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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문화적 공기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 폼나는 멘트 때문에 잠시 허영에 빠져 무심코 서점에서 집어 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저서<논리철학논고>는 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인간의 인내력을 시험한다.

 

1.세계는 사례인 것 모두이다.
1.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겉 페이지를 보고 '살까?'했던 마음이 '말자'로 바뀌는데는 단 5초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이 인물의 생애와 그 가족사는 대단히 흥미로워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아는 것만 추리면 대충 다음과 같다.

 

1. 유럽의 소문난 대재벌 집안이었다.
2. 형제 중 3명이 자살했다.
3. 자살한 첫 째 형 한스는 음악의 신동이었다.
4. 네 째 형 파울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였는데, 그의 의뢰로 모리스 라벨은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써주었다.

5. 루트비히와 히틀러와는 린츠의 실업학교 동창인데, 히틀러가 유대인인 루트비히를 질투했던 것이 훗날 유대인 학살의 단초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6. 루트비히는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 입대했고(우리나라의 갑질하는 재벌 2세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29세 때 전쟁터에서 <논리철학논고(이하 '논고'로 통칭)>를 완성했다.
7. <논고> 출판 직후, 2500년 서구 철학의 문제들을 '해소'했다고 자평한 뒤 교수직도 마다한 채 시골로 가서 초등학교 교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막대한 유산은 누이에게 거의 양도했다.
8. <논고>의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고 다시 철학계로 컴백하여 <철학적 탐구>를 썼다. 그렇다고 철학이 일종의 '헛소리'라는 주장을 철회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철학을 개박살낸(?) 인류 최초(?)의 철학자로 남았다.

 

대박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레이 몽크 교수가 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천재의 의무>라는 제목의 평전을 읽는데, <논고>와는 달리 첫 장부터 흥미진진하다. 한가지만 소개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할머니인) 파니의 사촌 중 한 사람이 유명한 바이올린의 대가 요제프 요하임이었는데(...) 요하임이 12살 때 루트비히의 조부 헤르만이 그를 양자로 들여 펠릭스 멘델스존에게 보내 배우게 했다. 그 작곡가가 소년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헤르만 비트겐슈타인은 "당신이 호흡하는 공기를 그 아이가 함께 호흡하도록만 해주십시오!"라고 답했다.
요하임을 통해 비트겐슈타인가(家)는 요하네스 브람스에게 소개되었는데, 이 음악가와의 우정을 무엇보다 귀중하게 여겼다. 브람스는 헤르만과 파니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후에는 비트겐슈타인가가 주관하는 저녁 음악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클라리넷 4중주가 비트겐슈타인가의 저택에서 초연되기도 했다.
이러한 것이 비트겐슈타인가의 사람들이 호흡한 공기ㅡ문화적 성취와 존경받는 분위기ㅡ였다.

 

 

 

어느 지인 분의 말이 생각난다. 자신의 딸이 비록 공부를 썩 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학이라는 '공기'를 느껴보게 하고는 싶다는. 동감했다. 비록 전공 공부는 뒷전일지라도 그곳의 '공기'에 큰 영향을 받고 성장할 가능성은 있을 거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사람의 얼굴이 총에 맞으면 얼마나 참혹해지는지를 대학의 5.18 사진전을 통해 보았고, 사람이 익사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고문사한 어느 운동권 학생의 사체 사진을 보고 알았다. 당시의 이런 공기가 없었다면 나는 일베 따위나 최소한 가문(?)의 세계관에 동조하는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음악 동아리는 어떠했나. 실력은 아마추어일지라도 적어도 음악과 클래식기타를 접하는 선배들의 마음가짐 하나는 완전히 프로페셔널 그 자체였다(때로는 너무 지나친 나머지 영화음악 '따위는' 연주하지도 못하게 했지만). 그런 공기를 마시면서 나는 위대한(위가 큰. 다시 말해 과도한 음주로 위가 비대해진) 딴따라가 되기 위한 초석을 다졌다. '연주회 100일 전부터 밤마다 술 마시기.' 하루도 안 빼먹고 밤마다 술을 퍼마셨다

 

는 건 순 뻥이고, 일주일에 4일은 마셨다. "술을 알아야 음악을 아는 거야." 한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빈 술병이 쌓여갔다. 동방의 빈 소주병들은 윗층에 있었던 총학생회의 한 친구가 수거해 감으로써 민주화에 미약하게나마 일조하기도 했다(전경 출신 분들에겐 참으로 죄송).
입학 후 처음 마셨던 술은 폭탄주였다. 선배들이 비싼 맥주 값을 아낀다며 우리 몰래 맥주에 소주를 섞은 거다. 우리 신입생들 중에서는 마시자마자 그것을 간파한, 아주 성숙한 친구도 있었더랬다. 나는 원래 그런 맛인줄 알고 마구 퍼마셨고, 결국 떡이 되어 업혀갔다. 한 절친은 다음 날 아침에 방바닥을 체내 물감으로 물들였고, 그렇게 잭슨 폴록 저리 가라는 미술 작품을 남겼다.
나중에는 생수통에 경월 소주를 들이부은 후 틈 날 때마다 따라마시는 선배님도 보았다.

