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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

감히 애국가를 비판하다

 

 

친일 논란으로 말 많고 탈 많은 <애국가>의 작사가.
역시나 친일 논란으로 말 많고 탈 더럽게 많은 <애국가>의 작곡가.

하지만 이런 역사적 관점은 완전히 배제한 채 음악적인 관점에서만 얘기를 좀 해보자. 음…, 솔까…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애국가가 음악적으로 꽤나 '후지다'고 생각한다(믈론 이건 내 주관일 뿐이니 애국가에 엄청난 애착과 향수를 느끼시는 분들은 그냥 '조또' 모르는 놈이 헛소리한다고, 또는 '까고 있다'고 생각 하시기 바란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단장', 혹은 '약강'의 운율을 센내기에 적용

 

 가사의 '동해물과'에서 '동'과 '해'를 계명창으로 부르면 각각 '솔'과 '도'가 되는데, (강약중강약의 강세를 보이는 4/4박자 악곡에서)강박 위치에 놓인 '솔'음이 곧바로 이어지는 약박 위치에 놓안 '도'음(아래 악보에서 빨간색 동그라미 표시한 음)보다 음가가 짧다는 점에 주목하라. 결론적으로 말해서 '장단', 즉 '강약'이어야 할 운율이 '단장', 즉 '약강'으로 전도되어 자연스러움을 훼손하고 있다. 이런 '약강'격의 센내기에서의 음의 배열로는 적당하지 못하고 여린내기에서의 배열에 적당한 구조다(아래 참조. '/' 표시는 마디선을 의미).

센내기 구조 : /해~물과/백두산이/~

 


여린내기 구조 : 동/~물과백/두산이마/르고~ 


물론 위의 얘기가 <애국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린내기 구조에 맞춰 불러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약강'격의 잘못된 배치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 뿐이다.

 

'약강'의 운율이 주도하는 여린내기 구조에 대해서는 <He ain`t heavy, he is my brother>의 악보를 참고하라. 아래의 빨간색 동그라미 안의 음들은 '약'에 해당되는 음들이다.

 

 

 

 

                             왜 이 노래만 들으면 목가적 향수가 모락모락 일어나는 걸까?


 

덧붙이자면, 애국가의 '동해~'에서 <솔→도>의 완전4도 진행은 기능적으로 <도미넌트→토닉>의 진행을 보이므로 여린내기적 성격을 강화한다.

우리는 음들의 근원적인 충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명력과 운동력으로 결실되어진, 위로나 아래로 파생되는 5도 음들이, 즉 이 5도 음정이 음악의 진실한 조직적인 원리라는 것을 항상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Oswald Jones저 <쉔커의 분석이론>중에서

토닉인 <도>음은 5도 아래로 향할 경우 <파>음이 되고, 위로 5도 향할 때는 <솔>음이 되는 것에 주목하라. 도미넌트인 <솔>음이 토닉인 <도>음으로 진행하려는 운동성은 <V7→I>의 화성 진행을 유도한다.

 

 

 

여린내기의 악곡에서 못갖춘마디에 위치한 V7화음이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갖춘마디의 첫 박에서 I화음으로 진행한다는 건 서양음악의 상식이다. 아래의 연주 동영상에서 1분 45초~46초 지점을 귀기울여 들어보라.

 

키신이 연주하는 리스트의 <사랑의 꿈>. 새삼스럽지만, 좋은 연주에 아름다운 곡이다….
 

 

<솔→도>의 완전4도 진행은 기능적으로 <도미넌트→토닉>의 진행을 보이므로 여린내기적 성격을 강화한다'는 얘기는 예컨대 <올드 랭 사인>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 부분에 있는 가사인 '오랫동안'의 '오랫'에 해당되는 음을 보자. <애국가>와 완전히 동일한데(게다가 '오랫동안'의 선율리듬은 '동해물과'와 똑같다), '약(레)강(솔)' 의 운율이 못갖춘마디에 의해 여린내기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만약 <올드 랭 사인>을 <애국가>의 첫 마디처럼 조직하면 다음과 같이 될 터인데, <애국가>의 첫 마디가 어색하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마찬가지로 <올드 랭 사인>에 대해서도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표시는 마디를 의미함.)

센내기 구조:
/랫~동안/사~귀었던/정든.....(X)

여린내기 구조 :
오/~동안사/귀~었던정/든.....(O)

다음의 문제를 풀어보라.
문) 3/4박자인 생일 축하곡 <Happy birthday to you>는 센내기인가 여린내기인가?

센내기 구조 :
/생일축 하/합니다~~/생일축 하/합니다  /사랑하 는/...........

여린내기 구조 :

생일/축 하 합니/다~~생일/축 하 합니/다~~사랑/하는.........


힌트 : 마지막 마디(가사의 '축하합니다'부분)의 끝에서 두 번째 박의 마지막 박에 배치된 화음과 마지막 마디의 첫 박에 배치된 화음(V7→I)을 주시하라.
전자가 답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둘 중 하나다. 한국인이거나, 아니면 마주르카 형식에 익숙한 사람이거나.
내친 김에 마주르카에 대해서도 언급해보자.

<애국가>의 '동해~'부분처럼, '약강'격의 운율을 갖춘마디에 우겨넣은(?) 것에 대해 상투성의 탈피라는 관점에서는 나름 개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일례로 프란치스코 타레가의 <Adelita(아델리타)>의 경우는 센내기 구조이지만, 앞 부분 8 마디는 베이스 음을 생략하면 센내기와 여린내기 모두 가능한 구조이기도 하다. 원보대로 센내기로 연주할 경우, 두 박 째에 강세(물론 '심리적' 강세이지 '물리적 강세'는 아니다)가 옴으로써 '약강'격이 되는데, 이는 일반적인 운율인 왈츠와는 차별성을 보이는 마주르카 형식의 특성이다. 즉 '단장단'격, 다시 말해 '약강약'격의 운율을 지니게 되는 거다.

 

이 곡을 아래와 같이 여린내기로 변경하면 강세가 첫 박에 위치하게 되어 마주르카의 특성('약강약'격)은 상실하게 되지만, 평이한 왈츠 풍의 강세('강약약'격)를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베이스 음들(노란색 동그라미 표시)은 다음 마디의 첫 박 위치로 옮겨져야 함은 두 말 할 나위가 없다.

 

줄리안 브림의 연주로 듣는 <아델리타>.

 

 

마주르카의 강세에 대해서는 쇼팽의 곡을 참조하라. 뭐, 물론 선율의 리듬이 모두 이런 형식을 띄는 건 아니지만, 첫 박의 부점음표에 포함된 16분음표와 두 박 위치에 있는 4분음표의 '단장'관계로부터 두 박째 악센트의 당위성을 깨달을 수 있다. 

