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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9월의 4분의 1

 


9월의 4분의 1

저자
오사키 요시오 지음
출판사
황매 | 2006-09-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오오사키의 첫 소설집인 이 책은 문예지에 1년 동안 열정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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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존재란 말 대신에 '실존'이란 말을 쓴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일단 태어난 인간은 다른 존재, 예를 들어 호랑이나 나비와 달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어요. 동물도 죽지만, 죽음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진 않아요.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보면서 자신의 현재 삶을 살지요.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매순간 판단하며 살지요. 삶의 의미는 바로 거기서 나타나게 됩니다. 죽음에 미리 달려가봄으로써 자신의 삶을 의식하며, 거기서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게 인간이지요.

 결국 '실존'이란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봄으로써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의미있는 존재방식을 선택하는 '자유'같은 겁니다. 그것은 주어진 생명을 그저 본능대로 소모할 뿐인 동물과는 다르지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구역질 나는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은, 개개인이 주어진 순간에 가장 의미있는 것을 선택하는 삶-이게 바로 '자유'죠-이 있을 뿐, 어떤 주어진 본질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담고있는 겁니다."

                                                                               -이 진경 著, <철학의 모험> 중에서

 

 

 

 

  본 작품집은 총 4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슬퍼도 날개도 없어서>

 <9월의 4분의 1>

 

 각 작품들 속에는 어김없이 너무나 친근한 음악들이 배경을 이룬다(작품 순서대로 비틀즈-롤링스톤즈-레드제플린-아바의 음악이 나온다). 특히 <슬퍼도 날개도 없어서>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애인에게 기타 연주를 들려주는데, 바로 레드제플린의 기타리스트인 지미페이지의 연주곡인 'Bron-Y-Aur Stomp.' 

 이 작품집의 단편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9월의 1/4>.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겐지는 꿈은 직업 작가. 꿈을 이루기 위해 일찌기 '미리 세워 둔 계획을 따라 앞으로 필요하게 될 것 같은 책을 차례대로 읽'고,'지구력을 기르기 위해 세계 명작 장편들을 모조리 읽고, 순발력을 기르기 위해 근대시를 골라 읽은 적도 있'으며, '유행을 탐색하기 위해 신인들이 쓴 책은 장르를 불문하고 거의 섭렵'한다. 그리하여 스물 두살 봄, '기술은 다 익혔으니 이제 실행에만 옮기면 된다고 생각'하였으나 집필은 초장부터 좌초하기 일쑤다.

 

 문학에의 '앎'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겐지는 '삶'을 느끼기 위해 거리로 나간다. 그러나 실제로 얻은 건 술과 타락, 그리고 창작을 향한 열정의 냉각 뿐. 그리하여 겐지는 스물두 살 때 꿈을 접고 전기밥솥 판매원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창작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인지, 전기밥솥 판매량에의 실적은 전혀 그의 실존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도피하듯 사표를 내고 브뤼셀의 그랑 플라스(Grand Place)로 향한다. '그랑 플라스라는, 광장 같은 공간. 혹은 좌절감에서 도망칠 장소'가 필요했던 것.

 그곳에서 운명적으로 '나오'라는 동갑내기 여인을 만나서, '목적도, 용도도, 물론 설계도도 없'는, 이른바 '실존적'사랑에 빠진다. 스물일곱 해의 어느 날의 일이다.

 

 

 

 

 본문에 소개된, 쟝 폴 사르트르의 '실존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지우개라고 하는 것은 미리 그 기능을 예상해서, 그렇게 되도록 설계해서 만들어진다. 그것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와 달리 예상되는 기능도 설계도도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 존재를 실존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러니까 겐지와 나오의 사랑은 정해진 목적이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는 실존적 사랑이었던 것.

 

 '무언가를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지우개가 아닌 것처럼, 무언가 목적을 가진 사랑이 아니었다. 단지 막연하면서도 돌연한, 그러나 확실히 실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슬픔이 가득했던 나오는 '다음에는 9월 4일에서 만나요'라는 모호한 내용의 편지 한 장만 남겨두고 떠난다. 겐지는 9월 4일만 되면 그녀를 기다렸으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나오와의 이 '실존적' 사랑의 경험은 작은 불씨가 되고, 겐지는 '미리 설계도를 그리고 기능을 정한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시절, 그리고 그 설계도에만 매달려서 실존하는 소설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던 시절, 그저 괴로워서, 하지만 그 폐쇄감을 어떻게든 타개하기 위해서, 무턱대고 책상에 붙어 있는 나날들'에 작별을 고한다. 그는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 소설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건축물은 어떨까?" 나는 물었다. 조엘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면밀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완성도 역시 정해져 있는 것이니까, 존재 중의 존재이지 않을까? 명실공히 사르트르가 말하는 존재의 우등생이지."

