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좌충우돌 잡글쓰기

미달 학점의 악몽

                                                파블로 피카소 <꿈>

 

 

 

 내게도 반복되는 꿈들이 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나를 포함, 누군가의 목이 잘릴 예정이거나 잘리는 꿈.

 2. 전쟁터의 꿈.

 3. 꽤 넓고 하얀 2층 집의 꿈.

 4. 동물들이 학대당하는 꿈

 5. 제대했는데 또 입대해야 하는 '악몽.'

 6. 미달 학점으로 인해 졸업을 못하는 '악몽.'

 

 1과 2의 경우는 젊은 시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성적으로나) 무언가 꽉 막혀 있어서 답답했던 시절에 자주 꾸었던, 정신분석학자들에게는 다소 흥미로울 수도 있을 꿈이다(이제는 더 이상 꾸지 않는다).

 3의 경우, 꿈속에서 그 하얀 집은 내가 살던 집이었고, 잠에서 깨고 나면 예전에 그 집에서 산 적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전생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동일성의 문제 때문에 회의적이지만, 가끔은 전생에 살던 집은 아니었을까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Dreams>

 

 

 

 4의 경우는 내용이 각각 다르다. 가장 기억나는 건 다음의 꿈이다. 시골집 마당 한가운데 소가 한 마리 있다. 마을 사람들은 살아있는 소를 마치 능지처참이라도 하듯 조금씩 살점을 떼어서 먹는다. 나는 도려내어진 부위를 보고 경악한다. 잠에서 깬다. 그리고는 이런 생각을 하며 안도한다. ‘휴....다행히 꿈속이었구나. 현실에서는 이러진 않지.’

 며칠 뒤 서점에서 심리학자이자 동물보호운동가인 멜라니 조이가 쓴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라는 책을 구입하여 본다. 그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꿈속의 일이 방법만 다를 뿐,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경악스러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그전에도 쇠고기는 잘 안 먹었지만, 이후로는 더욱 입에 안 댄다. 그리고 윤리적 일관성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육류는 멀리한다. 덕분에 84Kg이었던 체중을 지금은 70Kg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 150mmHg가 넘었던 최고혈압도 지금은 110~120mmHg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도 족발과 프라이드치킨은 그리움의 대상이다(음식은 아니지만 담배 역시도 강렬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5의 경우는 너무나 끔찍한 악몽이므로 언급을 자제하자.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괴롭다.

 

 

 

                                                      뻥까지마!

 

 

 

 6의 경우가 이 잡글의 주제다. 아직까지도 빈번하게 꿀 뿐더러, 내용도 비교적 일관적인 꿈이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대학 4학년인 나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2학기가 개강한지도 한 달이 훨씬 넘었는데, 반드시 수강해야할 과목의 강의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은 거다. 게다가 담당교수는 뒤늦은 출석을 절대로 용인해주지 않을 인간. 학점을 채우기에는 애초에 틀렸고, 결국 나는 졸업도 못한 채 대학을 5학년까지 다녀야 하는 비운을 맞게 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난다. 그 순간 스며드는 안도감은 항상 똑같다. ‘아...꿈이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해보니 대학시절은 장미 빛 추억으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었다. 적성에도 안 맞는 전공을 선택한 대가를 4년 내내 톡톡히 치렀으니까. 때는 고3 시절-대학의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친구와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나 : “아....전공을 뭘 선택해야 하나? 고민인데.”

 친구 : “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야.”

 나 : “(한참 생각해본 후에)결심했어. 이걸로 할래.”

 친구 : “어, 그래? 뭔데?”

 나 : “화학. 이걸로 정하겠어.”

 친구 : “화학이라....그것도 좋지. 근데 왜....”

 나 : “이것 봐....갈 만한 데라고는 물리학과, 식품 영양학과, 생물학과, 화학과...뭐 이런 것 밖에는 없는 것 같아. 근데 식품 영양학과는 왠지 남자가 가기에는 좀 그렇지 않냐? 생물학과도 괜찮지만 괜히 여기 들어갔다가는 죽어라 암기만 해야 할 것 같아.”

 친구 : “물리학과는 어떨까?”

