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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나이키의 추억



사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 역사는 남들의 경멸에 압박감을 느껴 자신에게도 사랑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텅 빈 선반에 엄청난 것들을 전시하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기 때문이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진정한 형벌이다.

                                                                                      -알랭 드 보통 <불안> 중에서.




군 시절의 어느 가을날, 결코 애인은 아니었고 단지 친구 사이에 머물렀던 한 여자 친구가 예상 밖의 면회를 온 적이 있다. 난 기쁜 마음으로 면회 신고를 고참에게 한 후에 행정반으로 가서 외박증을 끊었다. 당시에 우리 부대는 참 친절하게도 면회가 오면 무조건 외박을 허락해 주었던 거다.
강원도 Y시에서 그녀와 밥을 먹고 커피숍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어느 정도 날이 어두워지자 그녀가 말했다.
"아, 이젠 집에 가야 될 시간이네."
지금의 나라면 이 말에 뭐라고 대응했을까? 아마도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서라도 그녀의 귀가를 잠정 보류시켰을 거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런 태도를 비굴한 '개수작'정도로 폄하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비굴하지 않게, 그리고 당당하게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자고 가라."

되돌아온 말은 당연히 "너 미쳤냐?" 정도였을 거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나는 귀대를 했고 내무실에 들어가 귀대 신고를 했다.
"단결! 상병 박XX은 면회를 마치고 자대 복귀 했....."
그 순간 날아온 베개는 정확히 내 면상을 가격했다. 성질 더러운 고참 Y씨가 집어 던진 거다.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집는 순간 그가 이렇게 소리 질렀다.

"우리 내무실 역사상, 여자가 면회 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일 귀대한 새끼는 네가 처음이다, 이 븅신아....."

아...여친이 면회오면 무조건 자고 들어와야 했던 이 불편한 진실....
여하튼, 당당함과 뻔뻔스러움을 구분하지 못하던, 그런 순수한(?) 시절이었다. 아래의 글은 그 당당함과 파렴치함을 구분하지 못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먼 과거를 돌이키면 어두운 화면 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이 있다. 그 얼굴의 주인공은 중학생 시절에 같은 반이었던
종원(가명)이라는 친구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대개 웃고 다녔고, 욕지거리 한 번 내뱉지 못하는 순하디 순한 친구였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그 순하디 순한 친구를 떠올릴 때면 자동반사적으로 나이키가 연상된다. 그 연유는 이렇다.

당시에는 중고등 학생 사이에서 소위 '명품' 운동화가 인기였다. 그 최고봉에 미국 메이커인 나이키가 있었고, 그 아래에 일본 메이커인 아식스와 국산인 프로스펙스 따위가 있었다(당시의 선호도 국력 따라가는 걸 보면, 어지간히 선진국 컴플렉스에 노출되어 있었던 게 틀림없다),

어느날인가 한 친구가 거금 2만원(당시엔 거금이었다)을 들여 구입한 프로스펙스 테니스화를 신고 나타났는데, 어쩌면 그때의 내 심정은 메이커에 대한 부러움보다는 싸구려 메이커인 내 '보세(이름모를 삼류 싸구려 메이커의 일종)' 운동화-그것도 아주 남루했던-에 대한 쪽팔림이 먼저였을 거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친구 S의 집에 그와 함께 놀러 갔을 때 일이 터졌다. 시간이 지나 집에 가려고 S의 집 현관을 나서는 순간 그의 프로스펙스 테니스화가 사라져 버린 것을 깨달은 거다. 쥐가 물어갔을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그 테니스화가 사라진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뽀리꾼'이 훔쳐 간 것이다.


'뽀리꾼'이란 남의 집에 잠입하여 명품 운동화를 훔쳐가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뽀리꾼의 역할은 대개 중/고등학생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급우들의 명품 운동화에 대한 갈망을 해소시켜주는(물론 자신들의 용돈 벌이도 해결하는) 역할을 했었다. 일종의 공급책이었던 거다.
물론 신품 가격에 비해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제공해 주었는데 인기 메이커는 단연 나이키였다. 




