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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괴짜교수의 철학강의


괴짜교수의 철학강의

저자
쓰치야 겐지 지음
출판사
문학수첩리틀북 | 2007-10-0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재즈피아노 솜씨가 상당하고 스스로를 가리켜 ‘예술을 좋아하는 거...
가격비교

 

 

 

 

 

 철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무했던 20세의 나이에, 나는 처음으로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봤다. 당연히 '이데아'가 뭔지, '물자체'가 뭔지, '표상'이 뭔지, 죄다 이해 밖일 때다. 그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는 이문열 작가의 단편, <이 황량한 역에서>에서 '이 세계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아닌 쇼펜하우어'라는 대목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첫 장부터 가독성이 떨어졌다. 인내심을 가지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억지로 유추해가며 읽었지만 지구력이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내가 그리도 증오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무기화학'책만큼 어려웠다.
 

 무기화학에 관한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무기화학 시험을 앞둔 어느 날, 나는 한 후배의 자취방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자주 '바른생활 맨'이라고 불러주었던, 일년 차의 그 후배는 군대 공익 요원(이른바 '방위') 출신이었던 터라 전역 후 복학한 후에는 현역 출신이었던 나와 같이 3학년이 되어 같은 강의를 들었던 거다.

 무기화학 책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오직 그림과 글자의 차이 뿐이었다. 스트레스를 한껏 받은 내가 담배로 그의 자취방을 너구리 굴로 만들자, 그가 방문을 활짝 열며 내게 말했다.
 "형...좀 밖에서 피우시면 안 되겠어요?"
 나는 열등생답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담배 연기, 그러니까 이 기체분자들은 열역학 제 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에 의해 이 좁은 방구석에서 저 넓은 우주로 자연히 이동하게 되어있고, 가역 반응은 일어나지 않아."
 담배 연기 따위에 엔트로피를 적용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방 안에서 아무리 연기를 피워도 결국은 사라진다'는 얘기다. 억지 논리(?)에 대해 그가 이렇게 항변했다.

 "형은 지금 t(시간)의 경과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결국 실내 흡연을 포기하고 공부에 집중. 그러다 30분 정도 지났을 때 책을 집어 던지며 내가 말했다.

 "아....봐도 뭔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다. 다 때려치울까보다....근데, 넌 이게 뭔 내용인지 보면 아냐?"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그가 우문현답 하기를,
 "콩나물 시루 밑으로 물이 다 빠진다고 물 안 줘요?"

 나 역시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지금 t의 경과를 간과하고 있다."

 시험은 바로 코 앞이고, 무기화학에 관한 내 지식이 조금이나마 자랐을 때는 이미 시험이 끝난 이후라는 말이다.

 

 

 철학서를 보는 일은 그와도 같다. 밑으로 물이 다 빠져 나가도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해도 정신의 키는 조금 자란다(고 믿는다). 내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해한 부분은 고작 이 정도다. '고통이 해소되면 만족이 찾아오나 만족이 지속되면 권태가 찾아오고, 따라서 인간은 만족과 권태의 시계추를 왔다 갔다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들인 돈이 아까워서 결국 끝까지 읽기는 했지만 저자인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하는 본질로서의 세계인 '의지'에 대해서는 베일에 싸인 듯 흐리멍덩하기만 했다. 내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렇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가지의 깨달음을 얻었다.

 

 1. 철학서는 '개념어'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읽기 어렵다.
 2. 철학사(史)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읽기 어렵다.
 3. 철학자란 쉬운 말도 어렵게 쓰는 기발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후로 접근한 철학책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후에 접한 것들에 비하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차라리 쉬운(?) 책이었다. <죽음의 이르는 병>,<에티카>등....특히<죽음에 이르는 병>은 '졸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었던가?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自己)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자신에 대한 하나의 관계다. 바꿔 말하면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의미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무한성과 무유한성의,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은 한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이 방법으로 고찰한다면, 인간은 아직 자기(自己)가 아니다.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중에서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고 하는 관계의 내부에 있는 자기를 뜻한다. 따라서 자기란, 관계를 의미하지 않고 관계가 그 자신에게 관계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젠장, '관계'라는 낱말이 여섯 번이나 나온다. 대체 이게 뭔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스피노자의 <에티카>도 마찬가지로 독해 불가. '제1부:신(神)에 대하여'부분을 읽다가 강력한 수면효과를 맛보았다(약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10페이지'씩이나' 읽었다). 이후 그 책은 종종 라면 냄비의 받침으로 쓰다가 책장의 장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표지 그림 설명 :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다가 

