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각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일상의 삶에 대해 그렇지 않은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다."
철학자 김용석의 말이다. 아마 그다지 참신한 견해는 아닐 거다. 조직적인 컨닝의 결과 이름이 '나체' 혹은 '누드'로 바뀐 한 철인은 전자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 군상을 일러 '시장의 파리'로 일축한 바 있으니까.
김용석의 말에서 '철학'의 자리에 '예술'을 넣어도 무방할 거다.
약 2400년 전의 한 철인은 "(인생의) 행위 전체는 필요한 것과 유용한 것을 지향하는 행위와 아름다운 것을 지향하는 행위로 나누어진다"고 했단다. 그가 '유용한 것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파리떼로 치부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유용한 것'에 대비되는 것으로 '아름다운 것'을 자리매김 했다는 것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동성연애로 옥고까지 치른 바 있는 19세기의 한 영국 작가는 자신의 작품의 서문에 "모든 예술은 완전히 무익하다"고 썼는데, '아름다운 것', 즉 예술이 무익, 무용하다는 이 견해가 그다지 새롭지 않은 것은 성장 과정에서 늘상 들어온 말이기 때문일 거다. 그놈의 기타를 뚱땅거리면 밥이 나와, 돈이 나와?
춘정이 삭지도 않아 사계절 동안 발동하는 20대 시절에는 그깟 밥과 돈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저 유명한 도덕 근본주의자 톨스토이 조차도 젊은 시절에는 그 욕망과 싸움을 벌였(으나 결국 하녀를 건드리고 말았)노라고 고백한 바 있으니까. 발기충천의 이런 상태를 잘 파악하고 음악의 '작업'적 효용을 과장하고 있었던 친구들은 항상 여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의 연주력을 과장하기 일쑤였고, 실제로 그녀들 앞에서 시연을 시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으니....여자들이 속옷을 무대 위로 벗어 던지는 일은 프란츠 리스트나 60년대의 클리프 리처드 정도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지, 소위 '듣보잡'에게는 언감생심이라는 걸. 고로 동성연애자 작가의 말을 살짝 비틀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어떤 예술은 ('작업'에 있어) 완전히 무익하다."
당시에 한 친구는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한 적도 있다. "야, 어제 영화를 보니까 남자 쥔공이 여자 앞에서 기타를 친 다음에 곧바로 자빠뜨리던데? 넌 좋겠다." 그는 비주얼을 간과했다. 나는 한마디 했(을 것이)다.
"닥쳐."
자빠뜨리기는 커녕, 외려 직업이 불투명하다는 딴따라라는 이유로 차여서 내가 자빠지기를 수 차례. 제일 충격적인 거부의 멘트는 이랬다. "악기 연주하신다고 했죠? 그리고 레슨도 하시고...그래서인지 뭐랄까, 선생님 냄새가 난달까요. 안 됐지만 저는..." 이런 썅, 내가 어쨌길래? 며칠 후 소개팅 주선자로부터의 전언은 이랬다. "다 좋은데 네가 하는 하는 일이 좀..."
물론 '다 좋은데'라는 말은 '다테마에'이고, '하는 일이 좀...'이라는 말은 '혼네'임에는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이런 일도 있다. 클럽에서 알게 된 미모의 여성과 두 번째 만나러 가는 도중에, 전철 안에서 진지하게 턱걸이를 하시는 약간은 돈 아저씨를 보고 속으로 웃었다. 그녀와 만난 후 그 얘기를 꺼냈더니 대번에 한다는 얘기가,
"차 없으세요?"
그 직후의 썰렁함에 대해서는 일축한다.
나는 지금으로서는 이름도 얼굴도 (그리고 몸의 윤곽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를 솔직함과 직설적 대범함을 갖춘 여인으로 추억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시장의 파리들'에 대한 반감ㅡ을 넘어서는 적대감은 아마 반복되는 이런 경험에 대한 나름의 방어 매커니즘, 혹은 분노에 기인한 역공이었을 거다.
그리고 만남의 의미를 외모로 한정하는 한, 자신이 자빠질 확률은 증가한다는 것을 간파하기에는 당시의 내가 지나치게 탐미적이었다는 것.
늘 똥구멍으로만 먹을 줄 알았던 나이를 제대로 입으로 먹게 되자(다시 말해 어느 정도 욕망이 해소되자)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 특히 여자들을 전부 싸잡아 시장의 똥파리라고 치부하게 되지는 않았다. 탐욕이 아닌 숨겨진 다른 원인, 혹은 어쩔 수 없는 그들만의 사정을 알 나이는 되었으니까. 게다가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자아 실현을 과장되게 강조하여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된 삶이라고 주장하는 건 자아 실현과는 거리가 있는 일, 다시 말해 생계를 위해 '제 본성에 맞지 않는 일들'을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일일는지도 모른다. 노예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전히 사유하는데 삶을 바치고 지속적으로 저술을 할 수 있었을까? 하인들의 노고가 없었더라면 바흐가 1,000 곡의 음악들을 작곡할 수 있었을까? 문명이란 수 많은 사람들의 비(非)실존적인 노동 위에 세워진 일종의 위령탑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장'만을 맹목적으로 쫒는 진짜 독파리들ㅡ자식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여 부의 과도한 축적을 위한 교육과 직업을 강요하는 물신화된 학부형들이나, 배금주의적 관점으로 '무용한 것'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을 멸시하는 이들을 보게 되면 콧털 철인의 말을 되새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나의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도망쳐라! 그대는 보잘 것 없고 비루한 것들과 너무나도 가까이 살고 있었다.(중략)...더 이상 그들을 향해 팔을 쳐들지 마라!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파리채가 되는 것이 그대의 운명은 아니다.(중략)...나는 그대가 독파리에 의해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그대가 온몸에 상처를 입어 피흘리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럼에도 그대의 긍지는 화조차 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동성애자 작가의 말씀,
"...무익한 것을 만드는 것은 본인이 그것을 열렬히 칭찬하는 한에서만 용서된다."
'그것을 열렬히 칭찬하는' 것을 아마도 '긍지'라고 할 테다.
긍지는 화조차 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단순하고 소박한 자부심을 갖고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거부하고 믿지 않는다 해도,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분노하지 않고 자기 삶이 끝날 때까지 조금도 흔들리거나 이탈됨이 없이 나아갈 것이다."
ㅡ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