어쨌든, 프로스펙스를 '뽀리' 당했을 때의 그 친구의 표정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낭패감 가득한 '야마 돈(?)'표정. 산 지 한 달밖에 안 된 제품이었으니 얼마나 속이 쓰렸겠는가.
 나 역시 그와 표정을 함께 했어야 했지만, 분노보다는 다소 웃겼던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미안하이, 친구...) 당시에는 누군가 새 신발을 사게 되면 신고식(?)이랍시고 친구들이 구매한 친구의 새 신발을 마구 밟아버리는 전통(?)이 있었는데, 그 전통의 희생양이 된 테니스화를 처연하게 바라보던 그의 순간적인 굳은 표정과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도난 후의 표정과 신고식 때의 표정은 닮아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생각한다. 내가 웃었던 것이-물론 얼굴의 외피는 심각한 표정의 페르소나를 뒤집어 쓰고 있었지만-과연 그 오버랩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그 당시의 내 은밀한 웃음의 정체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꼬시다(고소하다).ㅋㅋ.....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라고 알랭 드 보통은 말한다. 당시는 저가 정책을 고수하는 공급업자-뽀리꾼들 때문에 교실 내의 명품 운동화 소유가 대체로 일반화 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나를 포함한 일부의 학생들의 보세 운동화만 독야청청하였으나,그 절개는 명품의 아우라에 의해 얼마 못 가 소멸해버리고 말 성질의 것이었다. 나도, 그들도 모두 마음 속에서는

나이키가 갖고 싶다!

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는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것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진정한 형벌"이었다. 지름신조차 왕림하기를 꺼려했던 절대빈곤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똥싸는 놈 주저앉히자는 심보인지, 롹밴드 <키스>의 베이스 주자인 진 시몬즈가 티브이에 나와서 염장을 지른다.

"가난이 죄냐구요? 네. 그럼요. 죄 맞습니다."


 

 

                                                                                                               지름신 '즐' 꺼져....ㅋ

 

 


알랭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공식을 소개한다. 그 공식은 다음과 같다.

자존심=이룬 것/내세운 것


그러니까 이 공식이 의미하는 건 다음과 같다. 예컨대 자동차라면 아무리 못해도 벤츠 정도는 타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내세우는) 인간은 자신의 차 티코(이룬 것)를 바라보면 자존심이 바닥을 치게 된다. 우리가 내세우고자 하는 것, 즉 우리의 기대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이룬 것은 작아지게 느껴지므로 자존심은 낮아진다, 반대로 기대 수준을 낮추면 이룬 것에 대한 충족도가 커진다는 것. 이제 이 공식을 당시의 '보세'운동화를 신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나를 포함한 일부 학생들의 심리에 적용시켜보면,

자존심=보세/나이키 
가 된다. 즉 분모에 대한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자존심은 구겨질대로 구겨졌던 거다...

"엄마!"
"왜?(^_^)"
"나도 나이키 사줘!"
"그게 뭔데?"
"운동화야. 지금 신고 다니는 건 다 헤져 가지고 완전히 거지 같단 말야..."
"그래? 그럼 사줄게."
"앗! 정말?"
"그래. 나이킨가 뭔가, 그거 얼만데?"
"한 3만원은 넘을 걸?"
"...................(-_-)"
"사줄거지?"
"가서 공부나 해!(`_  ´)"

디자이너 Miguel Adrover는 이렇게 말했다.

"취향이란 것은 어떤 룰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한다. 취향은 항상 다를 수 있다. 누가 감히 무엇이 다른 무엇보다 더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10대였던 내가 감히 말하겠다.

"나이키가 보세 따위보다 훨씬 더 세련되었다고!!!"



 

 


무산계급인 나와 일부 급우들은 이 구겨진 자존심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었을까?  이미 언급했다시피 뽀리꾼이라는 존재는 무산계급의 사치품에 대한 선호를 충족시키는데 상당 부분 기여를 한다. 그들은 소년원 전학(?)에의 가능성을 등에 업은 채 용기를 내어 메이커 신발을 훔쳐온 노고에도 불구하고,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계급의 과도한 가격 책정에 똥물을 끼얹으려는 듯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급우들에게 공급했던 거다! 오,위대한 시장교란자여...

