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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나란 무엇인가?



"너는 착한 사람이야."
이런 얘기를 듣게되면 그렇게 말한 분이 나를 좋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면 기쁘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나에 대한 회의감과 의구심이 일기도 한다. '대체 얼마나 내숭을 떨고 가면을 쓰고 살아왔으면....' 뭐,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어느 소녀가장의 자살 기사를 보고 일면식도 없는 주제에 눈물을 흘리는 것도 '나'이지만, 법이라는 강력한 제어장치가 없으면 끝간 줄 모르고 잔혹해질 가능성이 있는 게 '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주 젊었던 시절, 기원에서 알바를 했을 때 손님들 중 어떤 분이 TV로 뉴스를 보는 도중에 내뱉은 독백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내 마음이 법이라면, 저 새끼들 다 죽였어." 내 마음이 법이라면, 죽여버렸을 인간으로 야구팀을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근래 읽은 인상적인 책들 중에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평론가 신형철의 팟캐스트를 통해 알게 된 책인데, 히라노의 견해를 골자만 소개하자면 대충 다음과 같다.

'개인'이라는 뜻의 individual은 부정접두사 in과 '분할될 수 있는'이라는 뜻의 dividual의 합성어다. 따라서 individual의 번역어인 '개인(個人)'은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한 개의 인간'이라는 의미가 된다.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단일체라는 착각에서 '근본적인 나', 혹은 '진정한 나'라는 관념이 발생하는데, 히라노는 이를 일종의 '신화'라고 본다.

불변하는 단일적 속성만을 지닌 '진정한 나' 따위는 없다. 고로 누군가의 자살 소식으로 눈물 짓는 것도 '나'이고, 야성적 본능이 날것 그대로 이성의 막을 뚫고 분출할 것만 같은 것도 '나'다. 이처럼 인간은 분할될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분할 가능한 '분인(分人)'으로 존재한다. '하이드 씨'처럼 어느 선을 넘지 않는 한, 이처럼 분할된 '나'를 긍정하자는 것이 히라노의 견해다. 그의 견해를 직접 옮기면 다음과 같다.

"상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양한 '내'가 된다."
"분인(分人)은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연기하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다."

(구태여 '분인'이라는 낮선 용어 대신에 '가면'이라는 의미의 Persona라는 심리학 용어가 이미 있지 않는가 하는 반론에 대한 히라노의 일축이다.)
"타자를 대하는 여러 분인에는 각각의 실체가 있지만, '진정한 나'에는 실체가 없다."
"분인의 구성 비율이 바뀌면, 당연히 개성도 바뀐다. 개성이란 절대 유일(唯一)불변(不變)의 개념이 아니다."

물론 상대방이 '나'를 어느 한 측면으로 단정하는 것(예컨대 '마음이 따뜻하다'는 것)은 아마도 '나' 속의 많은 분인들 가운데 그것이 비교우위를 점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다.

어쨌든 간에 '내' 속에 있는 많은 분인들을 인식할 때마다 자괴감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기타라는 악기를 두고, '아, 음색의 단일체이어야만 하는 이 기타는 어째서 줄마다 음색이 다른가'하고 괴로워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일는지도 모른다. 
문득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라는 곡의, 시(詩)와 같은 가사가 떠오른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ㅡ하덕규 <가시나무> 전문


가시 없는 나무들과 함께 '무성한 가시나무'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는' 숲이 바로 '나'라는 것, 이것이 아마도 히라노의 견해일 테다.



사족 : 
이렇게 말하자니 문맥상 위의 가사를 디스하는 것 같은데, 물론 그런 건 아니고 단지 비유가 너무나 적절헤서 옮긴 것 뿐이다. 하덕규는 많은 '분인'들 중에서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는 '가시가 돋힌 나무들'에 관해서 따로 언급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가시나무>의 가사는 가장 아름다운 노랫말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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