 

 

 

                                                                                    -두산백과에서 발췌 


 

 

 

<애국가>가 이런 식의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기 위해 약강격을 선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라고 대답하기에는 그 약강격에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위의 마주르카에서처럼 음악적 개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강세의 전복이 나름의 미학적 성취를 이룬 것에 반해, <애국가>의 경우 '동해~'에 해당하는 부분은 악식의 동형반복에 의한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약-강'의 어색함만 느껴져 누군가의 말마따나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후지고 촌스럽'다. '약-강'의 운율을 의도적으로 부여한 것이라면 이후의 작은악절들 중 어딘가에서 반복을 함으로써, 악곡의 통일성을 부여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보통의 작곡자들 같으면 '약강'격의 운율을 갖춘마디에 우겨넣음으로서 발생하는, (국가(國歌)로서는 불필요한) 무리한 리듬을 배제하려고 들겠지만.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33310&section=sc18&section2

 

덧붙이면, 약강격의 웉율이 센내기 형식에서 쓰이면 안된다는 법은 물론 없다. 빌라 로보스의 <쇼로 1번>의 리듬을 생각해보라.

 

 

 

V표시한 곳을 보면 '단(16분음표)-장(8분음표)-단(16분음표)'로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동일한 리듬이 다음의 곡에서도 확인된다.


 

 

이 역시 '단(8분음표)-장(4분음표)-단(8분음표)'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곡을 근거로 <애국가>의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쇼로1번>과 <창밖을 보라>에서의 '단장단'격은 곡의 활기(리듬감)를 더하기 위한 의도적인 배치로 파악해야 한다. 보사노바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애국가>의 음악적 성격에 대해 생각하면 이런 식의 센내기 형식에서의 '약강'격이 얼마나 몸에 맞지 않는 옷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비유하건대 해외 순방을 가는 국가 원수의 패션이 아래와 같다면…….

 

                                                                               밥 말리

 

국가(國歌)의 음악적 성격에서는 이후 자세히 언급될 것이다.

 

2. 맥빠지는 절정부 

 

이제 두번 째 근거에 대해 이야기 할 차례다. 다 알다시피, <애국가>는 8마디의 작은악절이 두 개 모여 이루어진 두도막 형식의 곡이다. 그런데 겨우 두도막 형식의 음악인 주제(?)에 완전히 똑같은 절정부(클라이막스)가 두 번이나 있어서 두번째 악절의 고조감을 맥빠지게 만든다. 가사로 따지면 '하느님이'의 '하'와 '대한사람'의 '대' 부분인데,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느님이'의 '하' 부분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린 기분이다.

 

 

 


분석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 형식을 살펴보면 A(a+b)+B(c+b)가 되는데, 이런 형식은 사실 드문 것은 아니어서 이 쓰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sequence(동형반복. 즉 여기서는 b가 반복된다)는 보통의 악곡이라면 장려되겠지만, 국가(國歌)의 경우 그리 권장하고 싶지는 않다. 관점(청점이라고 해야 맞겠지만)에 따라서는 고조에 의한 '벅차오름'도 똑같이 반복되면, 시쳇말로 '오글거린다.'
다만 반복악절에 변화를 준다면 반복에 의한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을 텐데, 이것은 조금 있다가 <환희의 송가>를 다룰 때 언급하도록 하자.

 

3. 단조로운 음악적 정보의 문제

 

 먼저 선율의 단조로움에 대해 언급해보자. 이 얘기를 꺼내려니 요구되는 장황한 설명에 벌써부터 '귀차니즘'이 밀려든다. 그래도 오해로 인한 반박을 최소화 하려는 마음으로 쓴다.

'음악적 정보'란 무슨 말인가? 여기서는 청각적으로 환기하는 효과를 유발하는 모든 음악적 재료를 뜻한다. '청각적으로 환기한다'는 말은 쉽게 얘기해서 우리가 음악을 들었을 때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고 어딘가 귀에 솔깃한 부분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는 음계, 화음, 리듬, 음질 등 여러가지 것이 대상이 된다.

 

 일단 '선율'이란 무엇인가 언급하자. 예컨대 다음과 같은 순차진행의 음들을 일러 '선율'이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자.


이것이 '선율(멜로디)'이 되려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열되어 진행하고 있는 음들에 리듬, 즉 '운율'을 부여해야 한다. <애국가>의 두 번째 작은악절의 선율을 보라. 4분음표와 8분음표, 그리고 점4분음표에 의해 순차진행하는 음들에 '율동'을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선율에 관한 가장 적당한 정의는 아마도 다음이 될 것이다.

음고선(音高線:음들의 연속이 그리는 선)이 납으로 만든 상(像)이라면, '율동'은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어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율의 두 가지 요소를 찾아낸 셈이다. 즉 음고선율동이다. 따라서 선율은 갖가지 (음의) 높이와 율동을 가지고 음이 연속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rnst. Toch 저 <선율학>에서

 

그렇다면 '선율이 단조롭다'는 얘기는 어떤 의미일까? 이것에 대한 답변은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

먼저 '스케일의 스케일(?)'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자. '스케일의 스케일'이라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음계(scale)의 규모(scale)'정도로 이해하면 될 거다. 즉 '선율이 단조롭다'라는 얘기는 음계의 규모, 혹은 음계의 범위가 단조롭다는 것을 일부분으로써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겨울나무>와 <In a sentimental mood>의 선율을 비교해 보자. 전자는 C메이저 스케일만 사용했음에 반해 후자의 경우는 D펜타토닉(혹은 D블루스) 스케일과 D내츄럴 마이너 스케일, 그리고 Db메이저 스케일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음계를 하나의 음악적 재료로 봤을 때 후자의 경우가 더 많은 재료를 취했다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음계의 규모, 혹은 범위의 폭이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하게 말해서 선율의 경우만 보더라도 음악적 '정보'가 다양하다 거다.
 

 

 

 

여기서 잠깐 존 콜트레인의 연주를 들어보자. 반주의 경우 편곡자의 의도에 의해 위의 악보와는 화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해하면 안 될 것은, '음악적 정보'의 풍부함 여부에 따라서 음악적 질의 높고 낮음을 평가할 수 만은 없다는 거다. 물론 산해진미가 '걸인의 찬(쌀밥에 간장 반찬)'보다는 맛있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때로는 반찬 개수가 비교적 적음에도 맛이 더 탁월한 음식점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물론 간장 한 종지만 내놓는 식당은 문을 닫겠지만.
(단 하나의 음계와 비교적 단조로운 화음만 사용했을 뿐인데도 감동을 주는 곡을 작곡한 작곡자는, 비유하자면 제한된 식재료를 가지고 산해진미에 필적하는 맛을 내는 요리사다.)

