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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반면교사 이야기

 

 

 

 봄이 되면 간혹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교사(校舍)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음악실, 교회 예배당의 것과 똑같이 생긴 벤치, 조용한 학생들, 그리고 학생들로부터 등을 돌린 채 <소녀의 기도>와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는 젊은 여선생님. 지금은 식상한 음악들이 되어버렸지만, 당시에는 격자모양의 창 안으로 스미는 따스한 봄날의 햇살과 잘 어우러져 듣기에 좋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피아노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다만 이 따뜻한 풍경은 그녀가 피아노를 떠나는 순간 대개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는데, 그녀의 까칠한 성격이 원인이었다. 그녀에 대한 이미지는 대충 이렇다. 히스테리, 신경질, 화풀이, 불만, 애정결핍. 내가 이렇게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히스테릭한 손버릇과 냉소 때문이었다.

 

 지금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비교적 친했던 급우 W는 칠판 앞으로 불려 나갔고, 연타의 따귀를 맞았다. 확실한 건 그가 연타를 감내할 정도의 큰 잘못―예컨대 반항을 했다거나 성희롱을 했다든지 하는―을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거다. 이처럼 학생들은 종종 일부 교사들의 사적인 욕구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두더쥐'로 전락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연타를 맞은 W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물론 통증 때문은 아니었으리라. 자신의 잘못에 비해 가중처벌을 받게 된 것에 대한 억울함의 표현이었을 것이고, 제발 그만 때리라는 무언의 하소연이었을 거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 눈물은 사디즘의 불씨를 식히는 물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불꽃을 피우는 기름이 되어 버렸으니.


 “어쭈? 울어?” 그녀는 한심하다는 비웃음을 날리며 W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몇 번인가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울음이 그치지 않자 마치 수도꼭지를 잠그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의 코를 인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넣고는 한껏 비틀어 재꼈다. 그때였다. 꽉 눌린 그의 비좁은 콧구멍 사이에서 뭔가가 분출할 기미를 보이더니, 결국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그의 코에서 손을 떼었지만, 그 둘은 결코 분리되지 않았다. 점도가 제법 높아 보이는 점액질의 그 무언가가 W의 코와 그녀의 손가락을 마치 줄다리처럼 연결해 놓은 거다. 딱 벌어진 입으로 난감함과 경멸감을 표현하던 그녀의 표정은 아직도 선연하다. 더불어 소리 죽여 키득거리던 몇몇 급우들의 웃음도.

 

 중요한 건 아주 오래전의 일임에도 그날의 일이 명료하게 떠오른다는 사실이다. 부당하다고 밖에는 말하지 못할 과잉의 체벌은 폭력에 다름 아니고, 폭력은 어린 학생의 마음에 명료한 낙인을 찍는다. 그 낙인은 세월에 마멸될 일도 거의 없는 것 같다.

 

 

 

 

 초등학생 시절에 대머리에 검은 코트를 자주 입고 다녔던, 마치 수사를 연상시키는 50대 중후반의 한 남자 선생이 있었다. 짐작컨대 그에게도 교육철학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아마도 엄벌주의가 아니었을지 싶다. 단지 문제가 있었다면 꽤 자주 체벌에 감정이 과하게 개입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체벌의 대상이 저지른 잘못을 훨씬 능가하는 과도한 체벌을 행사하였다는 것. 그리고 체벌의 대상은 반항적인 질풍노도의 시기가 멀기만 했던 순종적인 초등학생들이어서, 굴종 이외에는 그 어떤 선택도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

 

 우리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속된 말로 찍히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다(이것이 그가 의도했던 훈육의 결과였을지도). 그러나 아니 뗀 굴뚝에 나는 연기처럼 그의 불똥은 발화의 원인이 모호하기만 해서 간혹 그것은 외부였던 우리들에게서가 아니라 그의 내부에서 비롯되었던 건 아니었을까, 지금은 이렇게 추측할 뿐이다. 어쩌면 심인성 발기 부전에 따른….

