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노래 한 곡 듣고.
간만에 동네의 헌책방에 가니 이런 제목의 책이 있다. '춘천, 마음으로 찍은 풍경.' 몇 장을 넘기다가 살까 말까 고민한 뒤, '5,000원 이하면 사고 그 이상이면 안 산다'고 결심한다. 책 뒷장의 견출지에 적혀있는 가격을 보니 6,000원. 다른 책을 산 뒤에 집에 돌아오니 후회가 든다. 결국 다음날 다시 찾아가서 구입. 돈 1,000원에 이리 갈팡질팡해서야 어디....
춘천은 고향도 아니고 언제 적을 둔 학교나 직장도 없는 곳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책을 사게 된 걸까? 정작 태어난 장소에는 노스텔지어를 느끼지 못하면서 춘천에서는 그것을 강하게 느끼는 건지. 이런 것도 일종의 도착(倒錯)일까?
춘천이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만 눈 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깨 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 꽃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이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지
-유안진,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중에서
왜 춘천은 향수를 자극하는 걸까? 물론 봄날의 경춘가도는 사람을 홀린다. 여름날의 소양호와 인근 청평사에서의 추억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경치 좋고 추억이 있는 곳은 춘천 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사진작가 박진호의 말대로 "춘천은 강력한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마치 봄(春)의 기운으로 얼었던 시내(川)를 녹이듯이. 그러고 보니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온다'는 표현보다 적절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춘천은 매력적인 도시다. 적어도 기억 속의 춘천은 그랬다.
강영숙 작가의 <라이팅 클럽>에는 간만에 서울의 계동을 찾은 주인공의 감회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해가 바뀌자마자 나는 김 작가와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다시 계동으로 갔다. 계동길로 바로 들어가지 못한 채 풍문여고, 덕성여고가 있는 감고당길 주변을 맴돌다가 삼청동길로 접어들었다. 삼청동 앞길은 카페와 옷가게, 액세서리와 소품들을 파는 상업 지역으로 변해 있었다. 서울 시내에 있으면서도 변방인 것만 같던 그 옛날의 고적함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춘천의 모습은 이랬다. '시내에 있으면서도 변방인 것만 같던 그 옛날의 고적함'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혹은 고풍스러운 그 무엇.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를 춘천으로 택한 건 어쩌면 이런 이유가 아닐지.
마지막으로 가 본 게 시베리안 허스키 강아지를 분양받으러 간 2008년 초겨울. 그러나 그때는 강아지 데리고 오느라 제대로 춘천 구경을 못했다. 아직도 그 옛날의 고적함은 잘 보존되어 있을까? 어쩐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삽질 천국 공구리 천지인 수퍼 울트라급 하이퍼 토건 국가 대한민국에서는.
근데 난 이 드라마만 보면 왠지 손발이 오그라든다......
춘천,하면 역시 남이섬을 빼고 얘기 할 수는 없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알려진 남이섬은 이 드라마로 인해 특수를 누렸다지만, 나는 이 드라마에 별반 관심이 없어서인지 그보다는 어렸을 때 '계몽사 소년소녀전기전집'을 통해 본 남이 장군 얘기가 먼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남이 장군은 여러 공적을 세워 28세 때 병조판서의 자리에 오른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고나 할까. 한 마디로 벼락출세한 거다. 그러나 모사꾼 유자광의 밀고에 의한 누명으로 인해(요즘 말로 국가전복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혀) 사형선고를 받고 만다. 다음의 한시(漢詩)가 국가전복세력이라는 증거 중 하나라나 뭐라나.
백두산의 숱한 돌,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푸른 물은 말을 먹여 잦아졌도다.
사나이 스무 살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할진대
뒷세상에 그 누가 대장부라 이르랴.
고문에 의한 자백을 강요받았을 때 강순(康純)이라는 정승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계몽사 소년소녀위인전기전집에 의하면), 남이 장군은 그의 침묵에 자신에 대한 변호에의 의지가 없음을 알고 속으로 격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강순 대감은 적어도 내가 역모를 꾸미지 아니한 것은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데, 어째서 저 자는 나를 위해 변호를 해 주지 않는다는 말인가?’
(한데, 어째서 전기의 저자는 남이 장군의 속마음까지 어찌 이렇게 잘 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남이 장군은 역모의 공모자를 대라는 강요에 고문을 못 이기는 척, 허위진술을 하고 만다.
“전하....이실직고 하겠나이다....소인은 저기 있는 강순 대감과 역모를.....”