 나 : “거긴 절대로 안 가. 4년 내내 수학에 시달릴 수는 없잖아!”

 

 

 

                                   이런 거 공부하는 학과는 수학을 안 하는 줄 알았지........

                 

 

 

 위의 대화에서 주목할 점은, 전공 선택이라는 중요한 결단의 순간에 결코 취업에 대한 전망이라든가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 따위가 눈곱만큼도 끼어들지 않았다는 거다. 예를 들자면 그냥 이런 식이다. 점심시간이다. 뭘 먹을까? 돈까스를 먹을까? 아니야, 이건 포화지방산이 너무 많을 것 같아. 그럼 간단하게 짜장면이나 시켜 먹을까? 아니, 이건 와이셔츠에 춘장이 튈지도 몰라. 그럼 그냥 샌드위치로? 아니지, 빵이 오히려 비만을 키운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간절히 원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점을 일일이 찾아내 일종의 소거(掃去)를 해나가는 방식이랄까. 누군가 선택의 문제에서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그건 너무나 명약관화하다. 그에게는 그 선택의 대상들이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꽤 오래전에, 누군가 학원 아이들과 이런 한심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단다.

 

 쌤 : “내일까지 이 네 가지 과제들을 다 마스터 해 와라. 알겠지?”
 초딩A : “(소리를 높이며)예에? 어유, 이걸 언제 다 해요....”

 쌤 : “한 시간만 시간 내면 다 할 수 있는 것들이야. 잔 말 말고 해와.”

 초딩B : “(구시렁대며)네 가지 중 하나만 골라서 하면 안 돼요?" 

 쌤 : "좋아. 대신 과제를 좀 바꾸자. 다음 것들 중 한 가지 과제를 선택해서 하는 걸로. 첫째, 화장실 바닥에 눌러 붙은 껌 떼서 씹기. 둘째, 세면기에 묻은 가래침 핥아 먹기. 셋째, 삶은 지렁이로 스파게티 해 먹기. 마지막, 응가에 낀 콩나물 뽑아먹기. 자, 뭘 선택 할래?”

 

 내게 전공 선택의 문제는 이른바 딜레마의 문제였다. 따라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는 그저 ‘그것들 중에 가장 덜 나쁜 건 무엇인가?’의 문제에 불과했다. 가장 나쁜 건? 응가에 낀 콩나물, 곧 수학이다. 이 똥 묻은 콩나물 같은 수학이 가급적이면 배제되는 전공을 선택해야만 한다. 따라서 물리학은 가장 먼저 제외된다. 무슨 무슨 공학이니 하는 따위들도 마찬가지다.

 그 다음 나쁜 것은? 지겹도록 외우는 짓이다. 따라서 (고등학생 때의 경험으로 보건대)생물학도 배제된다....그러다 보니 남은 건 왠지 (비교적)만만해 보이는, 화장실 바닥에 들러붙은 껌 딱지 같은 화학!

 

 

                               지렁이 시식 영화, 밥 돌만 감독의 <구운 벌레 먹는 법>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 선택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점에서 내겐 최악의 선택이 된다. 첫째, ‘물리화학’이라는 과목을 간과했다. 특정 분자가 특정 상황에서 브라운 운동을 할 때의 순간 속도를 구하라는 따위의 문제들에 수학이 개입되지 않을 리가 없다(나는 이 과목에서 무려 세 개의 인테그랄(∭)이 붙어 있는 수식을 처음 봤다). 둘째, 수학 바보인 내가 이런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각종 수식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통째로 외우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생물학과 갈 걸....이런 생각이 들지 아니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세상에 그 어느 자연과학이 수학을 배제하겠는가? 생물학이라고 해서 무작정 암기만 하겠냐고.

 

 (윤구병의 <잡초는 없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철학과를 지망한 한 학생에게 철학 교수가 선택의 이유를 묻자 그 학생은 '나중에 포항제철에 취업하기 위해서'라며 황당한 답변을 한다. 교수가 철학과와 포항제철이 무슨 상관이냐고 묻자 그 학생 대답하기를,
 "철학과에서는 '철(鐵)을 배우니까요!"
 적어도 내겐 이 학생을 비웃을 자격은 없어 보인다.)