'뽀리치기'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거리를 배회하다가
2. 구입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명품 메이커 신발을 신은 중딩이를 발견하게 되면 미행하여
3. 그의 집에까지 따라간 후, 그가 실내로 들어가면
4. 현관까지 잠입하여 그가 벗어 놓은 신발을 들고
5. '존나게' 토낀다.....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는 신세대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이, 누가 문을 안 잠그고 다녀요?"라고.
그땐 문을 잠그지 않는 가구가 다반사였다는 걸 상기하기 바란다. 그런 시대였다.

1. 어차피 나이키를 사서 신는 놈들은 부자일 테니까 까짓거 없어지면 또 사서 신겠지, 뭐.
2. 저 가난한 뽀리꾼 친구에게 용돈을 벌어다 주는 일인데 뭐 어때서?
3. 원래 세상 물건을 돌고 도는 거 아니겠어?

어쨌거나, 자존심의 회복을 위해 보세 급우들은 하나 둘씩 뽀리꾼 급우에게 SOS를 치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대놓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거다. 급우에게 도둑질을 하라고 부추기는 꼴이니 마음의 거리낌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을 거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에겐 정당화를 위한 심리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어느덧 한 두명...아니 두 세명 정도가 뽀리꾼의 지원을 받기에 이른다. 이들 보세 친구들은 결코 배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선구자라고 불리워야 마땅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선행(善行이 아니라 先行)은 남은 보세 친구들에게 막강한 심리적 정당화를 제공한 것이다!

나만 그랬나? 너도 그랬고, 걔도 그랬고, 다 그랬는데.

신호 위반도 혼자 하면 범법자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모두 위반할 경우엔 신호를 지키는 놈이 찐따 되는 거다. 이게 세상의 썩어빠진 이치다. 좀 불쾌한 비교이지만....어쩌면 윤간이라는 파렴치한 행위도 그런 심리기제가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고백하자면,
나도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유감스러웠던 건, 우리 반에는 뽀리꾼이 단 두 명 밖에 없었다는 것인데, 그나마 좀 뽀리꾼의 업무(?)에 충실한 이는 이종원(가명)뿐이었다는 거다. 문제는 그가 나름 절친이었다는 것.
내 생각엔 좀 기묘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종원이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친구였기 때문에 뽀리꾼이라는 이미지와 그는 전혀 맞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뽀리치는 짓을 제외하면 정말 천사같은 친구였다.

"저기......종원(가명)아....부탁이 있는데....다른 게 아니고....내 신발이 좀 그렇잖니? 그러니까......."
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 건 너무 지질하고 비굴해 보일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비굴한 속내를 은폐하는 페르소나를 뒤집어 쓴 채 당당하게 그 친구에게 요청...아니 요구하기에 이른다.

 

 

내적 비굴함을 외적 당당함으로 은폐하는 버릇은 유감스럽게도 그 이후 10여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버리지 못했고, 그 결과 난 군 시절 '무박의 면회'라는, 우리 내무실의 새역사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는데.....여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 '당일 귀대'의 새역사를 창조하게끔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당당한' 발언의 시초로 돌아가서 정리를 해보자. 때는 중딩 시절이었고, 보세의 비애를 안고 있었던 난 나이키를 원했고....그리하여 절친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기에 이른다.

"야, 이종원! 너 언제 시간 되면 내 꺼도 좀 뽀리쳐와라. 나이키루다가."

그때의 그 친구의 오랫동안 정지되어 있었던 메마른 표정을 지금도 난 잊지 못한다. 잠깐의 정지 컷이 해제되고 난 후, 메마른 표정을 뚫고 그의 입에서 극도로 억양이 자제된 말이 흘러나왔다.

"너, 새꺄....나한테 그러는 거 아냐...."

"다른 놈들 껀 다 뽀리쳐 주면서 왜 내 꺼는 안 되는데?"라고 결코 말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내 심장을 꽤뚫었고, 그 속의 피를 덥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 열기가 눈치 채이지 않도록 나는 또다른 페르소나를 뒤집어 썼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뭘? 븅신아...", 혹은 "됐거든? 싫음 관둬라." 뭐, 이런 비슷한 수준의 말로 상황을 얼버무렸을 거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그에 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없다. 얼마간의 미적지근한 시간이 흐른 뒤 해가 바뀌어 각자 다른 반을 배정 받은 후, 거의 대개 그렇듯이 각자의 공간을 서로 비집고 들어오는 일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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