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십 년 만에 다시 본 영화, <길(La strada)>.
어렸을 때 본 영화들 중에 가장 기억나는 영화는 1940년에 제작된 존 포드 감독의 <분노의 포도>와 1954에 제작된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길>이다.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거지 같은 운송수단(폐차 직전의 트럭과 수레를 매단 오토바이)으로 길을 떠난다는 거다.
물론 이 생계를 위한 유랑에 낭만적인 요소가 끼어들 틈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철이 안 들었던 탓이었겠지만) 어렸을 때는 이런 동가식서가숙의 삶이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꽤나 근사하게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과거에 계몽사에서 출판한 <소년소녀세계명작동화> 전집 중 가장 재미있게 본 작품은 토베 얀슨의 <즐거운 무우민네>와 월터 브룩스의 <오렌지꽃 피는 나라>였다. 이 두 작품의 주인공들 역시 길을 떠난다. <즐거운 무우민네>의 경우 무민들이 대체로 여행과 모험을 즐기지만 역시 유랑을 밥먹듯이 하는 방랑자 캐릭터는 허수아비처럼 생긴 스너프킨이다. <오렌지꽃 피는 나라>는 농장의 동물들 전부가 따뜻한 고장(플로리다)을 찾아 길을 떠난다. 이 작품의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었을 때는 사람이 무서워 탈주를 하지 못하고 농장 안에서 착취를 감내한 채 정주하는 동물들과 자꾸만 비교가 되었다.
제일 재미있게 본 명량만화는 윤승운의 <두심이 표류기>와 길창덕의 <신판 보물섬>이었다. 이 만화의 주인공들 역시 어디론가 떠난다. 전자는 뗏목을 타고, 후자는 드럼통을 개조해서 만든 비행기를 타고.
'두심이의 뗏목'하니까 생각나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 초딩 시절, 뗏목을 타고 미시시피 강을 유유히 유람하는 헉 핀과 짐을 부러워하여 한강 도하용 뗏목을 만드려는 계획을 거창하게 세웠다가 제작 지식과 기술의 부족으로 포기한 적이 있다(나만 그랬나? 아닐 거다).
사춘기 때는 한 친구의 '강추'에 의해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를 읽었다. 이후에 읽은 <피터 카멘친트>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등도 그렇지만, 그의 작품은 확실히 유랑이 메인테마처럼 자주 등장한다.
어쨌거나 <크눌프>는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볼 때마다 무위의 삶에 대한 애틋함 때문에 안습이다.
그리고 또 생각나는 영화. '시체 찾아 삼만 리'의 <스탠 바이 미>와 죽기 직전의 탈주를 그린 <노킹온헤븐스도어>.....
끝도 없다. 일단 여기까지.
대학가요제 노래들 중에서는 김학래/임철우의 1979년 제 3회 MBC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인 <내가>를 제일 좋아하여 통기타 치면서 자주 부르곤 했다. "내가 말 없는 방랑자라면, 이 세상의 돌이 되겠소. 내가 님 찾는 떠돌이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겠소."
이랬던 내가 작금에는 정주도 부족하여 아예 '방콕맨'이 되었다. 여름 피서는 언제 떠났는지 기억도 안 난다. 대신 "피서를 왜 가? 방구석에서 에어컨 틀어놓으면 그게 최곤데?"라는 말을 자주 했던 기억은 있다.
올해는 그나마 이사 이후에 손님을 맞느라 외출이 잦았지만, 작년에는 1년동안의 외출이 10번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제였더라....머리가 피가 마른 이후인 1994년ㅡ그러니까 월드컵에서 한국이 독일에게 2:3으로 졌지만 나름 선전했던 그해 여름에 2박3일간의 '나 홀로 여행'을 통해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걸 동해 묵호항에서 깨쳤다. 픽션은 날소리를 매끄럽게 포장하는 일종의 '리버브'다....머리에 피가 마른 이후에는 그렇게 생각한다.
근래에 본 <봉고차 월든>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더 이상 학자금 대출이라는 압력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한 대학원생이 낡은 봉고차에서 숙식한다는 내용이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라면 이 개고생에도 낭만의 색채를 덧씌웠을 것임에 틀림없겠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카섹이나 상상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허클베리핀의 모험>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나는 나머지 사람들보다 앞서 인디언 부락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셀리 아줌마가 나를 양자로 삼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 하고 있고, 나는 그 일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일이라면 전에도 한번 해 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 일('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유랑과 모험이 아닌 정주와 안일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째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타성의 영원회귀(무한반복).
그러면서 인생은 '원래' 따분한 거라고 씨부려 싸고 있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를 아직 못 봤다. 내일은 이거나 읽으며 대리만족이나 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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