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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번지점프를 하다

 

 

10년 만에 전생과 동성애 코드가 묘하게 얽힌 기묘한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다시 보다.

 

내 최초의 의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왜 기타리스트 가즈히토 야마시타는 전광석화의 손놀림을 보여줄 수 있고 나는 왜 안 될까?’

 

혹자는 말한다. “그야, 야마시타는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반면에, 너는 한참 부족하니까.”

인정한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연습 시간이 나보다 적을 수밖에 없는, 아주 어리지만 전광석화와 같은 기타리스트가 있으니까.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환생’이다. 리처드 버크의 말처럼 우리는 이 세상을 통해 다음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 고로 작금의 내가 거북이 플레이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전생에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의문은 남는다. 현생의 나는 전생의 나와는 ‘생김’도 다르고 ‘기억’도 다르다. 그렇다면 과거의 ‘나’를 현생의 ‘나’와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요컨대 자기동일성의 문제가 남는다. ‘나’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핵심은 뭘까? 외관? 아니면 기억? 아니, 본질적인 핵심이라는 것 따위가 있기나 한 걸까?

영화에서 태희(이은주 분)로 환생한 현빈(여현수 분)에게는 전생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이 현빈이의 본질을 규정하는 걸까? 그래서 인우(이병헌 분)는 현빈에게 태희의 모습이 없어도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걸까? 그럼 인우가 최초로 태희를 만났을 때는 그녀의 본질적인 무엇에 혹했던 걸까? 최초 만남의 순간에는 기억이란 아예 없었으므로 그것은 본질은 될 수 없다. 그럼 역시 외관? 혹자는 ‘영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개념조차 너무 모호하다.


에리히 프롬은 ‘첫 눈에 뻑 감’ 따위는 사랑이 아니라고 했지만, 반면에 첫 눈에 뻑 가는 게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 가브리엘 마르케스라는 위인도 있다. 후자의 입장을 인정한다면 결국 외관에 홀린 이후로는 공유된 기억이 덧대어지는 것이 연애감정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성격과 인간성에 반했다’는 건 사후(事後에) 덧댄 것에 불과하다.

오래전에 좋아했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남자의 모습을 하고서 내게 온다면 나도 번지점프를 하게 될까?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혐오하는 건 아니지만 외관에 집착하는 나로서 솔직히 그럴 가능성은 제로다.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난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니면…자성(自性)이 없는 윤회를 믿어야만 하는 걸까?


따라서 최초의 의문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왜 야마시타는 토끼이고 나는 거북이인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한다.

 


사족 :

이 영화에 나오는 멋진 대사 :
"이 세상 아무 곳에다 작은 바늘 하나를 세우고 하늘에서 아주 작은 밀씨 하나를 뿌렸을 때 그게 그 바늘에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되는 확률로 만나는 게 인연이다"

 

'그 계산도 안되는 확률'로 마주치는 걸 '우연'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확률'이란 우발성(우연)의 문제이지 필연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확률'이 전제된 필연성은 이미 필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일단 그 우연이 발생하고 나면, 마주침의 대상들은 그것을 필연이라고 믿는다.
그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는 우발성으로부터 탈각()하고픈 욕망의 반영이다. 하지만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 마주침에는 마주침의 주체들의 의지를 뛰어넘는 외부적 결정 인자가 무수하게 존재한다. 일단 두 사람이 마주친 이후에는 마주침을 조장한 무수한 우연들을 소급해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내가 만일 그 당시에 5X8번 버스를 놓치지 않았더라면 너를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신발 끈이 풀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신발 끈을 묶느라 버스를 놓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 이전에 구두가 더렵혀지지 않았다면 끈 달린 운동화를 신고 나올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 이전에 전날 밤의 만취만 아니었다면 웅덩이에 발을 빠뜨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친구가 실연만 하지 않았어도 위로의 술자리는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며, 친구의 여자친구가 갈증을 느끼지만 않았어도 우연히 들른 편의점에서 그녀의 옛 동창을 만나 마음이 흔들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의 회사동료가 사다 준 도시락의 염분이 과다하지 않았다면 갈증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무한소급)'

결국 '내'가 '너'를 만나게 된 건 내 자유의지 밖의 일이고, 따라서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운명'이 '우리'를 만나게 해 준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할 테다. 재미있는 건 결정론적 개념이 내포된 '운명'이라는 필연성이, 무수한 우연들의 총합에 기인한다는 거다.
상극의 개념으로서의 '우연'과 '필연'이 중첩되는 기묘함. 이 기묘함을 해소하려면 위의 모든 우연의 미로를 미리 예측하여 조직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해야 할까? 마치 영화 <데스티네이션>시리즈처럼.

그렇다면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무한에 가까운 다면체로 이루어진 주사위를 굴리는 것일까? 

 

 

 

 

종종 길을 가는 무고한 사람을 흉악범이 살해했다는 내용의 뉴스를 듣게 된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당시의 예정을 살짝 빗나가게 하는 우발적인 무언가가 있었다면, 그는 길에서 흉악범과 대면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과 맥락으로 위의 대사를 한 번 더 읽어보자.

 

"이 세상 아무 곳에다 작은 바늘 하나를 세우고 하늘에서 아주 작은 밀씨 하나를 뿌렸을 때 그게 그 바늘에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되는 확률로 만나는 게 인연이다"

 

연인 대 연인으로 만나는 것이 '인연' 즉, 필연적인 일이라면, 흉악범 대 무고한 시민으로 마주치는 걸 '인연', 즉 필연적인 일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 신에게, 혹은 주사위를 굴리는 신에게 우리가 느끼는 건 무엇일까?

 

정신적 경련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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