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에 국방의 성스런(혹은 성가신) 의무로 인해 양구에서 보낸 적이 있다. 세월의 더딤과 지연을 그때만큼 뼈저리게 느낀 때가 있었을까.
직책이 교육계였던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사단 본부에 다녀올 수 있었다. 휴가 때를 제외하면 아마도 그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던 것 같다. 첫 외출 때 대대 위병소를 벗어난 이후 느껴졌던 자유의 느낌은 아직도 선연하다. 맘껏 나다닐 수 있는 민간인의 신분이었을 때는 정작 그 자유스러움을 감지하지 못하다가 구속되어 있을 때야 비로소 그것을 느끼는 아이러니. 하기야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무한정의 자유스러움이 가져다주었던 것은 정신의 해방이 아니라 대개 지긋지긋한 권태가 아니었을까.
애초에 밤이라는 현상이 없었던들 ‘낮’이란 낱말이 생길 이유조차 없는 것처럼, 애초에 (상상하기는 힘든 일이지만)구속이나 감금 따위란 생각조차 못할 세계였다면 자유롭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생길리가 만무하다. 대상에 대한 그리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것을 부풀리는 것은 역시나 대상의 부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특정 시기든 다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삶이 검부러기처럼 메말라 갈 때, 애착과 집착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무의미한 미사여구처럼 회상을 반복한다.
과거를 현재처럼 바라본다. 봄날의 아지랑이로 인해 불꽃처럼 어룽거리는 풍경을 향해 한참 동안을 걷는다. 문득 반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일렁이는 것 같은 모습을 띤 것도 봄날의 뜨거운 기운 탓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거리를 좁힐수록 불분명했던 사물 간의 경계가 뚜렷해지고 구체성을 띠게 된다.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른다. 처음 출발했을 때에 바라보았던 낭만적인 정경은 온데간데없고, 거친 잡풀과 바스러진 콘크리트 더미, 그리고 시야를 더럽히는 날벌레 따위들만 부유하고 있다. 처음 출발했던 지점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메마르고 더러운 풍경만이 남겨져 있다. 그토록 도달하고 싶었던 목적지에 도달해보니 멀리서 바라볼 때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고, 외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니 처음 출발했던 지점의 풍경이 오히려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몽환(夢幻)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우나 허망한 착시(錯視). 나는 오도카니 서서 실망감을 다독여본다. ...그러나 우리가 막상 그리로 달려가 ‘거기가 바로 여기’가 될 때 모든 것은 본래대로가 아니겠소?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중에서.
사단본부에서 볼일을 마친 후 돌아가는 길에 장교 숙소 근처에 있는 휴게소 건물의 커피숍에 들어가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시킨다.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혼자만의 사치. 그리고 그 사치 속에 대개 기생하고야 마는 그리움의 정서. 그럭저럭 참을 만한 고적(孤寂)함을 동반하는. 커피숍의 스피커에서 익숙한 노래가 들려온다. Cook da Books의 <Your eyes>. 문득 너의 눈을 현실로서 바라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것은 심상(心象)으로는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심상과 실재 대상과의 거리는....멀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그러나 이 적당한 거리감은 그리움이라는 일종의 착시(錯視)를 유발한다. 나를 향해 있지 않은 너의 시선이 가중한 거대한 착시. 실소를 머금으며 언젠가 애착의 대상과 반흔(瘢痕)조차 더 이상 의식되지 않는 순간을, 더 이상의 격랑은 남아있지 않을 허적(虛寂)하나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망각의 순간을 상상할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관계의 지속에 대한 기대가 자기만족적 믿음일 뿐일지라도, 그 순간에는 망각의 거대한 힘에 의존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현재 절대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망각에의 기대감도 언젠가는 가능한 일로 남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는 때는 욕망의 대상에게 더 이상 일말의 충족 가능성을 확인할 기회조차 사라져 버린 먼 훗날이지,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익숙함'이라는 명료한 장소가 되어버리는, 즉 '여기가 거기'가 되는 지점에서 사람들은 '가지 않은 길', 혹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회한을 품으며 서성이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그 길마저 잊는다. 아니, 잊힌다.
대대 위병소를 지나 차도에 접어든다. 그 옆은 연노랑 수양버들의 늘어진 잎들이 바람에 실려 물결을 이루고 있고, 차도에서 더 멀리 떨어진 지점에는 작은 흙길이 가늘고 길게 이어져 있다. 나는 차도를 피해 흙길을 선택한다. 그 흙길의 먼 끝에는 마치 파스텔로 그린 듯한 온화하고 정적인 정경이 펼쳐져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불결하고 먼지 가득한 이곳 풍경과는 대조적인.
음악이 끝나고,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선다. 점원에게 커피 값을 지불하고 건물 밖으로 나온다. 봄날이지만 태양이 뜨겁다. 이제 나는 원래 있던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20여 년 전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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