 

다만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작곡자들이 많은 음악적 재료를 취하려는 이유는 물론 다양함에서 비롯되는 미학적 효과 때문이겠지만, 이런 결론을 내리기 전에 작곡가들이 어째서 다양함에서 비롯되는 미학적 효과에 매진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예컨대 가브리엘 포레는 그의 <돌리 모음곡(Dolly suite)>중 어떤 곡에서는 왜 비근접조에 의한 빈번한 조바꿈을 해야만 했을까? 이유는 자명하다. 그는 19세기 말엽의 작곡가이고, 그 역시 동시대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그러했듯이 선대의 작곡가들이 선취한 선율이나 화성을 그대로 수용함으로 인해 야기될 비개성화를 지양했기 때문이다. 좀 유식한 척 말하자면, '독창미학'이라는 예술가의 본능에 따른 결과다.

가브리엘 포레의 <리디아>를 들어보자. 선율 진행이 뭔가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선율을 썼다.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선대의 작곡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어떤 곡의 특정 부분과 유사하다. 아니, 이미 유사한 선율을 너무 많이 접한 탓에 선대의 작곡자와 비슷한 방식으로 선율을 조직하니 좀 진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뭔가 차이를 낳는 창작 행위를 선호하게 된다.
이처럼 오랜 세월의 무수한 작곡가들이 양산한 선율의 무더기(?) 속에서 개성적인 선율을 찾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그나마 표절했다는 얘기를 피할 수 있으면 다행인 경우도 있다.

 
여기서 다음의 반론도 가능하다. "네 말대로 19세기에 이미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20세기에 쏟아져 나온 무수한 대중음악(일단 'pop음악'으로 한정해 두자)들은 어떻게 된 거냐? 대중음악 작곡가들은 선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얘기인가?" 이 점에 대해서는 일단 '선율리듬의 확장'을 언급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사실 A4용지로 열 장 이상은 나올 것 같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아래 악보를 참고로 하는 정도로 넘어가자. 엘가의 <사랑의 인사>와 하광훈의 <사랑일뿐야>를 비교해보자.

 

 

 

 

노파심에 미리 얘기하지만, 사실 이런 비교는 아주 적절하지 않다. 전자는 기악곡이고 후자는 성악곡(여기서 말하는 성악은 클래식음악에 한정된 것이 아닌, 육성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음악을 통칭하는 개념이다)이 아닌가.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뒷받침하는 데에는 적절한 듯 싶어 일단 이것들을 선택했다.
전자를 보면 '선율에 내재한 율동(이하 '선율리듬'이라고 약칭한다. 사실 '선율'이라는 개념에 이미 '율동', 즉 리듬이 포함되어 있지만, 선율의 두 가지 요소인 '음고선'과 '율동' 중, 음고선은 배제한 채 '율동'의 측면만 부각하고 싶을 때 '선율리듬'이라고 특칭하기로 한다. 구태여 이렇게 분리하여 특칭하는 이유는 박자리듬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함이다.)'이 정적(靜的)임에 반해 후자의 경우는 동적(動的)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음표들을 사용했느냐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4분음표와 8분음표가 주를 이루는데 반해, 후자는 여기에 16분음표까지 추가되어 있다. 음 길이에 대한 분할이 한 층 세밀한 거다. 게다가 후자의 경우, 당김음으로 인한 동적의 느낌을 강화(위 악보에서 붉은색 동그라미 표시한 부분)하고 있어서 선율리듬이 더욱 다채로워진다.

 

그러나 오해하면 곤란하다. 후자가 선율리듬이 더욱 다채로우므로(즉, 음악적 정보가 더 다양하므로) 음악적 완성도가 높다고 판단하는 건 산을 보지 못하고 숲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정적인 정서가 요구되는 영화 장면(예를 들면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에서 여주인공이 적막한 설경을 배경으로 혼자서 시체놀이(?)를 하는 초반 씬 같은 경우)에서 후자의 선율리듬을 채택하여 작곡을 하면 영상과 음악은 따로 놀게 된다. 반면에 춤추는 장면에 쓰일 음악의 선율리듬이 전자와 같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족 1 :

 

선율리듬의 다양성을 이유로 대중음악(pop)이 클래식음악보다 우월하다는 견해를 보이는 이들도 간혹 볼 수 있는데, 이는 음악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편협한 견해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는 '클래식음악'이란 20세기의 것을 제외한, 대체로 바로크 시대와 고전시대의 음악을 통칭하는 것인데, 리듬의 측면에서 20세기 이후의 소위 팝 음악이 진보적인 건 너무나 다양한 일 아닌가?

게다가 20세기 이전의 클래식음악이 집중한 것은 화성과 프레이징(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한다)이지, 과도한 붙임줄과 당김음에 의존한 16분음표들의 세부분할이 아니었다. 제3세계 음악의 진보적인 리듬에 관심을 보이게 되는 건 대체로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20세기 이전의 클래식음악이 제3세계의 음악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리듬을 화성만큼 파고 들지 않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면, 비슷한 논거로 화성적 빈약함을 보인다는 이유로 제임스브라운이나 메틀리카의 음악은 평가절하되어야 하는가?

어쨌거나 음악적 재료의 상당부분을 클래식음악에 의존하는 입장에서 대중음악 우위론을 주장하는 건, 비클래식음악을 모두 대중음악이라는 범주에 넣고 평가절하하는 일만큼이나 헛된 분별심에서 비롯된 미망이다.

 


다시 <사랑의 인사>를 보자. 당연한 말이지만 작곡가인 엘가는 삼류가 아니다. 따라서 단순한 음계와 선율리듬이(물론 단조롭기는 해도 선율 자체는 굉장히 아름답지만) 게속해서 지속된다면 사람들이 금방 싫증을 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거다. 그는 재료의 단조로움을 조바꿈으로 극복함으로써 음계를 하나 더 추가한다. 모리스 라벨의 말대로 '음악을 일종의 실험실로 여기는' 전위적 음악가가 아닌 한, 이렇게 작곡자들은 청중의 귀에 익숙한 재료와 낮선 그것을 적절히 배합한다.

 

무작정 많은 재료를 사용했다고해서 좋은 작품이 될 수는 없다는 건 요리처럼 자명하다. 만약 극도의 단순한 재료(예컨대 단 두 개의 화음)로 곡을 썼는데 감동을 준다면, 그 작곡자는 천재다. 물론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감동을 주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문제가 되는 건 두 가지 경우 뿐이다. 하나는 다양한 재료를 배합한 요리의 결과가 '개밥'일 경우고, 또 하나는 맛있게 할 능력도 없으면서 '걸인의 찬'을 내놓는 경우다. 

다시 '선율의 단조로움'에 대해 얘기를 진행해보자. 애국가의 선율리듬이 단조롭다는 비판은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음악적 재료는 요구되는 정서에 맞춰서 적절하게 사용해야지, 무작정 많은 재료를 사용하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 된다. 경건함과 중후함이 동적인 정서와 함께 요구되는 국가(國歌)에 싱코페이션(당김음)과 16비트 리듬을 남발하여 지나치게 동적으로 만들면 어울릴까?

