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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잡글쓰기

가오

 

 

지난 주말, 대학 동아리 동기들과 인근 고깃집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다. 파장에 이르렸을 무렵 알코올에 지배된 탈(脱)경제적인 정신은 '고작 10만 원쯤이야...'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깃값을 치렀다. 그리고 합리화. '멀리서 친구들이 찾아왔으니 내가 사는 건 지당한 일 아닌가.' 하지만 뼛속 진심은 이럴 것이다. "1인당 2만 5천 원씩 각출!" 아, 하지만 이렇게 말하자니 왠지 '가오(오픈사전 정의 : 남자의 자존심)'가 안 선다.

 

자리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후, 고깃값을 내가 지불했다는 걸 알아차린 여자 동기가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게 5만 원을 건네며 말했다. "너, 다음부터 가오 잡지마." 그 순간 영화 <베테랑>의 황정민처럼 말하고 싶어졌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내 통장 잔고의 바닥을 걱정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갸륵하다.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2차는 나머지 친구들이 계산했다.)

 

돈은 없어도 가오가 있는 유명 인물들 가운데서는 단연 쇼팽이 으뜸일 것이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발췌하면,
"...그의 학생들은 모두가 최상류층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는 수업료 명목으로는 한푼의 돈도 받지 않았다. 대신에 학생들이, 쇼팽이 창 밖을 내다보거나 손톱을 다듬고 있는 동안에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이십 또는 삼십 프랑 정도의 돈을 벽난로 선반 같은 곳에 올려놓고 나오곤 하였다. 그는 자존심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자신이 궁색하다는 내색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음악학원에서 '레슨비 봉투'가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다. 재수강할 때가 된 원생들에게 "레슨비 내라!"라고 말하는 대신 레슨비 봉투를 슬쩍 건네기만 하면 되니까(어쩌면 쇼팽은 레슨비 봉투조차 가오가 안 서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슨비를 지불하지 않는 원생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쇼팽처럼 가오 잡고 창 밖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있어야 할까. 이럴 때 아마도 원생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아, 선생님께서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을 하고 계시는구나...'
어떻게 하면 가오 안 상하고 레슨비를 받아낼까 고심하는 중이거든?

 

여자 동기가 5만 원을 내게 건네는 순간, 입과 마음이 따로 논다. 가오 잡는 입은 "됐어, 얼마나 한다고...그냥 다음에는 네가 사면 되잖아"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역시 가오보다 경제적 현실을 선택한다. 자의식 과잉에 의해 분열되어 유체이탈한 하나의 '나'가 호주머니에 슬쩍 돈을 집어 넣는 또 하나의 '나'를 바라보며 씁쓸히 중얼거린다. 졸라 가오 안 서는 새끼...

구심(口心)불일치의 어중간한 가오는 가오가 아니다.

 

 

교훈 :
더치페이의 생활화.

 

2017.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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