형장으로 향하는 함거(轞車 : 죄인 호송용 수레) 안에서 그 둘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강순 : "그대는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기에 어찌하여 나를 모함하시오?"
남이 : "원통한 것은 그대나 나나 마찬가지이오. 대감께서 영의정으로 있으시면서, 그리고 나의 무고(無辜)함을 아시면서도 구해주려하지 않으셨으니 죽어 마땅한 일이 아니겠소? "
(근데 대체 어느 위인이 함거 안 두 사람의 대화를 이리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역시 작가 줄리언 반스의 말마따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일지도 모르겠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지만, 남이 장군만큼 이렇게 극적인 경우가 또 있을까? 황제에서 죄수로 퇴락한 나폴레옹도 저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당시 조선의 법률상 역모죄에 해당되는 처벌은 거열형(車裂刑)이었으니까, 아마도 사육신들처럼.....
남이 장군의 묘가 있는 남이섬은 원래 불모지였단다. 그것을 1965년에 수재 민병도 선생이 매입해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거라고. 역사의 잿빛 비극이 무지개빛 로맨스로 변모했다고나 할까. 니혼진 아주머니들은 욘사마보다 먼저 민병도 선생께 감사할 일이다. 나도 줄리언 반스처럼 한마디를 남기련다.
"역사는 비참한 기억이 로맨스와 만나는 지점에서 희석되는 망각이다."
강촌역
춘천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명소는 단연 강촌이다. 지금은 자전거길로 유명해졌지만, 그딴 건 없었어도 이미 충분히 로맨틱한 곳이었다. 문득 1994년에 강촌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해 여름 어느날인가, 홀로 여행 한답시고 꼴값을 떤 적이 있었다. 무작정 시외버스를 타고 갔던 곳이 동해시. 처음 계획은 이랬다. 동해 바다 아무 곳이나 도착한 뒤, 해변을 따라 무작정 남쪽으로 걷는다. 며칠이 걸리든 무작정 걷는다. 보헤미안처럼 걷는다. 걷다 지치면 민박집에 들어가 끼니도 때우고 똥도 싸고 잠도 잔다. 아침이 되면 다시 길을 떠난다. 또 무작정 해변을 따라 걷는다....그러다 보면 언젠가 지도에서 본 돌출된 곳(포항의 호미곳)에 다다르게 되리라....
오 마이 갓. 얼마나 황당한 생각인가. 그 옛날에 누군가와 당구를 치다가 진 적이 있다. 대략 2만원 정도의 게임비를 물고 나니 집에 갈 택시비가 없는 거다. "저기....제가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요...집에 가게 택시비 좀....." 이럴 수는 없었다. 집에까지 걸어서 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존심은 지키리라, 그렇게 결심하고 새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뚜벅이의 설움을 싣고 가락동에서 천호동까지.
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뚜벅......
'가도 가도 끝 없는 길~♪, 삼만 리~♬.'
길은 길로 이어지고 새벽의 어둠 너머는 어둠. 설움과 치기가 뒤섞인 이상한 감정도 육신의 피로에 이미 메말라 버린지 오래. 결국 나는 완주를 포기하고 올림픽 공원 인근의 벤치에서 대(大)자로 뻗고 만다.
문득 잠이 들다가 눈을 떠보니....얼굴 위로 물방울이 흩어진다. 새벽비에 잠을 깨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집에 도달했을 때는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그랬던 내가,
걸어서 포항까지 가겠다고?
설령 포항까지 갈 수 있는 체력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동해시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무조건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포항에 도달하게 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면 얼마 안 가 해안선에 인접한 바위나 숲으로 둘러싸인 구릉지 따위에 막혀서 어쩔 수 없이 우회를 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우회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숲속에서 길을 잃게 되고, 따라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서쪽으로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엔....동해시 인근의 바닷가에서 망망대해를 좀 바라보다가, 바다낚시 하시는 어르신들에게 소주 한 잔과 고등어회도 한 점 얻어먹다가, 부치지도 않을 편지도 쓰는 꼴값도 좀 떨다가, 지금 봐서는 손발이 오그라들 수밖에 없는 시도 좀 끄적거렸다가....결국엔 적막감과 고적감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는데, 밤이 되자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멜로영화를 찍는 커플들은 어찌나 많은지. 어차피 밤이 더 깊어지면 에로영화나 야동이나 찍을 거면서.