 

위에서 언급한 '동적인 정서'에 대해 생각해보자. 국가(國歌)는 16분음표 단위의 세부 분할이나 당김음에 의한 조작으로 지나친 운동감을 자제해야한다고 이미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선율리듬은 촐싹거리지 않을 정도로 중후하되, 그렇다고 기력없이 늘어져서도 안된다. (<애국가>의 템포를 기준으로 봤을 때) 2분음표 단위로 조직하면 중후하다기보다는 거북이 같은 인상을 주게 되므로,16분음표 단위의 세부 분할과 함께 지양되어야 한다. 따라서 4분음표로 조직하는 것이 장려된다. 4분음표의 배열은 마치 군인들이 열 맞춰 행진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는가?

 


물론 4분음표의 연속만으로는 선율리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부언하자면 선율리듬이 4/4박자가 생성하는 리듬(쿵,쿵,쿵,쿵)과 그대로 똑같이 겹쳐져서 무의미하게 된다는 거다.

 

ㅡㅡㅡㅡlㅡㅡㅡㅡlㅡㅡㅡㅡlㅡㅡㅡㅡl  : 4/4의 박자리듬
ㅡㅡㅡㅡlㅡㅡㅡㅡlㅡㅡㅡㅡlㅡㅡㅡㅡl  : 연속적인 4분음표로 구성된 선율



따라서 아래의 곡처럼 적절히 2분음표를 가미하여 선율리듬의 변화와 함께 4/4박자가 생성하는 리듬과 약간의 차이를 유도한다.

 


 

여기서 잠깐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학교 종>의 작곡자인 '딩기리(?)'가 선율리듬을 최대한도로 단순하게 취한 이유에 대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치원생 혹은 저학년 초등학생들의 인지능력을 배려한 결과다.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박자(meter)가 생성하는 리듬(이하 '박자리듬'으로 약칭)과 선율리듬(위의 경우에는 4분음표의 연속)을 일치시킴으로써 뉴런이 비활성화된 상태의 어린이들이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위의 첫 마디를 예로 들면 각각의 음절, 즉 '학,교,종,이'는 그대로 4박자의 카운트(1,2,3,4)와 일치한다.

이보다 더 뉴런이 발달한 어린이라면 센내기 음악의 각 마디에 있는 음표들의 변화로 박자와 선율리듬의 일치에 변화를 주는 음악을 배우게 된다.

 

솔바람 

 

 

음표 배열을 보면 8분음표에 의한 분할이 눈에 띈다. <학교 종>보다는 선율리듬에 있어서 정보가 더 많다는 얘기다. 하지만 비록 선율리듬에 변화가 있다고는 하지만, 박자가 이끌어가는 '하나,둘,셋,넷'이라는 박자리듬과, 무리짓기(grouping, 혹은 토막내기chunking)에 의한 음군(音群)이 여전히 겹쳐진다는 점(주황색 활선을 보라)을 보면, 인지적 차원에서 <학교 종>을 크게 벗어난 건 아니다.
(하나,둘,셋,넷=미,루,나,무)
(하나,두울.셋,넷=꼭,대에,기,에)

이는 군가(軍歌)에서도 적용되는 얘기인데(그래서 군가는 대개 센내기 형식이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를 배려하기 위함이라고 보면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1. 인지적 차원에서 가급적이면 용이하게 만들어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부를 수 있다. 

2. 16분음표에 의한 세부 분할을 억제함으로써(그러면 결국 허용되는 건 8분음표 단위의 분할뿐이다) 박자리듬에 절도를 부여한다(예외가 있다면 부점음표의 경우인데, 군대의 행진을 연상시키기 위한 재료로서 지향된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논하기로 하자).

결국 무리짓기, 혹은 프레이징의 차원에서 살펴보면 <애국가>는 점4분음표가 나온다는 점만 제외하면 위의 동요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인지적 차원에서 보면 지극히 초보적이라는 점이다. 물론 갖춘마디로 구성된 악곡의 근본적 한계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인지적 차원에서 그렇다는 말이지, 센내기 성격의 악곡은 무조건 예술적 수준이 낮다는 얘기는 아니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도 갖춘마디에 의한 센내기 음악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수준이 낮은 건 아니다(아래의 동영상에서 2분3초 지점부터 시작하는 선율을 들어보라. 특히 2분 16초 지점의 선율은 '반짝인다'). 이러한 선율리듬의 선택은 인지적 배려의 차원이 아닌, 활동적 정서와 중후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절도(節度)'의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엄청난 수의 청중들에 의한 합창곡이 되어버린 <위풍당당 행진곡>. 감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일~어나요, 아따 맘~마…' 아, 이건 아닌가…….

 


어쨌거나 이에 반해 여린내기는 인지적 차원에서 프레이징이 유발하는 리듬(이하 '프레이징리듬'이라고 약칭.이에 대해서는 저 아래의 '※참고'를 보라)이 대체로, 그리고 비교적 고차원적이다(동요나 군가에서 여린내기 형식이 음악이 거의 없는 것을 상기하라). 아래의 악보에서 박자리듬과 프레이징리듬이 서로 어긋남으로 인해 형성되는 긴장감에 주목하라. 이때 두뇌는 3박자의 기본적인 박자리듬을 인지함과 동시에 각 음표의 음가와 프레이징까지 인지해야하는 삼중고(?)에 처하게 된다. 물론, 훈련이 된 직업 연주가들의 경우엔 이를 고난이 아닌 즐거움으로 받아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센내기 형식의 아주 단조로운 리듬의 음악임에도, 가수나 연주가가 임의로 선율리듬을 분할하거나(그리하여 프레이징을 재조직하거나) 여린내기로 전환하여 따분함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를 종종 접할 수 있다. 아래의 노래를 선율리듬의 변화에 주목하여 들어보라.

 

 

 

 

왜 이렇게 부를까? 물론 선율리듬을 재조직함으로써 프레이징의 단순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달리 말하면, 그것들의 복잡함을 추구함으로써 발생하는 대뇌적(?) 차원의 즐거움 때문이다. 예컨대 1초에 왼손이 책상을 (균일한 시간 간격을 두고) 두 번 두드리는 행위를 연속해서 반복하면 지루하겠지만, 왼손이 두 번 두들기는 동안 오른손이 (균일한 시간 간격을 두고)세 번 두들기는 폴리리듬을 행하면 흥미는 배가된다. 우리의 두뇌는 수행 가능성이 전제되는 한, 보다 복잡하고 여려운 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으므로.

 

※참고 1 :

'프레이즈가 생성하는 리듬', 즉 '프레이즈리듬'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조하라.

