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베스트 셀러답게 매우 흥미롭지만, 1권의 한국 독자들을 위한 머릿말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혹시…'하는 의구심이 들기에 충분하다. 한일 양국의 과거사를 언급하면서 자국의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오노 나나미의 사적인 사관이 과도하게 개입되어 읽기에 불편한 구석이 많은데, 카이사르에 대한 과도한 찬양을 비롯, 그녀가 '온건한 제국주의'라고 지칭한 고대 로마...의 '팍스 로마나'에 대한 지나친 편애 역시 그렇다. 부분 부분 드러내는 여성 비하도 눈에 거슬리지만 내게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한니발 전쟁(포에니 전쟁)을 다룬 2권의 말미에 적혀있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특히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정의와 비정의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 범죄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만약 전쟁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라도 열렸다면, 한니발이 전범 제 1호가 되었을 것이다.
(중략)
로마가 카르타고와 맺은 강화는 엄격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보복이 아니었고, 하물며 정의가 비정의에 대해 내리는 징벌은 전혀 아니었다. 인류가 결코 초탈하지 못하는 전쟁이라는 악업을 승자와 패자가 아니라 정의와 비정의로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그렇게 구분했다고 해서 전쟁이 소멸한 것도 아닌데."
예컨대 두 차례 세계대전은 식민지 쟁탈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이해관계의 상충에서 촉발된 '쌍방과실'이라는 시각이 대세이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히틀러나 도조 히데키 같은 일급 전범이 '단순한 패자'라는 식으로 면죄가 되나? 731부대의 생체 실험이나 난징 대학살에 관한 사진을 보고도 그녀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나 보다.
시오노 나나미의 글이 일종의 '물타기'로 보이는 건 단순히 내가 그녀를 일본인으로만 봐서 그런 걸까. 피해 국가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것이 전범 국가 출신의 지식인이 지향할 태도가 아닌가.
여하튼 저자가 타자화에 이골이 나있다는 것이 <로마인 이야기> 곳곳에서 드러난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진다.
사족 : 그렇긴 하나 <로마인 이야기>가 완전히 쓰레기라는 얘기는 아니다. 잘 걸러 읽으면 귀담아 들을만한 구석도 꽤 있기는 하다.
'위안부는 참 상냥한 이름'이라고 말한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박노자 선생의 글 :
1. "생물학적 녀성"이라는 것 자체는 여성으로서의 주체성/다른 여성에 대한 연대 의식 등 "의식상의 여성"되기를 전혀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오노씨가 생물학적 여성임에도, 시오노씨에게는 성노예 되기를 강요 당한 같은 여성들의 고통은 "지친 병사를 위로해주는" "동지적 관계" (?)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시오노씨가 "여성"이기 전에 범죄적 과거를 가진 부유한 나라의 "국민"인 셈이죠.
2. 인종주의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가장 유식한 제1세계 "국민"들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시오노씨 같으면 화란국 출신의 피해자와 아세아 출신의 피해자들을 노골적으로 차별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아세아 출신의 피해자들을 인종주의적으로 타자화시키지 않는 이상, 과연 인간의 상상을 넘는 범죄행각에 대해 이렇게 냉소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3. 어쩜 일본과 한국의 극우들이 이렇게도 빼닮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주/백인에 대한 동경이나 구주 같은 곳에서 거주하는 걸 명예롭게 여기는 의식부터 "언론이 국익에 위배하는 보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식한 "국익주의" (?)까지…정말 서로를 늘 학습하는 것 같아요. 이 두 부류가.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상당히 유착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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