한여름의 바닷가가 '커플천국 솔로지옥의 장'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다음날, 결국 15일 예정의 보헤미안 생활을 청산하고 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청량리 역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밤 11시. 나는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급하게 택시를 잡았고, 동아리의 워크샾 행사가 진행 중인 춘천-정확하게는 강촌-으로 향했다. 고독에 미치자 다수의 인간들이 그리워졌던 거다. 그날 밤, 경춘가도를 180km/hour로 달리는 총알 택시에 합승했던 한 어르신의 목소리와 억양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어유...기자 양반, 거 좀 천천히 갑시다....."
결국 청량리역에서 강촌까지 걸린 시간은 40~45분 정도. 그날의 택시기사 아저씨는 위대한 '이니셜 D'의 선구자이었다. 어쩌면 타쿠미의 천재성이 발화되기 시작한 것도 한국의 총알택시를 경험한 이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오른쪽의 꺼벙하게 예쁘장한 놈이 타쿠미.
글타. 춘천에 대한 기억의 중심에는 항상 강촌이 있다. 동아리 회원들이 머문 민박집은 과거 민주화 운동(어버이'꼰대'연합 회원의 입장에서는 '국가 전복 책동')의 경력이 있었던, 두 명의 은퇴한 운동권 아저씨들이 운영하던 곳. 밤이 되면 동아리 회원들은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술판을 벌였고, 잡담이 깊어갈 무렵엔 이 아저씨들도 은근슬쩍 우리들의 자리에 끼어들었다. 나는 그분들을 위해 몇 곡의 기타 곡을 연주했고, 아저씨들은 그 답례로 우리들에게 춘향가를 들려주었다. 한 분은 창을, 또 한 분은 북으로 추임새를.
"사랑을 하~면은~♪ 얼쑤!"
양악으로 주고, 국악으로 받고. "정말 아름다운 밤이에요." 누군가 대종상의 장미희처럼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그분들의 낡은 갤로퍼 차를 타고 근방의 약수터에 간 적이 있다. 약수터에 도착하자마자 한 여자 후배가 내게 빨간색 플라스틱 바가지를 내밀고는 "선배님이 먼저 드세요."라며 장유유서의 예를 다한다. 그때 나는 웃는 낯짝에 침을 뱉자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말했더라? "네가 만약 사막에서 허덕였다면 그때도 과연 내게 양보했을까?" 이랬었나? 아님 "같이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을 때도 과연 네가 내게 동아줄을 양보할까?" 이랬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었던 우리의 운동권 형님의 말씀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웃으며)참 이상한 분이시네요...."
The weird...............
술을 적당히 먹은 탓인지, 새벽과 아침 사이의 희붐한 때에 평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원두막이라고 해야 할지 모호한 그런 곳에서 일찍 눈을 뜨니(나는 술을 적당히 먹으면 일찍 기상한다) 머리 맡에는 소주병과 기타가 나뒹굴고 있었다. 상쾌한 아침에 기타를 들고 메르츠의 엘레지를 연주하자 한 후배가 부스스한 꼬라지를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청을 해주었다.
사실 그다지 훌륭한 연주도 아니었음에도, 그 후배는 "너무도 아름다운 아침이에요." 따위와 유사한 멘트를 날려주었다. 안타깝게도 그 후배는 남자였다.
그날 낮에는 티브이가 없어서 라디오에 매달렸다. 월드컵 경기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전반전에 우리나라가 독일에게 3골을 먹었고, 후반전에는 2골을 만회했다. 황선홍과 홍명보가 현역 선수였을 때 얘기다. 비록 졌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경기"였다.
목숨 끊어질 정도로 절박했던
사랑도 아픔도 그리움도
숯불 아궁이에 숯꺼멍처럼 잠들고
서른일곱 살에 이 세상 하직하겠다던
내 젊은 날의 고뇌도 갈등도
깊은 몸 속에 침잠되어
깊은 강물이 되고
나는 오늘 그 물길 따라
그냥 떠내려가고 있다
늘 올라가기만을 꿈꾸던 길에서
이젠 내려가는 법도 배워야겠다.
-이 영춘, <강촌연가1> 전문
근래에 재건된 강촌의 역사(驛舍)는 럭셔리해졌다. 좀 뜬다 싶으면 거창하게 뜯어 고치는 거, 일종의 한국병이다. 예전의 구 역사는 폐쇄되었지만, 건물 자체는 철거하지 않고 다른 용도로 전환하여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강촌 같은 역사는 그냥 옛것을 고수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확장 보수가 필연적이었다면 적어도 옛 풍취는 살리는 개/보수였어야 했다고. 고풍(古風)의 미감을 모던의 이름으로 들쑤시는데에는 좀 거부감이 든다.