 

 

 

 

"숙취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위험한 독재자가 될 수 없다"는 글도 있다던데, 내 생각엔 그 '독재자'란 정치적 독재자가 아닌 자기 몸의 독재자가 아닌가 싶다.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젊은 날의 한 때다. 윗 글과 달리 그 시절에는 아무리 숙취를 경험해도 결국 자기 몸에 관한 한 대개 독재자가 된다.
2008년, 새벽에 심한 위염에 밤잠을 설쳤다. 동이 트자마자 병원에 갔고 입원을 했다. 젊은 의사들이 엑스레이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얼마 후, 나이가 지긋이 들어보이는 한 의사 쌤이 왔다. 엑스레이 사진을 한참 들여다본 후 내게 이렇게 말했다. "혹시 술을 좋아하세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이렇게 말했다. "오래 사시려면 이제는 그만 드셔야겠습니다."

그럼에도 진단 결과는 위염이 아닌 충수염. 그런데 왜 맹장이 아닌 위가 아팠던 거냐고 묻자 의사가 답하기를, 간혹 위가 맹장 대신 아파해주는(?) 환자들이 있단다. 다만 그 의사 쌤은 맹장보다는 위장의 상태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위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다. 다만 엑스레이에 찍힌 위장이 온통 허여멀겋다며 무조건 술을 끊으라고만 했다. 하늘이 와르르 무너졌다. 독재자가 되어 내 몸을 아무렇게나 굴리고 다닌 대가였다. 그날 이후 내 삶에서 소주를 완전히 떠나보냈다.
이제는 누구든 공감할 거다.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음주예찬의 공기…
 

 

 

졸업 후 몇년 후에 동아리 OB모임을 가졌다.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음악이나 기타에 관한 얘기는 그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는 거다. 기억나는 소재는 대충 연봉이나 전세값, 혹은 주가에 관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생계에 쫓기다보면 음악이 생의 전부이기는커녕 반의 반도 안 된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한 친구의 사살. "기타 줄이 몇 개였더라?" 이어지는 한 후배의 확인 사살. "아직도 기타를 치는 사람이 있단 말야?"

 

금에 나의 '공기'를 생각한다. 특별히 음악이 관련된 공간을 찾지 않는 한, 나의 주변은 음악적 '공기'와는 무관하다. 일 년에 평균 12번 외출하는 생활이다 보니 음악인들을 만날 일도 그다지 많지 않다. 아주 일부를 제외하면 친구를 만나도, 동아리 모임을 가도 음악적 '공기'는 희박하다. 클래식기타 동아리에서 소르나 타레가가 망각된 것은 이미 오래전 얘기다. 물론 좋은 것을 제대로 전수해 주지 못한 선배들의 잘못이 크다. 아니, 그놈의 밥벌이가 문제다. 주변은 밥벌이의 '공기'로 가득하다. 뭐 어쩔 것인가,하고 체념하면서도 과거의 그 음악적 '공기' 속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때로는 간절하다(이런 게 철이 덜 든, 그러니까 나이값을 못하는 증거라면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이여, 시장으로부터 사라져라!"라고 어떤 철인이 말했다. 보다 높지 않은 나는 여전히 시장 속에서 살고 있다.

 

'일단 공기를 바꿔야 해…예전처럼 음악이 생의 2/3는 되었던 공간과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를 확보해야만 해.' 몇 번이고 이렇게 다짐하다가 견고하고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이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얘기를 꺼낼 순간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할아버지가 멘델스존에게 한 말은 훗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에서 그의 학생 중 한 사람이었던 모리스 드루어리에게 학교를 떠나라고 할 때 비슷하게 되풀이 되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드루어리에게 "케임브리지에는 너를 위한 산소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드루어리가 공기가 더 좋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을 하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케임브리지에 남기로 한 자신의 결정에 관해서 말할 때 할아버지가 지어낸 비유는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바뀌었다. 그는 드루어리에게 "나에겐 상관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공기를 스스로 제조하니까"라고 말했다.

 

 

 

 

                                                    Ludwig Wittgenstein(1889~1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