 

 그렇게 수학이 싫었으면 애초에 이과가 아닌 문과를 선택했으면 됐을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맞다. 애초에 그 잘못된 선택이 문제였다. 한 점의 뻥도 안 보태고 말하자면, 내가 문과가 아닌 이과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불어 쌤의 영향이 없지 아니하다고 말 못 할 수는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라면, 역시 이과를 가야지!"

 물론 선택은 내가 한 거다. 잘못이라면 내 귀가 너무나 얇았다는 것과, 정규 전공과목들 중에서 내가 선택하고 싶었던 건 하나도 없었고, 따라서 이과든 문과든 상관 없었다는 거다. 고로 그에게 책임을 상당부분 지우는 건 좀 무책임한 짓일 거다. 단, 이렇게는 그에게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는 쌤께서는 어인 일로 불문과를 가셨는지요?"

 

 

 

                          수식은 나에게 묘한 미감을 제공한다. 다만 내용은 제공하지 않는다.....

 

 

 

 문제는 ‘물리화학’만이 아니었다는 것. 나는 진정 모든 전공과목을 증오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4학기 동안 무려 세 개의 전공필수 과목과 한 개의 교양선택 과목에 ‘빵꾸’를 냈고, 그 결과 두 차례의 학사경고를 받았다.

 문득 이런 일화가 떠오른다. 군 입대를 위해 휴학을 했을 때다. 어느 날인가, 이제 막 복학한 동아리 선배님의 자취방에 찾아갔다. 생물학과에 적을 둔 그 선배님은 방에서 공부를 하고 계셨다. 그가 내게 말했다.

 “어이, 마침 잘 왔다. 너 화학과지? 이리 좀 와봐. 내가 지금 유기화학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데, 이걸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내가 그의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리라는 것 정도는 문제를 보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거 봐봐. 이 HCl에 SO₂가....하려는데 왜...” 5분 뒤, 나는 그에게 유기화학.....아니 일반화학 강의를 받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루 와 봐, 쌕꺄....어떻게 화학과 다니는 쌔끼가 ‘공유결합’도 몰라?” 그리고 이런 얘기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물학과 학생이 화학과 학생한테 공유결합을 설명해서야 되겠냐?”

 그렇다. 이건 말하자면 음대 피아노과 학생이 클래식기타과 학생한테 ‘아포얀도’를 가르치는 격이다.

 그리하여  4학기를 마쳤을 때, 나는 더블 쌍권총(FF X 2)을 차고 말았다. 이건 내겐 두 가지 선택지 밖에는 없었음을 의미한다. 첫째는 학교를 때려치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4학년 마지막 학기까지 빡빡하게 21학점을 다 채워서 수강해야 한다는 것. 나는 후자의 길―화학이라는 똥밭을 굴러야하는―을 선택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당시에 졸업이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으므로.

 뭐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원래 깨달음이란 항상 뒷북을 치게 마련이다.

 

 

              이걸 보면서 거열형(車裂刑)이나 프라모델의 조립설명서를 연상하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학사경고를 받게 된 내막을 마치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그 빌어먹을 ‘분석화학’ 시간이었다. 창밖으로는 초여름의 더위를 씻으려는 듯한 미풍이 불고 있었고, 건물 뒤편이어서 그랬는지 적막했다. 나는 그 적요한 풍경을 쫒아 창밖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한줄기 센티멘털한 감정이 심금의 G현을 울릴 무렵, 교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 교수는 칠판에 적어 놓은 난삽한 화학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자네....이 화학식의  H₂가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나?”

 내 대답은 너무나 자명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 고로 존재한다. 무식한 게 자랑이 아니라면 조금은 멋쩍은 기색이라도 냈어야 마땅했을 텐데,  낯빛 하나 안 붉히는 뻔뻔스러움이 교수의 심기를 건드렸나보다. 그가 말했다.

 “아니, 이런 건 고등학교 화학책에도 나와 있는 건데 아직도 이걸 모르면 어떡해?”

 

 입견을 가질까봐 하는 얘기지만, 이 교수는 절대로 갈구기 좋아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나와의 대적(?)을 제외하면, 권위적이지 않고 비교적 친근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권위가 있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러나 ‘권위적’이라는 건 그렇지 않지요.”

