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타 타츠오의 만화 <체인지>는 신체 강탈을 소재로 하고 있다(이 작품은 신하균 주연의 영화 <더 게임>으로도 제작된 바 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공원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주인공은 어느 날 부호인 괴(怪) 노인의 계략에 말려들어 그와 단판의 게임을 벌이게 된다. 번갈아가며 번호를 한 번 씩 무작위로 눌러서 전화를 건 다음, 전화를 받는 사람이 남자일 경우 괴 노인은 주인공에게 30억 원을 주어야 하고, 여자일 경우에는 노인의 요구에 주인공이 응해야 한다. 고약한 것은 괴 노인의 요구란 바로 뇌 바꿔치기 수술을 통해 서로의 육체를 바꾸자는 것.
비록 어쩔 수 없었다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게임을 받아들이는 건 확실히 바보나 할 짓이다. 나도 이런 황당한 상상을 할 때가 있었다. 돈을 도배용 벽지나 똥 싼 후 밑씻개로 쓰는 어떤 작자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100억을 내게 주고, 뒷면이 나오면 내 양손을 자르겠다는. 1/2의 확률에 일확천금을 노릴 것인가, 아니면 안전제일을 선택할 것인가. ‘Yes’의 답변을 우리는 무모한 과욕이라 하고, ‘No’의 답변을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한다.
네덜란드의 예술가이자 경제학자인 한스 애빙은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하는가?>라는 저서에서 그 이유를 경제학자의 눈으로 분석한다. 몇 개만 꼽으면,
1. 승자독식 현상
(‘The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ABBA의 노래 제목을 상기하자. ‘아니꼬우면 성공하든가.’ 1번은 이 말을 증명한다. 예체능계는 특히 심하다. 클레이튼 커쇼의 연봉이나 잭슨 폴락의 개발새발 그림에 책정된 천문학적 가격을 생각하면 특히.)
2. 직장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선입견
3. 비금전적인 보상 추구
4. 위험 감수 성향
5. 자만심과 자기기만
6. 잘못된 인식
여기서는 3과 4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자. 먼저 4에 대해서 한스 애빙은 이렇게 보충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예술가들은 위험을 감수하고자하는 성향이 크다. 금전적이든 비금전적이든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 대가로 엄청난 보상을 기대하고 있다.”
오래 전에 기타 연주에 출중한 한 직장인 분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내가 “실력이 그렇게 출중하신데 왜 직업 연주자의 길을 가지 않으셨어요?”하고 묻자 그 분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래전에 학원에서 기타를 배울 때, 거기 원장 선생님이 점심 식사로 짜장면을 자주 시켜 드시는 걸 봤습니다. 그때 나는 이 길을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오해할까 미리 말해두는 바이지만, 나는 이분의 선택이 세속적이거나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비난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예술가들은 위의 5번에 대해 심각하게 숙고해 봐야 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1/2 확률의 내기에 뛰어드는 것은 확실히 ‘바보짓’이다. 물론 예술가들(혹은 예술가 지망생들) 대개가 그런 내기에 뛰어 들리는 만무하다. 나머지 반쪽의 ‘눈’을 '죽음' 대신 이 정도 수준으로 바꿔보자. ‘내기에 질 경우, 너는 평생을 걸인처럼 비참하게 지내야 한다.’ 혹은 '내기에 질 경우 평생을 하층민으로 살아야 한다'거나. 이 경우는 내기에 뛰어들 확률이 높아질 테다. 예술가는 물론 그 이외의 사람들 역시(물론 나는 그럴 생각은 없다) 그럴 거다.
여기서 확률을 더 낮춘다면 어떻게 될까? 1/2의 확률이 아니라 1/10의 확률로 말이다. 물론 1/10에서 '1'이 일확천금의 '눈'이다. 거개가 이 내기를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
유감스러운 얘기이지만, 이게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이다. 1/10이 아니라 1/1,000, 혹은 1/10,000의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불나방들.