                                                               '수면에 이르는 병'에 걸린 사람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무엇보다 기초 개념의 부족 때문일 거다. 기초 지식이 부족하니 그저 명성만 듣고 이 책 저 책을 무작위로 선책하고는 곧 지적 열등감에 빠진다. 초딩 산수도 제대로 떼지 못한 상태로 <수학2의 정석>에 도전한 격이랄까. 하지만 무지(無知)를 감안하더라도 철학서들이 대개 어렵게 씌여졌다는 건 부정하지는 못할 것 같다. 아마도 지적 허영 때문이 아니라면 '사유에의 노력을 게을리하는 즉물적(卽物的) 인간들은 철학에 접근하지 말라'는 저자들의 단호함 때문일까? 혹은 일종의 신비주의?
 어쨌거나, 당시엔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철학자들은 평상시에도 저렇게 관념적인 어려운 말들을 쓰는 걸까?'

 

철학자의 어머니 : "늦었구나. 어서 오렴. 배고프겠구나. 어서 밥 먹자."

철학자 : "어머니. 인식의 선험적 필요조건인 시간이라는 것의 시초를 한정하면 제가 늦  은 건 사실이지만, 시작점이 없다는 것도 맞는 얘기고, 그렇다면 이율배반에 빠지는 우리 의 이성을 고려할 때 제가 늦었는지 어쨌는지 판단할 주체는 없을 것이지만, 음식의 물자체는 알지 못하더라도 음식의 외관과 맛에의 현상을 지각하는 나의 주체는 공복을 현상계에서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밥을 먹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예가 적어도 없지는 아니한가 보다. 자전적 소설인,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이런 인간이 나오기는 한다.

 "아니 블로크 군, 도대체 날씨가 어떤가? 비라도 왔나? 모르겠는걸. 청우계는 좋은 날씨를 보이고 있는데."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대답밖에 받지 못했다.
 "나는 비가 왔다, 안 왔다고 운운하는 말을 절대로 입 밖에 낼 수 없지요. 나는 감연히 물질적인 우연사의 권외에서 살기 때문에, 나의 감각은 물질적인 유연사를 나에게 통고하는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어이없는 녀석. 저능아야, 네 친구는." 하고, 블로크가 돌아간 후 아버지가 나에게 말했다.

                            

 대학 1학년 때, 철학개론 시간의 일이 기억난다. 강의 첫 날에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은 저마다 '삶을 깨닫는 것', 혹은 '진리를 알기 위한 것' 따위의 뜬구름 잡는 답변을 했으리라(솔직히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솔직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튀고 싶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변을 했다. '철학이란, 사실은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을 사항을 사변적(思辨的) 논변으로 포장하는 기술'이라고.
 아니다. 좀 솔직해지자. 당시의 내가 그런 문어체(文語體)를 구사했을 리가 없다.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했을 거다.

 "철학이란, 애초에 별 것 아닌 시시껄렁한 주제를 적당히 어려운 말로 버무리고 뻥튀겨서 사람을 홀리는 말장난 아닙니까?" 
 도발적인 질문에 대한 교수님의 응답은 아직도 선연하다. 그는 내 견해를 결코 묵살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개진하는 철학자도 있습니다."

 

 이제 본서인 <괴짜 교수의 철학 강의(원제:쓰치야 교수의 철학 강의)>에 대한 얘기로 들어가자. 책의 표지만 놓고 보면, 이건 철학서라기보다는 만화책이라 할 만하다. 아마도 '철학은 어렵다'는 고정관념 아닌 고정관념을 어느 정도 희석시켜 좀 '만만한' 책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포석일 게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떨까? 대중소설처럼 쭉쭉 읽히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비교적 재미있고 읽기에 수월한 편이다. 다만 책 제목을 <철학강의>로 한 것엔 좀 아쉬움이 있는데, 다소 오해를 야기할 만한 제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대개의 이유는 뭘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형이상학에 대한 궁금증 때문일 거다. 사과가 왜 떨어지는지는 뉴턴을 공부하면 되지만 삶의 본질이나 의미에 대한 궁금증은 오로지 철학을 통해서만 해소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거다. 혹은 영화 <매트릭스>의 '미스터 앤더슨'처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배후를 알고 싶었기 때문일 거다. 피안(彼岸)에 대한 동경이랄까.
 이런 형이상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인해 우리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한다. 비록 실생활은 컴퓨터 하드 속의 야동을 리비도 배출의 도구로 삼는 '허리하학적 삶'으로 점철되어 있을지라도.