 그때 나도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지적을 한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러나 ‘지적질’이라는 건 그렇지 않지요.”
 물론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 교수의 황당한 표정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사람이 눈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화학과 학생 맞냐?’

 강의가 다시 이어졌고, 나는 다시 턱을 괴며 창밖으로 눈을 돌려 푸른 하늘 아래의 풍경을 감상하며 시심(詩心)...아니, 여자 생각에 빠져들었다. 지겨운 강의. 어차피 경청해도 난 못 알아듣는다, 이런 생각으로 잡념에 한창 빠져드는데 교수가 칠판을 두들기며 다시 한 번 나의 태도를 지적했다.

 “거기, 학생. 여길 봐야지...창밖에 예쁜 여자라도 지나가나?”

 

 아니요. 단지 교수님의 강의는 너무나 무료했고,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학우들이 태반이)었으며, 따라서 의도하지 않은 수면과 거기에 동반되는 코골이로 역시 의도하지 않은 모독감과 심려를 끼쳐드리지 않기 위해 딴에는 애쓰고 있던 중이었는데요. 정말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해에는 총학생회에서 주도하는 ‘전면 총파업(전면 수업 거부)’이 빈번했다. 일단 시대가 그랬고, 우리 학교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랬다. 비리 이사장(‘이사장의 비리’가 아니라 ‘비리 이사장’이라고 말할 정도로 입에 붙은 말이다)에 관한 문제는 항상 이슈의 중심에 있었던 거다. 결국 연거푸 지적을 당한 그날 이후로 ‘전면 수업 거부’에 들어갔다. 문제가 있었다면 수업거부의 주체가 우리 과의 2학년들 중에서는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는 것. 결국 그 과목 역시 낙제점수를 받고 말았다. 그렇게 1학기가 저물었다.

 학기가 바뀌어 2학기가 시작 된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인가, 그 교수가 과사무실을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더니 물었다.

 “자네, 저번에 학점 못 땄지? 재시험이 있으니까 준비해 둬.”

 “저....” 내가 대답했다. “재시험 볼 자격도 없는데요.”

 “아니, 왜?” 교수가 물었다.

 “40점 받았거든요.”

 

 (지금도 이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당시에는 낙제생들을 재수강이라는 늪으로부터 구제해주었던, 이른바 ‘재시험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나름의 자격이 있어서 해당 과목의 점수가 50점~60점 사이인 학생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렇게 교수는 내게 한 번 더 염장을 질렀다. 그는 내가 낙제 점수를 받은 걸 알고 있었을 터였다. 자신이 채점한 것 중에서 최저점이었을 테니까. 이건 당시에 재시험 응시 자격 미달자가 나밖에 없었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그랬던 그가 재시험 자격에 미달되는 40점을 준 사실을 금방 망각해 버렸던 걸까? 뭐, 그럴 수도 있다...

 

 

                                       그리운(?) 열역학 제 1,2 법칙...

 

 

 또 하나 우스운 촌극은 ‘물리화학’ 시험 날에 일어났다. 시험지를 쳐다 보았을 때 내가 깨달았던 것은 그 문제들이 전혀 문제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는 거다. 왜냐하면 문제 자체를 아예 이해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에 적혀있는 상형문자를  문자가 아닌 그림으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당연히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적어 넣지 못하고 흰 여백만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담당교수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기라도 하면 자격지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마치 실기 시험 때 교수 앞에서 아무런 연주도 못한 채 그저 악보만 멍하니 바라보는 피아노 전공생처럼.

 시험시간이 절반 정도 지났을 무렵, 나는 시험지를 들고 교탁을 향해 걸어갔다. 교탁 위에는 먼저 시험을 끝낸 학우들의 시험지가 켜켜이 놓여있었다. 그것들 위에 내 시험지를 올려놓으려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아...맨 위에다 내 시험지를 올려놓으면 다음에 올 학우가 내 시험지를 보게 될 테지. 보통은 남의 시험지 따위야 관심 밖이겠지만, 이처럼 답은 없고 문제만 휑뎅그렁하게 남겨진, 백지나 다름없는 시험지라면 아무래도 시험지 주인이 누군지 궁금할 테지. 내 이름을 확인하고는 아마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 쪽팔려....'