 

 그가 내게 최초로 남긴 낙인의 형식은 모욕이었다. 햇살이 따스하던 어느 날, 그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교실에 컵이 부족하다. 누구 컵 좀 가지고 올 사람 없나?” 몇몇 아이들이 손을 들었고, 그걸 지켜 본 나 역시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조용히 손을 들었다. 아마도 손 든 이들의 이타적 행위에 동참하고픈 욕망―이라기보다는 이타적 행위자처럼 보이고 싶었던 욕망―과, 권력자의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심리적인 보상을 얻고자 했던 계산이 적당히 버무려진 결과였으리라. 무엇보다 손을 든 많은 학생들 중에 내가 지목될 확률은, 주사위를 굴려 1의 눈이 나올 확률보다는 적었다는 심리적 안도감도 한몫을 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즉, 나의 거수(擧手) 행위는 실제로 컵을 가져오겠다는 이타적 의지의 발로라기보다는 권력자를 향한 자발적 복종의 의사표시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면 옳다.

 

 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면, 나의 위치가 그 권력자로부터 가장 가까웠다는 점이었다. 가끔 물리적 거리는 확률의 논리를 무색하게 한다. 왜냐하면 가까운 대상을 지시하는 것은 거리에 따르는 방향의 오차가 거의 없어서, 집게손가락이 멀리 떨어져 있는 복수의 학생들 중 한 명을 모호하게 지목하는 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손가락은 정확히 근거리에 있는 나를 지목하였고, 따라서 그 손가락이 지목하는 건 나 아닌 다른 급우일 수도 있다는 오차가 있을 수도 없었다. 그때에도 이런 말을 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충 이런 심정이었을 거다.

‘아, X됐다…….’

 

 

 

 

 

  다음날, 부엌의 찬장 안에 있었던 몇 개의 컵을 챙기는 도중 엄마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학부모라면 당연히 살림의 감소와 뇌물로 인한 특혜 사이에서 그 득실을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을 거다. 유감스럽게도 저울추는 살림의 감소 쪽으로 기울어졌고, 나의 처지만 곤란하게 되어버렸다. “선생님한테 갖고 간다고 말해놨는데 어떻게 해!” 나는 떼를 썼고, 그 결과 달랑 하나의 컵만이 허용 되었다.

 

 “이게 뭐야?” 권력자가 급우들 앞에서 말했다. “누가 달랑 하나만 가지고 오랬어?”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가 가지고 온 유리컵에 입을 박았고, 입김을 불어넣으며 컵 표면을 하얗게 만들었다. 마치 권력자의 공개적 망신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만의 장난이라도 치겠다는 듯이.

 그는 급우들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한 개 가져올 바엔 뭐 하러 가져왔어? 이 개노무시캬(개놈의 새끼야)!" 이렇게 나는 'son of bitch'가 되었고, 엄마는 컵을 달랑 한 개만 내줬다는 이유로 '암캐'가 되어버렸다. "장난하는 거냐? 응?” 이어지는 아이들의 키득거림.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전 그냥…한 개 가져오라는 줄 알고….” 물론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이 얘기는 그저 묵묵부답의 무례를 회피하려는 무의미한 답변에 불과했다.

 

 반어적인 제목의 <스승의 은혜>라는 공포영화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5월8일, ‘스승의 날’에 학생들은 저마다 준비해온 선물들을 담임선생에게 바친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가져온 사용/교환가치가 없는 선물을 아이들 면전에서 집어던져버린 담임선생님. 심한 모멸감을 받는 아이. 그리고 웃는 아이들.

 

 이 장면을 봤을 때, 왜 그 권력자가 생각이 났던 것일까?

 그리고, 이 영화의 대본은 왜 쓰인 것일까?

 

 

  

 

 

 12월 초, 날씨가 꽁꽁 얼어붙었던 어느 날인가, 우리는 그의 지시에 따라 교실 청소를 하였다. 청소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가 교실로 들어오며 이렇게 말했다.