 

 '만만해 보이는' 이 책은 제목만 놓고 보면 일반적인 철학개론서처럼 보인다. 철학이 꼭 형이상학만 다루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편견으로는 왠지 전통적인 형이상학 얘기가 주를 이룰 것만 같다. 실제로 철학에 대한 우리의 편견 중 하나는 '철학이란 다름아닌 지각을 벗어난 형이상학적 존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이 아니던가. 내가 예전에 출항하기도 전에 좌초되고 만, 바로 그 형이상학이라는 환상의 섬. 그래, 이 '만만한' 책이라면 형이상학에의 난해한 비밀을 쉽게 벗겨주리라, 그리하여 우주와 삶에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까발려주리라. 이 책을 구매하게 된 경위는 대강 이렇지 않을까. 

 그러나 <괴짜교수의 철학강의>는 일반적인 의미의 철학개론서가 아니다. 결론부터 선취하자면, 본서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입문서적인 성격이 강하다. 물론 일반적인 철학개론서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예컨대 제논의 역설이나 데카르트의 코기토 등).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곁가지에 불과하다. 문제는 본서를 총괄적인 철학개론서로 오인하여 선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있다. 문외한들이나 초심자들이 철학 공부의 시작으로 비트겐슈타인을 선택한다는 건, 건축학을 배우기를 희망하는 학생이 철거(撤去)학(?)부터 배우겠다는 것에 다름 아닐 터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른바 '철학의 파괴자'가 아니던가. 

 

 여기서 잠깐 '철학적 구라'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철학의 대표적인 말장난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유신론의 논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데카르트는 다음의 논리로 신(神)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존재라는 속성을 갖지 않는 '완전한 존재'란 생각할 수 없는 겁니다. 앞서 우리는 신이란 '더할 수 없이 완전한 존재'라고 정의했죠. 존재라는 속성을 갖지 않는 미인을 완전한 미인이라고 할 수 없듯이, 존재라는 속성이 없는 신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존재란 속성이 없는 신은 이미 '더할 수 없이 완전한 존재'라는 신의 정의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은 존재합니다.

                                                -이 진경 著 <철학의 모험> 중에서

 

 <철학의 세가지 질문>의 저자 마이클 켈로그는 이에 대한 칸트의 논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칸트는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대상의 개념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개념은 그 속성에 의하여 정의되는 것이지만, 존재는 그 자체로 속성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그것이 존재한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 대상의 개념에 무언가가 보태지는 것은 아니다. 개념은 궁극적인 규정이고, 그 개념에 해당되는 대상은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단지 존재한다는 자체가 개념을 바꾸지는 못하듯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대상의 완결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완벽한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것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만일 어떤 존재가 부정된다면, 그 존재 자체와 함께 그 존재가 갖는 속성들도 없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면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가 하나의 대상으로 귀결되려면, 우리는 개념에 머물지 말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내가 아무런 결점이 없는 최상의 실재로서 어떤 존재를 생각해 내도 그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결과적으로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곧 신의 존재를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Three questions we never stop asking>중에서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완전한 존재(혹은 '완전한 것')'와 '완전'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전자의 경우 '존재'나 '것'이라는 낱말에서 보듯이 이미 '있음'을 전제하고 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완전한 존재'는 이미 '존재'를 포함하고 있지만, '완전'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존재는 속성의 전제 조건이지, 속성의 일부가 아니다. '완전한 도깨비가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도깨비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철학적 착각은 이른바 '언어의 마술'에 걸려 오도된 판단을 함으로써 발생한다. 
 
