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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삶은 짧고, 곡은 너무 많다.

 



일본의 여류 기타리스트 무라지 카오리가 방한했을 때다.
어느 음악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무라지 가오리에게 "친구들이 당신을 부러워하지 않느냐"고 묻자, 무라지 가오리는 "내 친구들은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무라지 카오리는 대체 어떻게 살고 있길래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를 부러워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무라지 가오리는 아니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같은 악기를 다루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의 추측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의 삶은 아마 이럴 것이다.

기상-세면-식사-약간의 휴식-연습-연습-연습-연습-연습-식사-약간의 휴식-연습-연습-연습-연습-연습-연습......




대딩 때 얘기를 좀 해야겠다.
봄 기운이 찬연하던 어느날, 오후 6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동아리 방에 어떤 동기 여학생이 들어오더니 나의 기타 연습 광경을 몇 분 정도 구경한 후에 집에 가는 거다.
다음 날, 오전 11시 경에 그녀는 다시 동방에 나타났다. 잠시 내 연습 과정을 지켜보더니 이런 말을 하는 거다.
"그 곡, 어제 저녁 때 잠깐 연습했던 거지? 잠깐 연습한 거 같은데...좀 버벅대기는 해도...금방 쳤네?"
그리고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근데 넌 왜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자리에서 연습하는 거니? 지정석이라도 있는 거니?"

뭐, 조금 잘난 척 하자면....물론, 내가 독보력은 월등하게 좋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그 능력이 세상의 모든 난곡들을 척척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내가 연주했던 곡들이 그랬다(즉, 실력에 비해 좀 난이도가 있는 곡을 버벅거리면서 연습했던 거다). 나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해주어야 했다.
"지정석이라도 있냐고? 그게 아니라, 어제 저녁 이후로 지금까지 쭉 이 자리에 앉아만 있어서 그런 거거든?"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해주어야 했다.
"금방 쳤다고? 천만에....밤 늦도록 동방에서 연습하다가 지쳐서 의자를 몇개 일렬로 붙인 다음 그 위에서 군용모포 깔고 잠깐 눈을 붙였지. 새벽에 추워서 잠이 깼는데....달리 할일도 없고, 그래서 또 연습한 거거든?"
물론, 이런 얘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연습 과정은 은폐되어야 한다. 오로지 결과만 보여야 하는 거다.
그게 신비주의 전략이라는 거다.
유연한 연주라는 결과(뭐, 실제론 그리 유연하지도 않았지만)의 이면에 숨어있는 뻐근한 손가락 학대의 현장은 은폐되어야 하는 거다.
그래야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무라지 가오리의 친구들은 그 뻐근한 손가락 학대의 현장을 알고 있었다!

(좀 시건방진 얘기로 들렸는지 모르겠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의 혹독한 수련의 시절은 그리 길지 못했다. 기껏해야 입대 전 2년 정도의 세월이 그러했을 뿐, 이외의 시절은 다소 널널한 연습 뿐이었다...)

 




물론 '학대'라고 말하는 건 다소 과장일 수도 있다. 매저키스트가 아닌 한,그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학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연습의 과정은 즐거움만을 동반하는 건 아니었다. 천재도 아니고, 이끌어주는 그 누군가도 없는 상황에서는 무수한 판단 착오와 좌절이 다반사였으니. 게다가 손가락이 '자동연주'하게끔 하려면 무수한 반복은 필수.
생각해보라. 아무리 명곡이라지만 한 곡을 1000번 가까이 치다 보면....신물이 난다. 한 곡을 1000번 가까이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연주 중에 비몽사몽의 상태에서 손가락이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마치 손가락 하나하나에 뇌가 달려있는 듯) 지경...아니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건 아마도 결코 장려되서는 안 되는 무의식적 연주에 불과하리라.

