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홀로 방콕하고(방에 콕 쳐박혀) 있다가 오후 9시 경 맥주와 안주거리를 사러 오피스텔 건물을 나선다. 바깥 바람이 몹시 차다.
쏘세지 안주에 맥주 두 캔을 비운 뒤 케이블 TV에서 방영해 주는 영화 <천장지구>를 보는둥 마는둥 재시청한다. 이 영화만 보면 하얀 웨딩드레스와 가스통이 먼저 떠오른다.
훗날 '천장지구'라는 제목이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것임을 알았다. 검색해 보니 '하늘과 땅은 영구히 변함이 없음'이라는 뜻이란다. 문득 궁금해진다. 감독은 왜 이것을 제목으로 삼았을까?
미래가 불투명한 건달과 양갓집 규수의 러브 스토리. 참으로 식상하다. 이런 스토리에는 필연적으로 규수 부모의 극심한 방해공작이 등장하는데, 이런 부모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관객의 공분을 사기 마련이다.
청춘이 지나가도 한참 지나가버린 나이에 이르러 규수의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청춘이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부모 세대들은 경험상 생활이 사랑보다 장구함을 안다.가스통이 웨딩드레스보다 장구하다. '곳간에서 사랑 난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건 아닐 테다.
<자기 앞의 생>을 통해 로맹가리는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없어도 곳간의 안정감만으로도 잘 살고는 있는 듯하다.
극중 유덕화가 가스통에 맞아 요절하게 됨으로써 저들의 사랑은 하늘과 땅만큼 장구해진다. 생활의 장구함이 저들의 사랑을 질식하게 할 일은 없어진 거다.
결혼 생활의 실패가 곳간의 실패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인들의 견해를 상기하다가 씁쓸한 기분에 젖는다. 마켓에서 직불카드를 긁으며 속악하게도 로맹가리의 말을 비틀어서 마음속으로 뇌까린다.
사랑은 곳간 없이는 살 수 없다.
청춘이 오래전에 지나가기는 했다.
-2017.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