칸트의 논박에서 깨달아야 할 사항은 이렇다. 신이 존재하는가의 여부와는 별도로, 상식적으로  데카르트의 논변에서 어딘가 사람을 호도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논리적 구멍'을 명징하게 밝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는 우리가 언어를 오해하는 데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통적인 인식론과 형이상학적 논변들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고 말한다. 마치 칸트가 순수이성을 법정에 세워 이성의 월권에 맞서 그것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한 것처럼, 그는 언어의 한계를 규정한다. 쉽게 말해 언어는 초월적인 대상을 담는 그릇이 못 된다는 거고, 따라서 뭔가 초월적인 것에 대해 아는 양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거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림이론(picture theory)이나 언어의 용도의미론(用途意美論,Use theory of Language), 그리고 가족유사성(家族類似性,family resemblance)등의 개념으로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들이 언어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증하며 기각한다. 본서는 플라톤의 이데아, 베르그송의 순수지속, 그리고 데카르트의 코기토 등의 개념을 기각하는 논증으로 그것들이 사상누각임을 명증한 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 중 대표적인 것으로 아마 본질주의를 들 수 있을 게다. 소크라테스가 선이나 정의, 혹은 용기와 관련한 다수의 개별적인 답변을 물리치고 단 하나의 본질로 귀결되는 답안을 질문자들에게 요구한 것이나, 플라톤이 개별적인 현실계에 대비하여 이데아라는 실재를 요청한 것에서 보듯이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그것들은 단지 '본질주의의 오류'일 뿐이다.

 언젠가 인터넷 상에서 누군가 "헤비메틀과 하드롹의 차이는 뭔가요?"라는 질문을 던진 것을 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답변을 내놓았지만, 단 하나의 반박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답변은 하나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가장 웃기는 답변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1980년 이전에 발매된 음반은 하드롹이고 그 이후에 발매된 음반은 헤비메틀." 그러나 나머지의 진지한 대답인들 명징한 설정을 자신할 수 있는 걸까?). 사람들의 이런 태도는 '본질' 규명에 대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의미한다. 즉 그들은 헤비메틀과 하드롹을 규정하는 각각의 '본질'이 있다는 전제를 고정관념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거다. 그러나 그런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주의의 오류에 대해서는 니체도 언급한 바 있다.

 모든 개념은 동등하지 않은 사물을 등치(等値)시킴으로써 발생한다. 하나의 나뭇잎이 다른 나뭇잎과 완전히 똑같은 경우가 결코 없는 것처럼, 나뭇잎이라는 개념이 나뭇잎의 개성적인 '차이성'을 임의로 탈락시키고, 다양한 상이점을 망각하게 하여 형성된 것임은 확실하다. 이렇게 하여 이제 그 개념은 현실의 다양한 나뭇잎 외에 자연 속의 '나뭇잎'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뭔가가 존재할 것 같은 관념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어떤 현실의 나뭇잎이 그것에 의해 구성되고 묘사되고 컴퍼스로 측량되고 꾸며지고 오그라들며 채색되는 것처럼 보이는, 뭔가 어떤 '원형'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한 관념을 부여하는 것이다.

                                                                        -니체, <철학자의 책> 중에서

 

 실제로 사람들에게 나뭇잎을 그려보라고 하면, 나뭇잎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모습의 다음과 같은 나뭇잎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린다. 예컨대 소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은행나무나 미류나무 등 이들 모든 나뭇잎들에 공통되는 하나의 '상'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마치 그러한 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거다.

 

 이처럼 공통되는 하나의 상, 즉 본질에 대한 인간의 지향적 태도-다시 말해 개별적 사례를 하나로 포괄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미적인 것이나 윤리적인 것 등에 대한 근본주의의 오류를 낳는다. 예컨대 예술을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그렇다. 우리는 모든 예술 작품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근본적인 성질을 발견하지 못하고 가족유사성에 의한 관계망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공통된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펴보라.

                                         -<철학적 탐구> 66절

 

 

 

 

 결국, '원형'이니, '본질'이니 하는 건 등치에 의한 착각이라는 거다. 이는 '삶의 본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우스갯소리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뇌를 짊어지고 무궁화호 열차에 올라 여행을 떠나봤자 얻게 되는 현실적인 답변이라고는 고작 '삶은 계란'이라는 것이 전부라는 얘기다. 따라서 '인생의 본질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질문 자체가 애초에 잘못되었다는 거다. 이는 마치 '인생의 무게는 몇 kg인가?'나 '정신의 본질은 몇 km인가?'라는 질문만큼 허황된 것이다. '원형'적 인생은 없다. 단지 '원형'적 인생이 있다고 우리가 믿을 뿐이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으니 답 같은 게 있을리 없다. 고로 이런 따위 철학적 문제는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해소'할 차원의 문제인 것. 따라서 철학의 기능이란 인간의 지각을 벗어나는 사념적인 형이상학의 진리를 캐내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철학적 문제 설정 자체의 오류를 분석하여 해소해버리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인 쓰치야 겐지는 마지막 장인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학문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감각을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사항을 해명하는 학문이라는 생각에도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가장 가치가 있는가?"와 같은 문제는 철학적으로 해결될 수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문제 자체에 의문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런 문제는 인간이 제 아무리 현명해져도, 제아무리 많은 정보를 손에 넣어도, 아니 아예 전지전능한 신이어도 풀 수 없는, 애초부터 해결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문제입니다. "왜 인간은 다리가 여덟 개인가?"라는 문제는 애초에 해결하려야 해결할 수가 없지요.