이길 확률이 낮다면 거부하는 게 합리적임에도 일확천금에의 욕망이 인간을 강제하는 힘에 굴종하여 인간은 도박에 뛰어든다. 예술가 중에는 도스토예프스키와 스캇 피츠제랄드가 그랬다. 물론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생각은 없다. 다만 위의 4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도 이런 일종의 도박심리라고 봐도 무방할 거다. 즉, 성공의 확률이 다른 분야보다 월등히 낮음에도 뛰어들고 보는 게 예술가라는 얘기다.
타네다 산토카(種田山頭火1882~1940)
혹자는 이 견해에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예술을 하는 건 돈 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순수하고 무목적적인 것에 대한 지향 때문이다.”라고 항변하면서. 즉, 위의 3번 '비금전적인 보상 추구'에 해당하는 사항 말이다. 아마 맞는 얘기일 거다. 서머싯 모옴의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스트릭랜드나, 이문열의 <금시조>에 나오는 고죽 선생이 부의 축적을 위해 예술에 헌신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수의 예술가들이 이런 길을 걷고 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고 권유하고 싶다. 현재 록밴드를 결성해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 중에서 미래의 스타를 꿈꾸지 않는 젊은이들이 몇이나 될까? 클래식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 등을 꿈꾸는 이들은? 성공하여 대접 받으며 럭셔리하게 살고픈 욕망이 전혀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님 말고.) 문제는 예술의 상업적 성공이라는 게 하늘의 별따기라는 거다.
돈 때문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알리고자하는 열망만이, 즉 일종의 명예심만이 있을 뿐이라고 항변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솔직히 일부를 제외하면 예술가들은 무소유의 행복을 깨달은 종교인과는 거리가 먼 족속들이다. 아주 오래 전에 화장실을 지나가다가 변기에 고스란히 남아있던 똥을 가리키며 어떤 예술가 동행인 분께 이런 황당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누가 천만 원을 줄 테니 저걸 먹으라고 한다면, 먹을 수 있습니까?” 그 분 대답하기를, “100만 원만 줘도 먹는다.”
아, 물론 농담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어쨌거나 예술가는 법정 스님이 아니라는 거다.
물론 젊을 때는 순수하니까 돈이 직접적인 열망의 대상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열망의 대상에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나이 먹음에 따라 점차 높아진다는 거다.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 “사람이 빵만 가지고 살 것이 아니”라는 예수의 말씀은 옳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물론 세상에는 빵 따위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걸 실천한 예술가들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스트릭랜드 같은 부류들. 실존 인물로는 만화로도 소개된 바 있는 타네다산토카(일본의 하이쿠 시인)도 있다. ‘6펜스’의 속세를 철저히 거부하여 ‘달’이라는 예술지상주의 종교를 실천한 그들은, 어쨌거나 일찍이 객지에서 병사(病死)했다. 역시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것. 잘난 척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 현실이 그렇다.
“삶을 대가로 희생하지 않은 채 예술이라는 월계수에서 잎사귀 하나를, 단 하나의 잎사귀라도 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토마스 만이 <토니오 크뢰거>에서 한 말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남김없이 미(美)에 감싸이면서, 어떻게 인생에 손을 뻗칠 수 있겠는가? 미의 입장에서도, 나의 단념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리라. 한 손으로 영원을 만지며, 다른 한 손으로 인생을 만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방화로 불에 타 버리는 <금각사> 얘기가 나온 김에 스트릭랜드(달과 6펜스)와 고죽 선생(금시조)에 대해 조금만 더 언급해 보자. 가상인물이기는 하지만 스트릭랜드나 고죽 선생은 돈 뿐만이 아니라 명성이라는 속세의 가치와 작품 자체마저 무화(無化)하는 지고지순한 경지에 이른다. 그들 모두 완성한 작품을 스스로 파괴해 버린 것. 그리하여 고죽 선생의 서화는 불살라지는 순간 금시조가 되어 비상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던가. 이들은 자신의 작품과 더불어 영생할 생각조차 없다. 작품이 남아있어야 그들의 명성도 영생할 것이 아닌가.