 

 이런 생각에 나는 그 시험지 더미를 들췄고, 아무도 내 시험지를 못 보도록 그 중간 정도에 내 시험지를 슬쩍 끼워 넣으려고 했다. 그 순간, 몇 가닥 안 남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교수가 빠른 걸음으로 교탁을 향해 다가왔다. 그는 이제 막 끼워 넣으려는 내 시험지를 낚아채며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그렇다. 그는 시험지를 들추는 내 행위에서 부정의 냄새를 맡은 거였다. 그는 나를 한참 노려보다가 부라린 눈을 낚아 챈 시험지로 돌렸다. 그의 눈이 시험지 위 아래로 오락가락하더니 이윽고 당혹의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다. 범행에의 혐의는 있는데 증거는 전무한(왜냐하면 백지니까) 상황이 야기한 뻘쭘함. 이 사태를 수습할 유일한 방법은 가능한 한 빨리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존 거틴즈 감독의 영화 <드리머>의 패러디.

 

 

 

 그리하여 나는 그 학기에 쌍권총을 찼다. 재시험 불가. 재수강 가능. 학사경고. 나는 학교를 때려 치워야겠다는 심정으로 다음해에 휴학을 했고, 입대를 했다.

 제대 후 내가 당장 할 수 있었던 일은 복학 말고는 달리 없어 보였다. 결국 복학을 했고, 새카만 신입생 후배들과 ‘일반화학’ 강의를 공유하는 처지가 되었다. 복학한 이후에는 그놈의 ‘전면 수업 거부’도 별로 없어서 강의에 꼬박꼬박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 빌어먹을 ‘비리 이사장’의 문제는 여전했지만.

 

 다행이었던 건 복학한 그 해에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도서관이라는 곳에 갔다는 거다. 그 안에서 3개월 동안 일반화학과 유기화학의 기초를 뗐고, 드디어 ‘공유결합’이 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사히 시험에 통과했고 학점을 땄다(그러나 대개는 이해보다는 암기에 기초해서 시험을 치렀다). 학년이 바뀌어 나는 4학년이 되었고, 나와 강의를 같이 들었던 신입생 후배들은 2학년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들과 강의를 같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끔찍하게도 두 과목이나! 강의실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내게로 향하던 후배들의 무심한 눈길들조차 마치 개구리에게 향하는 무수한 돌팔매 같았다. 그 시절의 내게 책임을 진다는 건 쪽팔림을 감수한다는 것과 동일했다.

 그해의 내 방 벽면에 붙여 놓은 A4용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목표 : 탈(脫) 학사경고

 

 

 

                                             재수강이 넷. 대체 뉘신지...

 

 

 

 그해에 학생들의 투쟁도 결실을 보게 되었는데, 학교 재산 전용과 비리입학의 주역이었던 ‘비리 이사장’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새로운 총장으로 과거 민주화 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분이 오시게 된 거다.

 새로 부임하신 총장님은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한 번은 우리 동아리(클래식 기타 동아리)에 까지 몸소 찾아오셔서 이런 저런 애로사항은 없는지 물으셨다. 그때 받은, 그분에 대한 첫인상은 ‘권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였다는 거다. 때는 바야흐로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가을이었고, 우리는 그분께 며칠 뒤에 있을 가을 연주회에 오시기를 기대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바쁘셨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꼭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하신 후 동아리방에서 나가셨다.

 

 마지막 동아리 연주회였으므로, 나는 대미(?)를 장식할 겸 독주를 하기로 했다. 곡명은 메르츠 작곡의 <엘레지>와 망고레 작곡의 <왈츠 No.3>.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빌어먹을 ‘졸업시험’과 연주회의 일정이 겹친 거다. 똑같이 졸업반이었던, 같은 화학과이자 같은 기타 동아리에 적을 둔 후배 K(그는 현역이었던 나와는 달리 방위였던 탓에 나와 비슷한 시기에 제대를 했고, 나와 같은 학년으로 복학했다) 역시 졸업시험 대상자였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근면 성실한 그는 이미 1차에 모든 시험을 통과한 후였으니까. 나는 당연히(!) 1차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고, 2차 시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3차 시험을 남겨 둔 상태였는데, 그게 하필이면 연주회 날과 겹친 것이다.