 이 말인즉, 애초에 철학적 문제들은 난센스라는 거다. 따라서 철학이 할 일이란, 규명 불가능한 일에 사변을 동원하여 매달리는 게 아니라 문제 자체가 제대로 설정된 것인지 검토하는 것이라고 쓰치야 겐지는 말한다.

 

 철학적 문제는 철학자도 생각하지만, 우리 일반인도 평소 와중에 자연스럽게 떠올립니다. 예컨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품는 의문입니다. 이런 물음에 어떤 방식으로 대답하려는 학문이 바로 철학입니다. 제 자신은 그러한 문제가 무의미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그런 철학적 문제가 무의미함을 해명하는 것이 철학의 실질적인 일이라고 여깁니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철학이 무의미함을 해명하는 것 역시 철학의 일입니다.

 

 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

 

가장 깊은 문제들이 사실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논리철학논고> 4.0031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논리철학논고>, 6.5(2)

 

 문제에 대한 철학자의 치료는 병에 대한 치료와 같다.

                                           -<철학적 탐구>133절

 

 철학에서의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파리에게 파리통(fly-bottle)에서 빠져나갈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철학적 탐구>309절

 

 

 

 

 

 이젠 도발적인 나의 질문("철학이란, 애초에 별 것 아닌 시시껄렁한 주제를 적당히 어려운 말로 버무리고 뻥튀겨서 사람을 홀리는 말장난 아닙니까?")에 대한 철학 교수님의 답변("실제로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개진하는 철학자도 있습니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난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당시에 교수님은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리라.

 

 나는 저 위에서 책의 제목을 <철학강의>로 정한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한 궁금증을 다소 '해결'해 줄 총괄적인 입문서라는 기대를 품고 접근한 사람이라면, '형이상학적 문제 제기는 무의미하므로 해소되어야 한다'는 결말에 허탈감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철학에 입문하려는 뜻을 품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 초장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차라리 <괴짜 교수의 철학 강의>의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부제를 달았으면 어느 정도 오해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
철학의 파괴자 비트겐슈타인'

 

 이러한 불만이 있다고는 하나, 본서의 내용 자체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사견이지만, 이만큼 알기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비트겐슈타인 관련 입문 서적은 이것이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철학이 무의미함을 해명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일견 철학무용론을 주장하는 듯한 주제에도 실망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진리가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 사유의 과정을 추적하거나, 혹은 철학적 명제의 오류나 무의미함을 밝혀 미몽에서 비롯된 맹신을 기각해나가는 과정은 인간의 지성을 확장하는데 기여를 하게 됨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테니까.

 

 철학은 의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당연해 보이는 것에 대한 끝없는 의심은 단순히 신뢰의 포기가 아니라 미망(迷妄)에서 벗어나기 위한 근본 조건이고, 따라서 의심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타성이라는 괴물에 사로잡히고 정체한다. 논리적 사고가 뒷받침된 의심은 적어도 사유가 가능한 인간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을, 이 세상의 미망이 초래한 모든 비극을 통해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초교 동창이었던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증오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히틀러의 열등감이 원인이었다는 얘기가 있단다. 믿거나 말거나.........

 



 

 

※ 사족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난해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위에서 인용한 것도 2차 문헌에서 발췌한 것일 뿐, 실제로 그것을 완독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아마 앞으로도 완독을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비트겐슈타인의 스승인 버트런트 러셀이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을 써 주었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 자신의 논지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며 화를 냈다고 한다(배은망덕한 분 같으니).....세계적 석학인 러셀도 그러할진대, 나 같은 범부가 어떻게 읽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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