(리듬에 관한 첫 번째 개념을 '박자(meter)'라고 한다면) 리듬에 관한 두 번째 개념은 아주 다르다.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리듬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온종일 만들어내는 리듬이 있다. 바로 생명체의 움직임에서 나오는 리듬이다. 그것은 달리는 사람과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사람의 리듬이며 떨어지는 폭포수와 세차게 부는 바람의 리듬이자 급상승하는 참새와 도약하는 호랑이의 리듬이다. 그것은 또한 언어의 리듬이다. 이러한 종류의 리듬에는 정확히 조정된 리듬의 반복적이고 고르게 주어지는 강세가 결여되어 있다. 음악에서 이 리듬은 그림의 부분들이 때로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또 때로는 서로 다른 힘들이 한데 뒤엉키듯이, 일련의 불규칙한 음파 형태들이 다양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진다. 이를 표준 용어로 프레이징(phrasing)이라 부른다.
(중략)
이 두 종류의 리듬('박자'와 '프레이징') 없이는 음악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자는 시간에 질서를 부여한다. 박자는 작은 무리의 음들과 때로는 좀 큰 무리의 음들을 묶어 음악을 그릴 수 있는 일종의 격자판을 제공한다. 한편 프레이징은 음악에 일종의 이야기를 부여한다. 그 매커니즘에 의해 작품은 비로소 웅장한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다. 말하자면 박자는 작은 규모로 음악적 시간을 구성하고 프레이징은 대규모로 구성한다. 박자가 없으면 음악은 그레고리오 성가처럼 정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프레이징이 없다면 음악은 반복적이며 진부해질 것이다. 
(중략)

프레이징을 일종의 리듬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자와 마찬가지로 프레이징 역시 음악에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악보에 적혀 있는 대로 세 번째 박마다 악센트를 주는 대신 두 번째 박마다 악센트를 주어 곡의 박자를 혼란시키면, 그 곡은 당신의 귓전에서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쉽게 감지할 수 있는 박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리듬적이라고 하더라도 관련된 음들이 더 이상 같이 들리지 않아 그 곡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이는 음악을 리듬적으로 만드는 것이 박자의 박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지 과정을 구성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프레이징 표시가 잘못 찍히면 마치 그림의 윤곽이 다른 그림의 윤곽 위에 포개진 것처럼 음악도 매우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중략)
프레이징에서 의미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언어의 리듬이 무너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 "Four score...and seven years ago...(8십...7년전...our...fathers...brought...forth" 대신, "Four...score and seven years...ago our...(4...20과 7년...전)fathers brought...forth"이라고 말했다고 하자. 즉시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분명해진다. 보다 큰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묶이는 낱말들이 함께 말해지지 않았다. '몇 년 전에(years ago)'는 의미를 지니나 '년 전에 우리(ago our)'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의 리듬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말의 흐름을 의미 있는 묶음으로 자르는 것을 뜻한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잘못 프레이징된 음악은 틀린 박자로 연주하는 음악처럼 무너지고 만다.

                        -로베르 주르댕 저, <Music, the brain, and ecstacy>중에서

 
위 영문이 말하고자 하는 건 쉽게 얘기해서 이런 거다. '아빠가 방에 들어갔다'인가, 아니면 '아빠 가방에 들어갔다'인가? 의미도 의미지만, 발화시 리듬의 변화에도 주목하라.

'선율리듬'이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은 일단 프레이징이 작곡자에 의해 행해지거나 연주가에 의해 인지되고 나면, 프레이징이라는 개념으로 흡수될 것이다.  음고선과 율동(리듬)의 결합이 '선율'이라는 개념이라면, 여기서 음고선과 프레이징을 배제한 채 오로지 음표들의 갖가지 음가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여러 형태의 리듬을 막연하게 '선율리듬'이라고 특칭한 것인데, 프레이징을 생각하는 단계라면 막연한 그것은 명료한 프레이징리듬에 귀속시켜도 무방할 것이다.

 

※위 영문에 대한 참고

 fourscore 미국·영국 [fɔ́:rskɔ́:r]

 score 미국·영국 [skɔ:(r)]

 

 

 

여린내기적 특성이 센내기의 그것에 비해 인지적으로 보다 고차원의 것으로 느껴지는 건, 박자가 생성하는 리듬과 프레이징이 생성하는 리듬 간의 불일치에서 기인한다. 이를 그림으로 표헌하면,

센내기 음악의 경우  : 둘 다 일치함.

 IㅡㅡㅡㅡIㅡㅡㅡㅡIㅡㅡㅡㅡIㅡㅡㅡㅡI  : 박자에 의한 리듬
 Iㅡㅡㅡㅡ ㅡㅡㅡㅡIㅡㅡㅡㅡㅡㅡㅡㅡI  : 프레이즈에 의한  리듬


여린내기 음악의 경우 : 어긋남
        IㅡㅡㅡㅡIㅡㅡㅡㅡIㅡㅡㅡㅡIㅡㅡㅡㅡI  : 박자 리듬
  IㅡㅡㅡㅡㅡㅡㅡㅡIㅡㅡㅡㅡㅡㅡㅡㅡI        : 프레이즈에 의한 리듬

위에서 이미 예를 들었지만, 박자리듬과 프레이즈에 의한 리듬의 '어긋남'에 대해서는 아래의 음악을 다시 한번 참조하라.


 

 

인지적 차원에서는 아래의 것이 두뇌의 노력을 더 필요로 함은 물론이다. 저학년층의 동요가 갖춘마디로만 작곡된 것은 이런 연유에 기인하다. 물론 센내기 악곡도 선율리듬을 폴리리듬 따위로 복잡하게 조직하면 경우에 따라서는 여린내기 형식의 어떤 악곡보다 인지적으로 상위에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는 그런 예외적인 것은 논외로 한다.


 

※참고 2 :

 곁가지 같은 얘기를 추가하면, 서양음악의 경우 센내기로 시작하지만 여린내기의 특성을 보이는 음악은 아주 흔하다. 익히 알려진 곡을 예로 들어보자. <Try to remember>는 갖춘마디로 시작하므로 프레이징을 다음처럼 하기 십상이다.

 

 

비록 갖춘마디이기는 하지만, 위의 프레이징은 전적으로 오류이다. 위 곡은 여린내기적 특성에 의해 다음과 같이 프레이징해야 한다.
사실 이 경우는 악보로만 파악할 때는 모호하지만, 가사나 가수의 호흡 위치로 확인할 수 있다(가수들은 프레이즈가 시작되는 음들을 반 박자 처리하는 식으로 프레이징을 하기도 한다).어쨌거나 서양음악의 여린내기적 특성을 보여주는 일례다.

 

 

반대로 여린내기 형식의 곡이지만, 일부분이 센내기의 특성을 보여주는 곡도 간혹 있다. 아래 주황색 활선으로 표시한 작은악절을 보라.