 

 시험 당일에 K는 나를 픽업해 가기 위해 건물 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고, 대충(?) 시험을 마친 나는 그의 차를 타고 시내의 연주장으로 직행, 결국 연주회 복장으로 갈아입거나 손가락을 풀 시간도 없이 그대로 무대에 올랐다. 그날의 연주는 손가락을 풀지 않은 것 치고는 그럭저럭 무난했다(고 자위한다). 삑싸리(미스톤)도 음악의 일부라는, 보통의 음악계에서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주관적 음악미학(비틀거리든, 흐느적거리든 일단 완주만 하면 그 레이스는 성공이라는 관점)만 견지할 수 있다면.

 

                                                                      

                                            정소영 감독의 1975년 영화 <졸업시험>

                               

 

 

 연주회가 끝나자 K가 내게 다가왔다. “형, 그거 아세요? 오늘 총장님도 연주회 보러 오셨어요.”

 정말 약속을 지키신 거다!

 후배가 말했다. “근데 형이 연주하실 때 꾸벅꾸벅 조시더니, 결국 주무시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형은 총장님을 잠재워버린, 유일한 학생일 거예요. 흐흐.....”

 그렇다. 약간의 과장을 덧붙이자면, 나는 군부독재도 하지 못한 일을 함으로써 ‘음악은 힘이 세다’는 걸 입증한 거다.

 

 어쨌거나 총장님을 위한 변명(?)은 좀 해야 할 것 같다. 그날의 내 연주는 청중의 귀를 확 잡아 끌 매력이 한참 부족했을 뿐더러, 오히려 감상에 방해가 되는 미스 톤을 남발했다는 거다. 만일 데이비드 러셀처럼 <엘레지>를 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총장님께서 졸고 계셨다면, 그건 업무 등의 이유로 과로하셨기 때문이다(하찮은 아마추어 기타 동아리의 연주회까지 참석하실 정도였으니, 얼마나 바쁘셨을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물론 난 러셀의 연주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청중이 조는 건 전적으로 연주자 책임은 아니겠지만(예컨대 청중의 과업으로 인한 피로까지 연주자가 책임질 수 있는 건 아니다), 50% 정도는 책임이 있지 않을까?(나머지 20%는 작곡자, 20%는 무대음향시설 관계자, 10%는 청취자의 과로)

설령 데이비드 러셀의 연주를 듣고도 잠이 온다 해서 그걸 무지의 증표로 취급하면 곤란하다. 보통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드는 사람에 대해 문화적 경박성 운운하며 비웃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비웃는 행동이 정당화 되는 건 코를 골며 자는 경우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동아리방에서 나눈 대화로 미루어 봤을 때 총장님은 결코 문외한이 아니셨다!

 

 그 유명한 기타음악 작곡자이자 연주자인 카를로 도메니코니의 내한 공연 당시에, 나 역시 심하게 졸았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물론 난 결백하다. 난 잔 게 아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 의지대로 잠을 자버린 게 아니라 그의 난해한 현대음악이 나를 잠들게 한 거라는 얘기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현대음악에 대해 무지한 건 네 책임이지, 도메니코니의 잘못은 아니다.” 

 맞는 얘기다. 그러나 왠지 도메니코니는 현대음악에 대한 나의 무지를 그리 탓하지는 않을 것 같다. 도메니코니라고 세상의 모든 현대음악을 이해(공감)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라면 왠지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나는 그저 내가 만든 곡을 연주할 뿐이고, 그것에 공감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청중의 개인적 취향의 문제다, 라고.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1967년작 <졸업>

 

 

 

 어쨌거나 다행히 졸업시험은 무사히 마쳤고―사실은 교수가 적당히 봐줘서 통과했고(따라서 5학년까지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제때 졸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4학년 2학기 때에도 21학점을 꽉 채워야 했던 탓에 여유는커녕 취업 준비할 시간조차 없었던 마지막 학기가 저물어 갔다.

