “그래, 이건 엊그제 일이었지.”하며 착각한다. 물론 이게 말년 아저씨의 잘못은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더 빠르게 가니까.

 

 

 

 

그래서 가끔 이런 망언을 내뱉을 때도 있다. 록밴드 <라디오헤드>의 리더 톰 요크의 근황 사진을 보며 “엥? 얘가 벌써 이렇게 삭았단 말야?”고 말하거나, 섹시 스타 샤론 스톤의 근황 사진을 보며 “뭐야? 벌써 할머니가 다 되었네? 그 섹시하고 탱글탱글하던 샤론은 어디 갔어?”
(문득 떠오르는 추억의 ‘다리 바꿔 꼬아’ 씬. 가위질이 다 뭔지. 검열관들을 극장 꼭대기에서 Push하고 싶었던 인간들이 꽤 많았을 거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상태에 도통 관심이 없다. 또는 세월의 삭풍에 저만 멀쩡한 줄 안다.
아니, 그저 다음과 같은 착각 때문이라고 본다. 20년이라는 세월의 체감 간극을 비교하면,

 

1968년~~~~~~~~~~~~~~~~~~~~~~~~~~~~~~~~~~~1988년
1994년~~~~~~~~2014년

 

그렇다면 2015년과 2035년 사이의 간극은 나중에 어떻게 느낄 것인가? 이렇게?

2015~~~~2035년

하루 하루를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마지막으로 20대 초반의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꼰대’의 말은 이거다.
니들도 멀지 않았어.

 

 

 

 

Remembering times gone by
Promises we once made
What are the reasons why
Nothing stays the same

 

시간이 흘러간 것,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약속들을 기억해 봐요.
왜라는 이유들이 무엇이던 간에
항상 똑같이 머무르지는 않으니까요.

 

-TOTO, <I`ll be over you>중에서

 

※사족 :
이랬던 꽃미남 스티브 루카서 선생이, 지금은 수퍼마리오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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