 "그럴까?"

 "무슨 말이야?"

 "확실히 건축물은 설계도에 의거해서 만들어져. 하지만 완성되는 것은 그대로의 기능뿐일까? 그렇지 않은 건축물도 분명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오늘 앙칼의 건축물을 보고, 그리고 이미 없어져버린 건축물을 상상하고 생각했어. 완성된 건축물은 그 기능 이상의 것을, 설계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가져올 때도 있다고 말이야."

 "생각지도 않은 것?"

 "그래. 예를 들면 예상치도 않았던 아름다움. 완성되고 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설계도라는 평면에서는 상정할 수 없었던 구조."

 "하지만 그것은 디자인이나 기능미에 포함되잖아? 계산되어 있는 거야."

 "그럴까? 그럼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격, 이런 걸 느끼는 인간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미리 짐작하고 있었을까? 건물이 부서지고 몇 십 년이나 지난 후에도.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설계했던 것 이상의 기능을 그 건물들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되지....요컨대 나는 이렇게 생각해. 앙칼의 건물은 실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랜 세월이 흘러 40대가 된 겐지는 프랑스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조엘을 통해 1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어느 날인가 나오가 남긴 짤막한 전언-'다음에는 9월 4일에서 만나요'-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것은 프랑스의 지하철 역 이름인 'quatre septembre(까흐띠에 셉땅브흐)'였고, 주인공 겐지가 영어로 '쿼터 셉템버'로 오인해서 '9와 1/4'로 잘못 이해했던 것.
(지하철 역 이름이 '9월 4
일'이라니, 참 프랑스인들은 로맨틱하다는 생각도 든다.)

 

'잃어버린 사랑은, 철거된 건물처럼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단지 잔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유럽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네가 선언했던 것처럼 쓸 수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끓어오른 듯이, 죽어 있던 시계가 갑자기 째짝거리며 돌아가듯이. 잘 되고 안 되고는 둘째 치고, 좋고 나쁘고는 별도로 하고, 나는 벌써 세편이나 소설을 쓴 것이다.....나오를 기다리면서, 9월 4일역을 감싸고 있는 적막 속에서 나는 되풀이해서,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너와 만났을 때, 그때는 괴롭고, 절실하고, 슬펐지만, 그래도 역시 자유로웠다고. 분명, 막 만들어낸 솜사탕만큼.'

 

 정말 그랬다.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웠고, 절실한만큼 잡히지 않는 꿈들로 인해 슬펐다. 공허함과 동시에 자유로웠다. 실존적 고민을 안고 살았던 젊은이들이라면 그 누구나 자유와 공허의 어울리지 않을 법한 동거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전망의 결여에 절망하며.

 

 소설이든 삶이든 실존하는 것은 설계도(본질) 안에 갇히지 않는다, 이것이 아마도 저자가 사르트르의 견해에 동조하여 하고 싶은 얘기이리라.

 

 

 

 

 

※사족 : 누구의 말마따나 '착취당하고 싶어도 착취당할 수 없는', 혹은 '목구멍이 포도청'인 88만원 세대의 세상에서 실존적 고뇌란 얼마 만큼의 무게를 지닐 수 있을까?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지만, 너나 할 것 없이 강제된 본질에 붙박이는 삶이 강요되는 이 시기에.

 또 다른 측면에서 보건대, 비교적 윤택한 삶이 보장된다고 할지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본래적(非本來的)인 삶'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를 선택할까? '본래적 삶'이 윤택함과 대체로 등가관계가 아닌 한, 대개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경제적 동물'이기를 희망하고 마는 건 아닐까? 고(故) 장영희 교수는 자신의 에세이 <내 생애 단 한번>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이가 들어 슬픈 일 중 하나가 이제는 사람들이 내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가을에는 퇴근길에 커피도 마셨으며 눈이 오는 종로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를 쓰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형식을 찾지 못한 채 대부분 공중에 흩어졌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그때 눈이 몹시 내렸다.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러나 지상은 눈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지 위에 닿을 듯하던 눈발은 바람의 세찬 거부에 떠밀려 다시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과 지상 어느 곳에서도 눈은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 때까지 어떠한 죽음도 눈에게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 고(故) 기형도 시인의 시작 메모(1988.1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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