현실세계에서는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을 다 태워 버리라는 유서를 남긴 사례가 있다. 카프카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고죽 선생의 의도와 같다면 예술가가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난 그럴 생각은 없다. 나의 작품이란 건 구태여 불을 싸지르려고 하지 않더라도 세월의 불길 속에 어차피 불태워질 것들이다. 대개가 이렇다. 음반이든 저서이든 대개는 재발매, 혹은 재출판이 거부되어 폐기되어 버린다. 아니, 대개는 세상에 출사표도 던지지 못한 채 소멸한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황색눈물>은 젊은 예술 지망생들의 삶을 다룬다. 이런 대사가 나온다. “자유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것.” 이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림이나 소설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 없는, 곁에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버리고 마는, 혼자가 되면 바로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의지가 약한 평범한 인간들ㅡ그런 보통의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그림이나 소설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 배덕(背德)을 감수한다는 말일는지도 모른다.스트릭랜드와 타네다산토카는 예술만을 위해 처자식을 버렸다. 가족에게 배덕하지 않기 위해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은 독신이다. 덜컥 애라도 생기면 ‘6펜스’의 굴레에 매인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미 생겨난 자식을.
아니, 처자식이 없어도 마찬가지일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하에서 금전적 이익을 전혀 추구하지 않는 이름 없는 예술가란 ‘예술하는 거지’나 다름없다. ‘예술하는 거지’보다는 좀 나은 신세라 해도 마찬가지다. 예술이라는 정신적 가치로 육신의 남루함을 위로하기에는 카드빚의 압박과 금리인상의 두려움이 압도한다. 제 아무리 독신이라고 한들.
자유를 추구하려니 생활이 안 되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구름처럼 가며 물처럼 걸으며 바람처럼 사라지다.” 타네다산토카의 하이쿠다. 구름처럼 갈 생각도 못하고, 바람처럼 사라질 수도 없어 예술 외적 안존(安存)에 연연하면서도 명망을 구한다. 택도 없는 소리다. 예술적 부랑자로 살아갈 자신이 없는, 다시 말해 “그림이나 소설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 없는, 곁에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해버리고 마는, 혼자가 되면 바로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의지가 약한 평범한 인간들,” 또는 토니오 크뢰거처럼 예술인과 세속인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즉 나 같은 범인들은 어느 정도 중용을 취할 수밖에 없다. 욕심을 내지 않고 돈은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 만큼만 벌고, ‘자뻑(자족)’과 자괴감의 예술적 시소 위에서 노는 것. 작품 활동은 명예에 연연하지 않은 채로, 다시 말해 (어느 찬송가 가사를 인용하자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것.’
말은 이렇게 쉽게 했지만, 사실 이 중용을 취하는 것 역시 지난한 일이다. 하지만 이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예술을 하는 것, 나는 이것을 깨닫는 일이 나 같은 ‘그림이나 소설만을 위해 살아갈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 제임스 미치너의 시 한 편을 다시 한 번 더 인용한다.
나는 이 세상에 은총의 부채를 졌노라.
내게 허여(許與)된 이 귀중한 공간을
빌려 쓰고 있노라.
그 공간에서 인류의 존엄을 고양시킬
고고성(呱呱聲)을 출판으로 발현하였느니.
나는 명예의 거친 포옹을 희구하지도 않았으니
거리낌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노라.
이 세상은 내게 월계관을 씌워줄 의무가 없어…
단지 내가 빚을 지고 있을 뿐.
그리하여 나는 이제 더 이상 불명예라 생각하지 않겠노라.
운명이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을 무화(無化)시키고
내 정열이 스민 책들을 고사(枯死)시킨다고 한들
이 세상은 내게 특별한 자리를 내줄 필요는 없어…
내가 오히려 빚을 지고 있음이니.
-제임스 A. 미치너 <일흔다섯이 되어가는 한 작가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