 


아마도 센내기와 여린내기의 극단적인 대비는 <Another bites the dust>의 베이스 기타와 기타가 유니즌으로 연주하는 인트로 부분일 것이다. 센내기로 조직된 앞 부분(주황색 활선)과 여린내기로 조직된 뒷 부분(빨간색 활선)을 비교하여 리듬감의 차이를 느껴보라. 이 대비감은 베이스 기타의 중요한 역할인 리듬감을 강화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 결론은 이거다. 16분음표의 세밀한 분할이나 3잇단음표 같은 폴리리듬, 또는 당김음에 의한 선율리듬의 확장이 악곡의 성격으로 인해 허용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보의 풍부함을 위해 여린내기 악곡을 선택하여 프레이징이 생성하는 리듬과 박자가 생성하는 리듬의 엇갈림 효과를 노리는 것도 가능하다. 서양음악의 특성 탓이지만, 미국의 국가(國歌)는 후자의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

 

 


 

<애국가>를 <조국찬가>와 비교하면, 전자는 센내기 형식을 끝까지 고수하는데 반해, 후자는 센내기 형식과 여린내기 형식을 적절히 배합하여 음악적 정보(효과)를 증가시켰음을 알 수 있다.

 


 

베토벤은 <환희의 송가>에서 선율리듬, 혹은 프레이징의 단조로움과 반복에 의한 지리함(두 번째 작은악절과 네 번째 작은악절의 선율이 일치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다음의 방법으로 그것을 극복한다.

 

1. 오케스트라 반주의 리듬을 셋잇단음표나 부점음표(정확하게는 셋잇단음표에서 첫 번째 음과 두 번째 음을 붙임줄로 이은 것)의 진행으로 구성함으로써 활기를 부여.
2. 네 번째 작은악절의 첫 음(주황색 동그라미 표시한 곳)에 싱코페이션을 부여.
3. 악보에서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빨간색 V표시한 곳의 선율 변화.

 

무엇보다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네 번째 마디를 향해 상승하는(고조되는) 정서를 부여하기 위해 세 번째 작은악절의 3~4마디 부분의 화성을 어떻게 진행시켰는지 느껴보라(달리 악성인 건 아니다). 그리고 같은 악식으로 조직되어 있는 <애국가>에서 결여된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화성학적으로 그다지 높은 경지는 아니지만, 이 부분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즉 화성을 잘 다룬다는 것은 무조건 어렵고 복잡한 화음진행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미학적 필연성에 따라 요구되는 정서에 맞게 적절히 잘 배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4분 53초 지점부터 합창에 의한 <환희의 송가>가 나온다.

 

다시 <조국찬가>를 살펴보자. 선율리듬의 조직에 있어서도, 행진곡 같은 위풍당당함-동적인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미국의 국가(國歌)처럼 <조국찬가>역시 부점음표를 적절히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센내기로 인해 단조로워질 수도 있을 악절에 동적인 리듬을 부여한 것이다. 사실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나 맨시니의 <핑크팬더>같은 가벼운 활기를 띈 음악에 나오는 부점음표의 연속만 아니라면, 국가(國歌)의 경우에는 행진곡과도 같은 위풍당당함에의 표현을 위해 적절히 배치해야 좋다. 하지만 <애국가>에서는 '화려강산~' 이후에 나오는 반주부에만 부점음표를 배치했을 뿐 주선율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게다가 악식을 보면, <조국찬가>의 경우 첫 작은악절과 두 번째 작은악절이 멜로디 라인과 선율리듬 모두 통일성을 보이는데 반해, <애국가>의 경우는 첫 마디의 '동해~물과'에 해당되는 약강격은 리듬은 통일성이 없어서 뜬금없이 느껴진다.)

 <애국가>의 경우는 <조국찬가>에 비해 길이가 짧아서인지, 아니면 악곡의 구성상 어쩔 수 없었는지 사실 여린내기로의 전환이 여의치는 않아 보인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센내기 형식으로 일관하는 것이 딱히 잘못이랄 것도 없다. 음악적 정보(효과)를 다른 재료로 증가시킬 가능성도 있으니까 말이다.<위풍당당 행진곡>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센내기 형식의 음악에는 센내기 형식만의 미학이 있다. <애국가>의 문제는 센내기 형식으로 일관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것과 프레이징의 단조로움을 극복할 다른 수단 역시 별 볼 일이 없다는 데 있다. 

애국가의 작은악절들 중 비교적 잘 된 것은 세 번째의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정부인 네 번째 작은악절과 대비되면서도 9~10마디(각각 '무~궁화'와 '삼~천리')에서의 통일성(선율리듬)과 점진적 상승 분위기(음정)가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부분은 (적어도 피아노 악보로 확인해 본 결과) 화성적으로는 비교적 빤하지는 않지만, <환희의 송가>의 세 번째 작은악절의 3~4마디에서 느낄 수 있는 화성적 고조의 느낌이 결여되어 있는 점은 아쉽다.

그리고 네 번째 작은악절의 앞 두 마디, 즉 '대~한사람 대한~으로'부분은 좀 심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선율은 하향 순차진행(솔-파-미-레-도-시-라-솔)하는 장음계-음고선에 율동을 부여한 것인데, 하향 순차진행이 한 옥타브에 걸쳐 지속되는 탓인지 악곡의 크라이막스 부분을 수놓기에는 좀 재료가 부실한 것이 아닌가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물론 순차진행하는 장음계는 어느 경우이든 반드시 지양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이런 류의 선율은 너무나 많다. Bb장음계를 마주르카 형식으로 나열한 아래의 악보를 참조하라).

 



썩 흥미롭지는 않더라도 한 옥타브에 이르는 그 순차진행을 한 번만 사용했으면 그리 흠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정보를 두 번이나 반복(두 번째 작은악절과 네 번째 작은악절에서)한다는 거다. 가사가 4절까지니, 우리는 도합 여덟 번에 걸친 '솔파미레도시라솔'을 듣게 된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똑같이 여덟 번이나 반복하는 사이먼&가펑클의 <The Boxer>라는 노래의 후반 반복구보다 훨씬 지루하다(그 지루함은 가사를 음미하는 것으로 대신하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뭐…,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vexations)>처럼 840번 반복하라는 것에 비하면 고문일 것까지는 없지만. 

 

3분18초 지점의 '라일라라~'하는 반복구는 무려 여덟 번이나 반복된다. 작곡자인 폴 사이먼은 이 선율을 너무나 좋아해서 그런 걸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청자를 괴롭히려 작정하고 이러는 것 같다. 좋은 얘기도 반복되면 짜증나는 법.

대신 그 고통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광명과도 같은 기타 소리(3핑거에 의한 아르페지오)와 조우하는 즐거움도 준다. 즐거움은 고통에 의해 배가되리니…ㅋㅋ.