“야, 이 새끼들아. 이게 청소 한 거야?” 그리고는 대걸레를 빤 탓에 검은 구정물이 가득 들어있던 양동이를 배 높이까지 들어 올리고는, 그것을 기울여 교실 바닥에 구정물을 모두 쏟았다. 바닥은 흥건해졌고, 그는 몇몇 아이를 지목하더니(여자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걸레 말고 손걸레로 바닥에 쏟아진 구정물을 훔칠 것을 명했다. 다른 아이에게는 양동이에 깨끗한 물을 담아오도록 했다. 손걸레로 바닥을 훔친 아이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깨끗한 물에 걸레를 담가 헹군 후, 손으로 직접 물기를 짰다. 때는 12월이었고, 영하의 날씨였다. 양동이의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아이들은 맨손이었다. 아이들의 손은 빨갛게 얼어있었다. “꼭꼭 짜! 걸레에 물 한 방울도 남김없이 꼭꼭 짠 다음에 닦으란 말이야!” 그는 이런 식으로 우리들에게 청소하는 법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그의 모든 행동과 언행은 내 마음속(혹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낙인으로 선명하게 남았다. 이후 성장하면서 비열한 꼰대들을 볼 때마다 그가 생각났다. 

 어디 나뿐이랴. 누구나 그렇듯이 내게도 과거의 학교의 공인된 반면교사들이 저지른 온갖 패악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아래의 리뷰들을 보라). 실내화를 실수로 가져오지 못한 초등학교 2학년 여학생을 교실 앞에 세운 다음 입에 신발을 물린 채 공개 망신을 준 일, 다투었다는 이유로 두 학생이 서로에게 가한 폭력을 훨씬 능가하는 ‘사랑의 구타’를 행사한 일, ‘두뇌 개발’이라는 명분하에 방학숙제로 값비싼 프라모델 조립을 명한 다음에 수거 후 되돌려 주지 않은 일, 학교에서 정한 아침 7시 30분 등교 원칙을 담임선생이 자의적으로 7시로 바꾼 후 지각한 학생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한 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경우를 상상해보자. 15분 지각한 A씨가 상사 B로부터 수차례의 구타를 당했다. 폭행죄로 고발한 A에게 맞대응하기 위해 B는 ‘지각죄’로 고소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 폭력은 형사고발의 사유가 되지만 지각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는 것조차 구차할 정도로 너무나 지당한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선생들께서는 대체 어떤 윤리적, 사법적 근거로 지각한 학생들에게 그리도 과도한 폭력을 행사했던 것일까? 상식을 초월하는 그런 행위에 꼰대의 논리 이외에 그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꼰대의 논리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왜 이리 많을까? 지금과 달리 왜 그 옛날에는 폭력의 주체가 학생들인 경우보다 선생들이었던 경우가 더 많았던 걸까? 어떻게 ‘귀싸대기 후리기’와 도덕 교육이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있었던 걸까?

 

 (카메라/동영상 기능을 갖춘) 핸드폰이 당시에는 아예 없어서?

 

 교사도 사람인지라 온갖 잡무와 문제 학생들, 그리고 거들먹거리는 학부형들에게 치이다 보면 어쩌다 물리적 체벌을 가하게 될 수도 있지만 내게 인각된 건 그렇게 인간적으로 이해할만한 범주의 것들이 아닌, 권위적이고 가학적이며 습관화된 폭력에 관한 것들이다. 훈육이라는 미덕의 이름으로 개인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회를 보장받은 이들의.

 
아이들은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다. 특히 부당하게 과도한 폭력의 기억에 대해서는 그 명료함이 세월에 풍화되어 아스라하게 되는 일도 없다. 그렇게 폭력은 어린 아이의 영혼에 남기는 낙인이 된다. 영화 <스승의 은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선생님에게 저는 수많은 학생 중에 한명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선생님의 사소한 매니큐어 색까지 모두 기억한다구요….”

 

 하물며 부당한 폭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

 

 ‘정도의 차이나 모양의 차이를 떠나 모든 체벌 행위는 폭력의 문제 이전에 삶을 바라보는 자세의 문제’라고 강수돌 교수는 말한 바 있다. 사회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높은 자가 아랫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강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꼰대들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 많다.

 

 

 

 

 

 

자아(Self)라는 말은 보통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 즉 우리의 개성에서 'me'를 가리킨다. 그것은 발달하는 동안에, 그리고 평생에 걸쳐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상들에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부모나 교사들은 우리가 멍청하다거나 똑똑하다고, 잘 생겼거나 못 생겼다고, 게으르거나 활기차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의 자기 이미지의 기초가 된다.
                                           

                                         -리처드 래저너스·버니스 래저너스 저 <감정과 이성>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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