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장에 <환생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음악 쌤께서 내게 빌려주신 것인데 20년째 대여 중에 있다.
언젠가 쌤께서 환생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이렇게 반박했던 기억이 있다. “환생한 ‘나’를 전생의 ‘나’와 비교했을 때, 외관과 성격, 그리고 기억마저 다르다면 대체 환생한 ‘내’가 전생의 ‘나’라는 사실을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나요?”
이런 얘기다. 이것저것 다 바뀌었다면, 대체 ‘나’라고 칭할 수 있는 ‘본질’이란 대체 무엇일까?
요컨대 ‘자기동일성’의 문제라는 것인데, 요즘에는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있다 보니 자기동일성의 보존이라는 것이 고려되지 않는 환생 정도라면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어디서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불교에서는 이를 ‘자성(自性)이 없다'고 한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님 말고.
철학자들은 이 ‘자기동일성’의 문제를 환생 이전에 현생에서도 문제 삼는 모양이다. 이런 식이다. “오래전에 ‘나’의 몸을 이루고 있던 체세포들은 작금에 모두 다른 것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성격도 점차 완전히 바뀌었다면, 과거의 ‘나’와 작금의 ‘나’가 똑같은 존재라는 보장을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결국 ‘나’의 본질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정신? 정신이 뭔데? 너무나 모호하다. 기억? 이것은 기억상실증의 예로 논파된다. 슬슬 골치가 아파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본성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한 친구가 말한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냐고?” 그가 여러 가지 답변을 하지만 전부 논파된다.
지속되는 반론에 결국 그는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잔디밭 위의 개똥을 가리킨다. 개똥같은 소리라는 건가.
‘정신’이니 ‘본질’이니…너무 버겁다. 주제를 살짝 비틀어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된 성질, 혹은 성향에 대해서만 생각해 본다. 그런 게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가장 먼저 심미안이 떠오른다. 예컨대 오래전에 본 최수지나 근래 본 배수지에 대한 미적 판단은 '예쁘다'는 점에서 동등하다. 서른 살이 넘어 처음 참석한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남자 애들(?)은 하나같이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주희(가명)’ 오는 거냐?” 가장 예뻤던 여학생 이름이다. 지속가능한 심미안임에는 틀림이 없다.
미각(味覺)적 대상 중에 생각해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떡볶이다. 청각적 대상들 중 악기로 한정하자면 기타와 플룻, 그리고 첼로 소리가 그렇다. 이외에도 변하지 않은 많은 대상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오늘,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던 성향에 대해서 깨닫는다.
간만에 푸른 하늘 아래에서 산책을 한다. 호숫가를 한 바퀴 돌다가 호수를 가로지르는 목조 다리에 다다른다. 입구에 있는 표지판을 보니 <애수교>라고 쓰여 있다.‘애수(哀愁)교’라…멋진 이름이군. 애수, 그러니까 '마음을 서글프게 하는 슬픈 시름'을 품고 건너는 다리라는 뜻인가? 운치 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문득 학창시절에 배웠던 유치환의 <깃발>이라는 시의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는 건 순전히 뻥이고, 사실은 주현미의 <밤비 내리는 영동교>의 가사 일부분이 떠오른다.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눈물에 젖어 하염없이 걷고 있네, 밤비 내리는 영동교.”
어라, 이게 아닌데…표지판에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한자로 명시되어 있다. ‘哀愁’가 아니라 ‘愛水’다. 허걱. 대체 이건 뭥미? 애수-그러니까 ‘사랑의 물’인 건가?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중딩이 때였던가, 이 노래 가사를 듣고 참으로 음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리고 오늘, ‘대체 이건 뭥미?’라는 말에는 이미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순간 이것 역시 불변의 지속가능한 성향들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음란마귀 포에버.
덧붙여, ‘본질’ 따위는 잘 모르겠고 다만 ‘나’라는 것은 음란마귀 포함, 여러 성향들의 다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