음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음계의 경우를 살펴보자. 물론 애국가를 듀크 엘링턴의 <In a sentimental mood>에서처럼 온갖 음계로 치장할 수는 없다. 국가(國歌)는 대개의 모든 국민이 부를 수 있을만한 노래가 되어야 하므로 부르기에 어려우면 안 된다.

 

군 복무 시절, 훈련소에서 경험한 일이다. 지금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군가 중에 단조로 시작되었다가 후반에 병행조인 장조로 바뀌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연병장 구석에 10열종대로 쭈그려 앉아 소대장의 군가 교육을 받은 이후로부터 훈련소를 퇴소한 그날까지 그 군가를 제대로 부른 훈련병은 거의 없었는데, 후반의 장조 부분은 그냥 단조로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올바른 음으로 유도하기 위해 집중하여 장조로 부르고자 했던 나의 의지도 결국 다중의 엉터리(?) 소리에 함몰될 수밖에 없었다(기회가 있으면 한번 시도해 보기 바란다. 모든 사람들이 장조의 선율을 단조로 부르고 있을 때 홀로 장조의 곡조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겨우 근접조에 의한 전조조차 제대로 부르지 못한다면, 가능한 한 단조롭게 만들어야 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국가(國歌)는 음악적 역량을 온갖 재료로서 시도할 여유가 없다. 순수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음계가 단조롭다는 비판 역시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지만 '국민적 떼창'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약간의 변화마저 결벽적으로 배제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시 미국 국가를 보자.

 

 


 

노란색으로 V 표시한 '솔#'음을 주목하라. (위의 악보대로라면)D장조의 곡이므로 당연히 단순한 D메이저 스케일이 나와야 하고, 따라서 서브도미넌트 위치에는 당연히 G(솔)음이 와야하는데,

 

 

미국 국가(國歌)의 경우엔 G(솔)음이 아닌 G#(솔#)음이 나온다.

 


편의상 D-리디안 모드의 악보를 명시했지만, 사실 이 G#음은 위의 악보처럼 D-리디안 모드에서 비롯된 건 아니고, 부분적인 전조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 즉 G#음은 A장조로의 부분적인 전조의 결과일 뿐이고, 이런 식의 근접조에 의한 전조는 화성학적으로 그다지 심오한 것도 아닌 아주 흔한 것이다(혹자는 이런 식의 부분적인 전조에 대해서는 전조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만).

 

 

 

기능적으로 보자면 이 G#음의 배치는 명백히 다음 마디의 A음으로의 이끔음leading tone역할을 부여하기 위함인데, 빤한 G음으로의 연결을 거부함으로써 선율의 색채감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G#음이 환기하는 효과는 크다(이는 G#음을 그냥 G로 변환하여 연주해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이 색채감은 위에서 언급한 <위풍당당 행진곡>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다.

이번에는 파란색 V로 표시한 D#(레#)음을 주목하라. 성부로 따지면 앨토가 담당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도 D장조라는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E단조로의 부분적인 전조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전조에 의한 스케일의 변화는 진부함을 극복하는 여러가지 음악적 기법들 중의 하나이긴 한데,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사실 2차 속7화음(2ndary dominant 7th chord)이 유도하는 이러한 변화는 작금으로서는 너무나 흔한 것이라서 진부함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효용은 많이 희석된 상태다. 그럼에도 위 음들의 효과가 좋은 이유는 무엇보다 선율 자체를 잘 조직했기 때문이리라(이 점은 <조국찬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는데,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이 정도의 음악적 변화가 국민 모두가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공공적 당위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님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애국가의 주선율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하나도 없이, 단 하나의 G장조 음계만으로 일관한다. 사실 작곡가가 애초에 국가(國歌)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도 아님에도(애국가의 원곡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한국환상곡'의 일부분이다) 이 정도의 선율적 빈약함으로 일관하는 것에 대해서 과연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한국인의 정서는 단순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이제까지의 장황한 얘기의 요점은 이거다. 여러가지의 음악적 재료들 중에 어느 하나가, 또는 두 개 정도가 단조로운 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 단조로움을 극복하거나 보충할 다른 음악적 재료(정보)가 충분한가의 여부이다

누차 얘기했지만, 하나의 음계로 일관하는 게 잘못 된 건 아니다. 문제는 선율리듬, 혹은 프레이징의 단조로움으로 인해 음악적 정보라는 측면에서 결손이 생긴 마당에, 또다른 재료로 그것을 상쇄하거나 보강해야 하는 과제가 남은 상황에서 그 어느 것도 음악적 정보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만족시키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만일 미각의 단순함을 추구하는 고객의 입맛에 맞춰야 하는 상황이라면, 최소한으로 한정한 식재료로 최상의 맛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럴 능력이 부족하면 식재료를 조금은 늘릴 생각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기본 식재료에서 피망을 추가할 경우 맛이 확 살아날 수 있음에도, 구태여 피망을 배제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고객이 전부 '크레용 신짱' 신노스케도 아닐 텐데.

 




이제 화성을 살펴보자. <애국가>의 경우 모자라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을 정도의 적절한 범위 내의 화성을 진행시키기는 하는데, 화성 진행으로 인한 음악적 고조의 효과(<환희의 송가>에서의 세 번째 작은악절의 화성을 상기하라)가 미미한 탓인지 화성은 단순한 배경으로서 다소 밋밋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점층적인 진행으로 곡의 절정을 암시하는 세 번째 작은악절('무~궁화'로 시작되는 부분)은 각 성부들이 대부분 병진행의 관계를 보이고 있는데, 이어지는 절정부인 네 번째 작은악절('대~한사람'으로 시작되는 부분)의 첫 마디 세 박째까지 구태여 소프라노와 테너, 그리고 베이스 성부가 세 번째 작은악절처럼 병진행으로 진행해야만 했는지 의문이 든다.

※참고3  : 미국 국가(國歌)의 화성 일부분 분석
 
자리바꿈한 속7화음을 적절히 배치하여 순간적이지만 음계의 변화와 화성의 다양함을 동시에 도모한 것에 주목하라.

 

 

첫 작은악절의 화성 : 
I(D)--V(A/C#) // VIm(Bm)--V7/VIm(F#7/A#) // VIm(Bm)--V7/V(E7) // V7(A7)---

(위 기호에서 '//'표시는 악보의 마디를 의미한다. 자리바꿈 화음의 경우 표기가 여의치 않아 영문 화음 기호에 표시했다. 예를 들면  A/C#은 D장조의 도미넌트인 <라+도#+미>화음의 하성(下聲)에 근음인 <라>대신 <도#>을 배치한 화음을 표시한 것이다.)