보통 홀로 떠나는 여행을 단체 여행보다 더 낭만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여행의 주체와 대상을 혼동해서 하는 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홀로 완행 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 (성수기가 지난 탓에) 고요한 바닷가에서 옛 추억을 회상하며 쓸쓸이 모래사장을 거니는 행위의 주체에게는 낭만적이라는 생각보다는 권태나 쓸쓸함이 밀려오기 마련이고, 그걸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로지 그 여행의 주체를 대상으로서 바라보는 제 3자가 아닐까? 마치 영상을 통해 홀로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을 보며 '어머...낭만적이야....'라고 생각(착각)하는 것처럼.
고로 이 역시 줄리언 반스의 말을 빌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솔로 여행은 적적한 기억이 대상화 되는 지점에서 과장되는 낭만이다."
솔로 여행의 본질은 고독함이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혼자 떠난 여행의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생에서의 외로움을 끌어 안을 수 있다.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 그 목소리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 자신이 택한 길의 풍경을 진심으로 만나게 되는 것, 그 풍경의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아주 먼 옛날, 누군가의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
-황 경신, <그림 같은 세상> 중에서
그로부터 5,6년 정도가 지났을 때도 춘천을 갔다. 후배가 그곳의 복지관에서 한의사로 일하게 되었고, 나는 개관 기념식에서 기타 연주를 해주기로 했던 것. 그러나 연착한 나는 연주를 펑크냈고 밥만 축냈다. 이때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미안하다.....
그때 둘러본 춘천 동네의 '그 옛날의 고적함'은 아직도 선연하다. 뭐랄까....70년대의 석축이 있던 동네를 볼 때 생기는 아련한 과거에의 감각이랄까.
이런 분위기 말이지......
현재 내가 사는 곳은 신도시다. 동네에 전봇대도 안 보이고 모든 집들은 70평 단위로 나뉘어져 단정한 느낌이 있다. 모던한 느낌까지는 아니지만, 정돈되어 깔끔한 맛이 있다. 그런데 가끔 이 '정돈되어 깔끔한 맛'에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추억이 없어서 그럴까? 차라리 그 옛날의 고풍스러운 풍경이 그리워지는 거다. 마치 핫플레이트로 구워먹는 것보다 구공탄불로 구워먹는 꼼장어의 맛에 더 끌리는 것처럼, 재즈가 나오는 바(Bar)에서 로마네꽁티 와인을 마시는 것보다 시장 어귀의 순대국밥집 안의 드럼통 테이블 위에서 마시는 막걸리에 더 이끌리는 것처럼.
(물론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말이리라.)
왜일까? 추억이라는 미명으로 과거를 총천연색으로 덧칠하고 뻥튀기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취향이 '쌈마이'인 탓일까? 뭐 그럴지도.
뭐 그렇다고 무조건 빈한한 것이 좋다거나 재개발에 무조건 반대하자는 것은 아니고, 다만 도시의 개성과 색채를 죽이는 무미건조한 콘크리트화에 아쉬움을 느낀다고나 할까. 형식은 럭셔리, 내용은 무색무취의.
실용성과 럭셔리에 대한 추종이 적당히 짬뽕된, 푸르른 하늘을 가리는 아파트 숲에 대한 반감이랄까. 사진작가 박진호의 말은 그래서 호소력이 있다.
2,30년 전만 하더라도 골목길은 아이들의 놀이터였으며, 할머니들의 사랑방이었다. 삶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울 골목길의 성지인 봉천동, 금호동은 일찍이 사라졌다. 아현동도 만리동도 거의 다 사라져가고 있다. 골목길이란 단어조차 사어(死語)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골목길은 없어지고 단지와 블록이 그 자리를 완전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춘천에는 골목길이 남아 있다. 더불어 골목길이란 단어도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추억의 화강암 축대도 남아 있다. 하지만 멀지 않았다. 춘천에서도 아파트는 힘이 세다. 모든 것을 밀어낼 것이다. 모든 것을....
이런 거 말이지......
아, 옛날이여.......
우산동 원주시장 안 순대국밥집의 드럼통 테이블에 앉아 순대전골에 소주를 한두 잔씩 마시다가, 객기에 사이다 컵에 한가득 따른 과량의 소주를 목청 너머로 넘길 때 역류하던 위산들의 추억이여.
산산이 부서진 소주병이여!
만취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외상없는 주인이여!
토하다가 내가 죽을 술판이여!
겨울연가 얘기가 나온 김에 삽입곡인 <제비꽃>을 들어보자. 조동진의 원곡도 멋지지만 이 미성의 리메이크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