반복이 목적하는 건 단순하다. 예컨대 우리가 익히 아는 노래를 부른다고 해보자.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내가 '학교 종이' 부분을 노래하는 순간, 나는 '그 다음 가사는 <땡땡땡>이지....대비하자'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음에 이어질 가사가 무엇인지는 구태여 미리 예측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때 그때의 요구되는 가사는 '알아서 나온다.' 연주도 마찬가지다. 수 백 번 반복하다보면, 어느 특정 프레이즈를 연주하는 동안 '그 다음 프레이즈의 운지와 리듬과 악상은 이러저러 하니까 준비해 두자'고 생각하는 순간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건 불충분한 연습 탓임에 틀림없다. 연주자는 막 닥쳐온 순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무수한 반복으로 이미 손가락 안에 심어 놓는다. 그것이 '자동연주' 개념이다.



 



이제부터는 절대 유명 연주인이 될 수 없는 내 처지의 입장에서 말하도록 하겠다.

무수한 반복을 통한 자동연주. 그래. 이것까지는 참을만한 일이다. 하나를 이루기 위해 그 정도의 대가조차 치루려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쥐새끼 심보다. 정작 문제는,

망각


인 거다.

인간은 잊는다. 기억하려 애써도(Try to remember) 결국엔 잊는다. 물론 그것은 누구 말마따나 축복이다. 만약 내가 10여 년 전에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고백하려는 순간, 만취의 결과물인 토사물로 그녀의 발을 적셨던 일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기억이란 재앙이다(물론, 나는 지우려고 애써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이와 비슷한 수준의 치명적인 기억들을 몇 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망각이 항상 축복인 건 아니다. 연주가에게 있어 망각이란, 좀 과장하자면 시찌프의 형벌과도 같다. 음악이라는 무거운 돌을 힘들게(그러나 나름 보람을 가지고) 굴려 정상에 올려 놓으면, 그리하여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그 돌은 다시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간다. 뮤즈 시찌프는 다시 굴려 올리기 위해 또 내려가야만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망각의 횟수가 늘어난다


는 거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다. 순수한(?) 두뇌의 퇴화 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성인이라는 사회적 위치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즉 나이를 어느 정도 먹은 성인이라면 유년기나 청소년기와는 달리 순수하게 무엇 하나에 정신을 온전히 쏟을 수가 없고, 따라서 산만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예컨대, 우리는 늘 자동차 할부금과 세금, 그리고 노후에 대한 걱정 등에 정신을 빼앗길 때가 많고 이것이 예술 활동을 방해한다는 거다).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는 내가 검증할 수는 없는 일이니, 그저 묵묵히 망각의 쓴 잔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내가 잊고픈 것은 악보가 아니라...

그 지질했던 지난날의 악몽 같은 사건들이라고!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든다.
생의 한가운데를 지나 이젠 지난날보다 남아있는 날들이 더 적을 것 같은 시절에 나는 여전히 저 아래에 보이는 돌을 다시 굴러올리기 위해 다시 쇠똥구리 같은 삶을 살아야만 하나? 쇠똥 따윈 집어던져버리고 폴 고갱이 살았다는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 같은 곳으로 여행이나 훌쩍 떠나고 싶은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쇠똥을 모조리 내팽개칠 수는 없는 일이다(그 순간이 곧 손가락의 죽음이다). 중도를 찾아야 할 시점이다. 완전히 폐기해야 할 쇠똥과 또다시 굴려올려야 할 쇠똥을 분류하는 거다. 그런데,
완전히 폐기해야 할 쇠똥의 목록을 들춰보니 상당 수가 내가 작곡하거나 편곡한 곡들이다....

어쩌면 <달과 6펜스>의 '이미 완성한 그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스트릭랜드'를 닮아가서 그러는 걸까? 피식....웃기는 얘기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내 머리에서 나온 산물에게 '자뻑'의 감정을 느끼는 경우란 아주 드물다는 거다. 조악한 창작력과 나름 유능한 귀가 불협화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뒤돌아 보게 되는 '어제'의 대상은 과거지사와 그 속에서 흐릿하게 얼굴을 내미는 타인들 뿐이다. 다만 지질한 기억의 사건과 대상은 비교적 명료한데 반해, 기억을 보존하고픈 그것은 어스름 속에 있다. 악보들도 그것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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