 

소프라노 성부의 주선율과 베이스 성부의 대선율이 드러내는 반진행적 대위법도 독특할 것까지는 없어도 아주 효과적이다. 특히 세 번째 마디는 주선율과 대선율이 각기 시차를 두고 선율이 도약하는데(푸른색 표시한 곳), 이 불안정성을 어떻게 서로 보조하고 있는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어쨌거나 이 역시 화성학에서는 그다지 심오하다고는 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순수음악이 아닌 국가(國歌)의 차원에서는 이 정도 선까지만 화성적 변화를 꾀하는 게 좋다.

 

 

사족 1 :
이렇게 쓰고 보니 왠지 '미제는 좋고 국산은 후지다'는 발상 같아 좀 꺼림칙해지는데, 나는 사대주의자도 아닐 뿐더러, <조국찬가>는 높게 평가하므로 무조건 국산은 후지다는 발상을 하는 것도 아님을 노파심에 밝혀둔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내 얘기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고, 따라서 내 귀에는 좋지 않게 들린다는 얘기다. 뭐, 물론 변 모 씨 같은 작자들은 이런 주관만으로도 종북이라고 할지도 모르니 미리 선수를 치자. 북한의 국가(國歌)도 후졌다. 그리고 미국의 국가는 '졸라' 멋지다.
(이렇게 말하면 "'북괴의 노래'를 '국가(國歌)'라고 한 걸로 보아, 그러니까 '나라 국'자를 쓴 걸로 보아 북괴를 나라로 인정한다는 얘긴데, 결국 종북아닌가?"라고 토를 달지도 모르겠다만.)

정치색을 배제한 채 음악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국의 국가가 애국가보다 훨씬 경건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데, 김동진 선생의 <조국찬가>는 그것에 필적한다고 생각한다.

 

 

'자~유평화'부분의 '평'에 해당하는 음의 음정이 상당히 불안한 건 좀 아쉽다. 유일하게 변화된 음계로 쓰인 그 부분은 다음의 악절로 넘어가는 것을 유려하게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분명한 기억이 있다. 다섯 살 무렵(당시의 나이는 당시에 내가 살던 장소가 증명한다. 그곳은 내가 여섯 살 때 P동으로 이사 오기 이전에 살았던 혜화동이었으니까), 바깥으로 통하는 부엌 문을 열었을 때 따뜻한 햇살이 어두웠던 부엌을 환하게 비췄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조국찬가>의 선율이 빛처럼 감동적으로 쏟아져나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기억.

어쨌거나 이 곡을 들으면 없는 애국심도 마구 생긴다…. 믿거나 말거나.

 이 버전의 편곡은 좀 바뀔 필요가 있다 .               
 어쨌거나 이 버전도 마찬가지로 '평'부분의 음정이 전혀 맞지 않는다(특히 2절을 부를 때. 대체 레코딩 디렉터 가 누구길래 이런 걸 간과했을까?). 직업적인 성악가(롹커 포함)이 정도의 음계 변화도 어려워하면 곤란하지 않을까.

사족2 :

 

이 글을 쓰는 동안 검색하여 알게 된 사실인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다. 하긴, 그다지 심오한 얘기는 아니다만.
http://blog.naver.com/yoongi0919/100124102868

지금 막 발견한 다음의 글은 반갑기까지 하다.
http://c.hani.co.kr/hantoma/1775579
여기서 다음의 글을 주목하라.

작품성 그 자체에 대한 비판도 중대하고 다면적이지만 중요한 몇가지를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음악적 선율이 결여되어 있다. 한국어법에 맞고 한국정서가 스며들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안익태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부분부터 서양음악 기법에 따라 약강약강의 음보를 적용하여, 국가에 필요한 우렁찬 기상이 죽어있다는 비판도 있다. 
셋째, 약강약강의 음보는 가사를 왜곡되게 분절하는 오류마저 범하고 있다. “동, 해물과 백, 두산이” 식으로 한국 말 고유의 어법에 어긋나게 굴절, 분절시킨다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서양음악의 기법에 따라 약강약강의 음보를 적용'한다는 얘기는 여린내기가 서양음악의 주류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에서 적용된 음보로 얘기하자면 앰피브랙(Amphibrach), 즉 '단장단'격(格)이 된다(영시의 개념으로는 '약강약'격).

                                                       출처 : 신현수 저 <악상 해석과 표현의 기초>

 

'The road'나 'The long and winding road'에서 보듯이 '정관사(단,또는 약)+명사,혹은 명사구(장, 혹은 강)'라는 서양 언어의 특성에 이미 음악에서의 여린내기가 배태되어 있는 거다. 반면에 한국 말은 그렇지 않다. '한국 말 고유의 어법에 어긋나게 굴절, 분절시킨다'는 얘기는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한국 말 고유의 어법에 어긋나게 굴절, 분절시킨다'는 얘기는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 견해대로라면, 여린내기로 쓰인 가요는 모두 다 한국 말 고유의 어법에 어긋나므로 여린내기 자체를 지양해야만 하는 걸까? 서양음악을 받아들인 이상 그럴 수는 없다. 여린내기 형식이 한국 말 고유의 어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음악적 효과가 큰 그것을 모두 폐기해야 할까? 이런 식이라면 <조국찬가>도 올바르지 못한 것이 된다.
나는 고유의 어법에 어긋났다는 점보다는, (보사노바나 레게 음악도 아닌, 중후해야 할 애국가에)'약강'의 운율을 센내기 형식으로 부여하여 어긋난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다시 말해, <애국가>의 문제는 '서양음악 기법에 따라 약강격의 음보를 적용'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서양음악 기법에 따라 약강격의 음보를 잘못 적용'했다는 데 있다.

 

물론 위의 글을 쓴 필자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의 생각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적어도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애국가라면, 서양의 어법보다는 우리의 어법을 중시하는 쪽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국가(國歌)에 한정한다는 전제가 있다면,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그다지 못 받아들일 것도 없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은 들지 아니한 것도 아니다.


 

 

 

 사족 3 :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난 애국가를 들으면 감격(感激)스러워진다. 신성한 애국가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음악은 '음학'이 아니다. 무엇보다 감성적인 것을 이렇게 분석한다고해서, 그게 객관성의 척도가 되나?"
그리고 덧붙여,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만들어 보든가."
라고 한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1. 난 애국가를 들으면 다른 의미로 '감격(減格)'스러워진다.
2. 애국가는 교조적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3.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부처를 만나려면 부처를 죽여라.'
(뭔 의미냐고? 사실 나도 모른다. ㅋㅋ)
4. 나의 경우, '음학'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대여섯 살 때 이후로, 단 한 번도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따라서 당신이 주관적으로 '멋지다'고 생각하여 반론한다면, 나 역시 주관적으로 '후지다'고 판단하여 주장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5. '맘에 안 들면 네가 만들어 보라'는 말에 대한 답변 : '주문한 음식이 원하는 맛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더라도 본인이 직접 만들 수 없는 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의미로 한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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