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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기사마 선생의 조용한 세계

 


기시마 선생의 조용한 세계

저자
모리 히로시 지음
출판사
작은씨앗 | 2013-10-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내게 영감을 주는 작가!" ― 오시이 마모루 (일본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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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는 왕도(王道)가 없다.”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이 말은 학문에는 편법을 통한 지름길에 이르는 길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런 의미로 파악하다 보니 ‘왕도’라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사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임금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2 .인덕(仁德)을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 유학(儒學)에서 이상으로 하는 정치사상.
3 .어떤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한 쉬운 방법.

그런데 1과 3의 의미가 ‘왕도’라는 한 단어에 공존하는 것이 이상하다. ‘임금의 도리’가 ‘쉬운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라니, 임금은 그 막강한 권력으로 인해 범인(凡人)들보다는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 쉽게 행한다는 뜻일까? 이렇게 받아들이면 ‘왕도’라는 말은 그 무게감을 상실한다. 모리 히로시의 <기시마 선생의 조용한 세계>에 나오는 얘기다.

“학문에 왕도가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지?”
“음……왕이 지나는, 그런 특별한 길은 없다, 즉 성실하게 열심히 배울 수밖에 없다는 의미죠.”
“내가 말한 왕도는 그것과는 다른 의미야. 전혀 반대지. ‘학문에 왕도가 없다’에서 왕도는 ‘Royal road'라는 의미지. 그게 아니라 패도(覇道)라고 해야 하나? 나는 왕도라는 말을 좋아해서 나쁜 의미로는 절대 쓰지 않아.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학문에는 왕도밖에 없어.”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왕도를 걷는다.

“나는 최소 17시간은 연구에 소비했다. 열심히 한다는 의식은 전혀 없고 ,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가능한 한 열심히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서 건강을 잃어 연구에 차질이 생길 우려가 있다. 그렇게 될까 무서웠던 것이다.”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에 의해 알려진 ‘Flow’라는 낱말은 현재에 온전히 몰두하는 경험을 뜻한다. 자신이 통제 가능한 어떤 일을 집중하여 행할 때는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는데, 한두 시간 정도 했을까 생각하여 시계를 보면 어느새 대여섯 시간이 흘러가버렸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때가 있다. 하루에 17시간을 연구에 소비했다는 얘기는, 17시간동안 연구할 것을 목표로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버렸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중딩이 시절, 교실의 게시판에는 담임 쌤이 직접 써서 붙여 놓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귀가 있었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당시에 이 말은 그다지 인간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부지런한 꿀벌도 실연은 슬프다. 위의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다니, 참으로 삐딱한 중딩이다. 지금은 대충 그 말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악을 듣다보니 어느덧 찾아온 첫새벽, 늦게까지 기타 연습을 한 후 동아리 방에서 나오자마자 축축하게 스미던 새벽안개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사적인 우울이나 슬픔과는 상관없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순간의 상태가 행복이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좀 오글거리게 표현하자면 '존재의 충일감'을 오롯이 느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내용의 시도 있다.

취하게 하라, 언제나 너희는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너희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너희를 지상으로 누르고 있는 시간이라는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너희들은 여지없이 취해야 한다.
그러나 무얼 가지고 취하는가?
술로, 또는 시로, 또는 당신의 미덕으로, 그건 좋을 대로 하시오. 하여간 취하여야 한다.

술을 제외한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취하는 능력’의 마비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 아닐지.
한껏 취하고 싶다. 예전처럼.

기시마 선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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