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uffingtonpost.kr/2014/12/31/story_n_6399350.html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한 때는 만화책을 돈 주고 사서 읽었던 사람이었다. <겨울 이야기>와 <짱구는 못말려>, 그리고 <명가의 술>과 <머나먼 갑자원>등을 구입해서 봤다 . 우라사와 나오키가 지적했듯이 "만화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는 말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게 현실이지만, 몇몇 양질의 만화는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하나만 예를 들어 보자. 작가 야마모토 오사무는 <머나먼 갑자원(고시엔)>에 이어 청각장애인의 애환을 그린 또 하나의 작품, <도토리의 집>을 남겼는데, 거기에 이런 장면이 있다. 한 청각 장애 어린이가 음식을 씹다가 말고 손바닥에 뱉어 버린 다음 어머니에게 내민다. 그걸 본 어머니는 음식 가지고 그러면 안되는 거라며 몹시 야단을 친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뭔가를 호소하지만 어머니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선천적인 청각 장애인은 언어 장애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몸짓을 통해 깨닫게 된다. 아들이 음식을 씹다가 뱉은 것은 '자기가 경험해 본, 이렇게 맛있는 것을 엄마에게도 맛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장애로 인해 사회화가 더딜 수밖에 없던 터라 자기가 먹던 음식을 남에게 주면 안된다는 것을 몰랐던 거다. 하나의 기호가 고정관념이나 타자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곡해되는 것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익히 공감할 수 있는 명장면일 것이다.
<명가의 술>은 술을 주제로 한 만화 특유의 과장(예컨대 술을 한 잔 마신 후 "아, 이것은 오르페우스의 악상이 액화되어 농축된 듯한, 그런 노스텔지어 가득한 향기예요."하는 오글거리는 대사 따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나름 많은 일깨움을 주었다. 한 병의 술을 빚기 위해 들이는 어마어마한 집중력과 섬세함과 노력(좀 진부한가?). 나는 아직도 이것이 장인의 길이고 예술가가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본다. 그래서 대충 만든 작품을 보면 후진성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15년 전 즈음에 지인들에게 빌려 준 만화책들은 현재 15년째 대여 중에 있다. 내 생각에 영구 임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건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슬램덩크>의 절반은 원래 후배 S군의 것이 아니었던가. 신간이 나오면 대를 이어(?) '구입해 달라고' 그가 입대 직전에 부탁한 것인데, 내가 그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반만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어디서 많이 본 문장이다…) '구입해'만 들어주고 '달라'는 요청은 잊어버린 거다.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책하고 CD만큼은 사적 소유 철폐, 공유화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체 내가 아꼈던 Budge의 CD는 어디로 간 것일까? 행방이 묘연하다. 그리고 예전에 내 자취방에 <사적유물론>을 두고 가신 분, 대체 언제 찾아가실 건가요? 저걸 근거로 '좌빨' 운운하는 인간들에게 쓸데없이 털리고 싶지 않은데 말이죠.
문화계의 블랙홀인 인터넷 덕분에 동네에 책 대여점이 싸그리 사라졌다. 차라리 잘 됐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지적했듯이 만화책도 사서 보는 게 애착이 더 많이 간다. 두고 두고 다시 음미하는 재미도 그렇지만, 소유에의 즐거움도 무시 못한다.나는 법정 스님처럼은 못 된다.
인터넷으로 다운로드 받아 보는 만화는 질감과 후각이 결여되어 있다(청각은 예외인데, 요즘에는 화면상으로 페이지를 넘기면 책장 넘어가는 소리까지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책'이라는 물성(物性)이 결여되어 있다. 나는 소리굽쇠로 기타 줄을 맞추는 아날로그맨인지라 이런 물성에 집착한다.
아무래도 <도토리의 집>을 다시 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외피나 형식에 너무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공CD에 구워 넣은 MP3의 다발들은 왠지 아우라가 떨어진다. 비록 선물 포장지를 곱게 풀지 않고 북북 찢어 버리는, 실속주의자(?)인 나(我)이지만, 역시나 외피가 허접한 문화상품('상품'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어쨌든)의 경우 매력의 반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백결 선생처럼 누더기를 걸친 수지나 고아라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시 생각해 보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누더기의 고아라는 그래도 여전히 곱디 고아라…아니, 외피가 아예 없더라도……
아, 그만하자.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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