 학교를 떠나기 직전에 한 여자후배가 고맙게도 직접 만든 닭볶음탕으로 대접해 주었다. 그 맛이 어떠했는지는 지금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그 정성의 온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뭐, 나 역시 그녀에게 해준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와 <이방인>의 리포트를 대필해준 적도 있었으니까. 물론 <이방인>의 경우 황당한 자의적 해석(?)으로 담당교수로부터 핀잔을 나 아닌 그녀가 들은 게 문제이긴 했지만.)

 

 학교를 떠나던 마지막 날, 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가랑눈이 내렸고 약간의 서글픔도 느꼈다. 목표 완수나 지긋지긋한 전공으로부터의 해방감도 그 쓸쓸한 기분을 떨쳐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전공으로부터의 해방감은 기타와 함께 했던 시절과 장소(동아리방)를 떠나는 아쉬움을 상쇄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적응의 대상이었던 전공에의 압력이 온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더 이상 화학식을 볼 일이 없었다. 다만 그것은 항상 무의식이라는 압력솥에  누룽지처럼 눌려있었던 것 같다. 졸업한 이후에는 너무나 자주 학점을 못 채워서 안달하는 꿈을 꾸게 되었으니 말이다. 꿈을 통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았음에도, 꿈에서 벗어나 잠에서 깨면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마치 '현실'이라서 다행이라는 듯. 

 누구나 그렇듯이 학창시절이 너무나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러다가 문득 전공과 학점에 시달렸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리움이 반감되기도 한다. 만일 운명의 신이 학창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내 소망을 들어준다면, 진정 딱 절반만 들어주기를 바란다. 화학과 학점과는 무관한 순간만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기를. 그리하여 미달 학점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악몽 따위와는 무관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혹 생각한다. 만약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다면, 그리하여 (적성에 맞는 건 둘째 치고) 고통스럽지 않을-물론 학문의 길에 비포장 도로가 아닌 것이 있겠냐만-것을 선택했더라면 이 따위 미달 학점으로 인해 전전긍긍하는 악몽 따위는 꾸지 않았을 거라고.

 

 

 

 

 (.......)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간지러울 때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 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고의로 오해하여

 내 소망을 반만 들어주면서 나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아주 데려가 버리지는 않겠지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

 

                         -로버트 프로스트, <자작나무>중에서

 

 

 

 

 

 

 세월이 흘러 2008년, 드디어 ‘이게 다 XXX 때문이다’라는 유행어가 떠돌던 한 시절이 마감되고 녹조....아니, 녹색주의자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때마침 대학에서는, 과거에 학생들이 투쟁해가며 열심히 몰아냈던 그 ‘비리 이사장’이, 가재는 게 편임을 증명한 사분위(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지원사격에 힘 입어 컴백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인 마르셀 푸르스트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데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이면 충분했다. 우리에겐  11,492,389명의 득표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듬해 지병이 있으셨던 우리의 총장님도 귀천(歸天)하셨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음과 동시에 귀환한 과거 인사. 물론 이런 건 다 순전히 ‘우연’일 뿐이다. 지금은 21세기고, 따라서 지강헌이 목 놓아 울부짖던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세상은 다 과거지사의 일인, 참 아름다운 세상인 거다.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

 

 

 사족 : 

 

 수학을 병적으로 증오했던 그날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수학을 증오의 대상에서 두뇌 노화 방지에 유익할 하나의 가치로 바라보게 된 것. 그래서 <수학의 몽상>같은 책도 가끔 본다. 뭐, 그렇다고 바닥이었던 실력이 좋아졌다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주어지게 된다면 언젠가 다시 <수학의 정석Ⅰ,Ⅱ >에 도전하게 될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는 단순 암기가 아닌, 이해하는 방식의 접근으로 해묵은 한(?)을 풀고 싶다. '머리가 나쁘다'는 한을.

 (왜 수학을 못 하면 일반적으로 '머리가 나쁘다'고 하는 걸까?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좌충우돌 잡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면교사 이야기  (0) 2013.03.21
잠들지 못한 밤  (0) 2013.03.15
춘천 가는 기차  (0) 2013.02.17
어떤 회상  (0) 2013.01.23
나이키의 추억  (0) 2012.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