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나 카페베네처럼 널찍한 공간에 그다지 정을 붙이지 못하여 동네의 이름없는 7평 미만의 작은 카페를 애용하는 나는 작업실이 되든 주거지가 되든 언젠가 진짜 조그만 집을 짓는 것(비용이 비교적 적게 든다)이 삶의 목표들 중 하나다. 그래서 위의 사진처럼 넓은 창을 통하여 외부의 풍경을 관조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
지만 문제는 보안이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외부인을 어떻게 차단하는가 하는 문제.
그래서 보통 '방범창'이라는 대안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방범'창'이라…말이 좋아 '창'이지 실제로는 '경찰청창살쇠창살'의 그 '쇠창살'에 다름 아니다. 철학자 피터 싱어 왈,
"아파트 저층 창문에 창살이 쳐진 모습은 마치 감옥을 연상시킵니다."*
범죄에의 근심을 덜고 싶다면, 결국은 외부 풍경을 감옥 창살 안에서 관조(?)하는 생활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는 없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방범창이 안전을 100% 보장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예컨대 출입구 근처에서 화재가 났다고 치자. 빠져나갈 곳이 창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 창살에 막혀 타죽거나 질식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화재의 확률보다는 외부인에 의한 범죄의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하기에 결국은 쇠창살을 드리우고 산다.
창살없이 불안하게 살 것인가, 또는 창살에 갇힌 채 안심하고 살 것인가. 달리 말하자면 창살로 방을 감옥처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창을 쇠창살 아닌, 외부의 풍경을 담는 화폭으로 삼을 것인가.
결국은 선택의 문제다.
어떤 철학자가 한 말이라는데, 사람들은 돈 많은 대통령, 혹은 정치인에 대해 겉으로는 욕을 하며 싫어하는 것 같지만, 실상 내면으로는 부러워하고 추종한다는 거다. 이 얘기를 들으니 문득 정 모 씨를 지지한 40대가 많았다는 근래의 뉴스가 생각이 난다. 양극화 문제는 오로지 정치인들만이 만들어 낸 현상은 아니다.
아무래도 창살에 갇힌 채 안전하게 사는 방식을 앞으로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무력 공격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사적인 삶도 풍요로울 수 없다. 낮선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기 집을 요새로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벨라 <미국인의 사고와 관습>중에서*
* : Peter Singer 著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How are we to live)>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