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정신적 공복감을 느끼지만 책을 읽기 귀찮을 때는 유튜브를 통해 인문학 강의를 듣곤한다. 사랑에 관한 여러 인문학자들의 공통된 관점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사랑의 지속성, 혹은 영원성에 대한 회의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은 말한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사랑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지금 좋아하는 것처럼 나를 계속 좋아해줘'라고 요구하는 것은 상대방을 살아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것, 이것이 우주의 법칙과 생명의 리듬, 즉 생로병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화<봄날은 간다>에서의 허진호 감독의 통찰은 옳았다.
오랜만에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단편 <사랑의 묘약>을 책장에서 꺼내 재독한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연인의 과거에 심한 질투를 느끼는 '그'는 만나는 여인마다 그녀의 과거를 의심하며 괴로워한다. 과거에 만난 남자를 완벽하게 잊은 여자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 때문에 항상 그것을 캐고 싶어하지만 문제는 여자들이 이실직고를 할 리가 없다는 것. "난 모든 것을 잊었어요. 지난 과거의 일이라고는..." 여자의 이런 고백을 믿지 못하는 그는 연인에게서 솔직한 고백을 유도해내는 신비의 묘약을 기나긴 여행 끝에 구해 고향으로 돌아와 연인에게 시험하지만, 그가 목도하게 되는 것은 그녀들이 차마 온전히 떨쳐내지 못하는 연애에 관한 과거지사 뿐이다.
환멸을 느낀 그는 연인의 과거 기억을 백지화하는 사랑의 묘약을 동양 어디에선가 구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들을 유혹해 낸 남자들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여자들의 순결무구함에 도취된다. 이로써 그녀의 현재는 물론, 과거까지 장악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근심이 남아있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는 손에 넣었지만 미래의 불확실함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그는 아직 완벽하게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여자들의 과거와 현재가 그에게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미래에 있어서 그가 주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오랜 여행 끝에 결국 여자들로 하여금 영원히 자신만을 사랑하게 만드는 묘약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평생동안 자신의 여자라고 이름붙이고 싶은' 여자를 만나게 된다.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장악하고 싶은 그는 그 묘약을 그녀의 입술에 몇방울 떨어뜨린다. '이제 넌 영원히 내 것이고 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으리라. 지금 너는 완전히 나만의 것이야.'
그의 이 욕망은 마침내 성취되어 그녀는 그 남자 이후로는 어떤 다른 남자도 사랑할 수가 없게 된다. 죽어버린 것이다.
철학자 강신주는 지속성, 영원성에 대한 요구는 상대방을 살아있지 못하게 만든다는 고미숙의 견해에 호응하는 얘기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표현했다. "영원한 사랑이요? 그것은 꽃으로 따지면 조화(造花)같은 거예요. 우리는 조화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화(生花)에요. 언젠간 져버린다고요....언젠가는 헤어질 텐데 뭐하러 사랑하느냐고요? 꽃이 언젠가 진다고 해서 꽃잎을 피우지 않던가요?"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을 생각한다. 무성한 벚꽃이 창밖 가득한 어느 까페에서 유지태와 재회한 이영애는 그에게 생화가 피어날 화분 하나를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이거 할머니 갖다 드려. 이런 거 키우면 좋대." 이어서 나오는 음악 <사랑의 기쁨>,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를 배경으로 이영애는 언젠가는 져버릴 벚꽃이 무성하게 피어있는 거리를 향해 뚜벅뿌벅 걸어간다. 허진호 감독은 역시 섬세하다.
일본 철학자 쓰치야 겐지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외국인 미학 연구자는, 일본에는 덧없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미의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벚꽃이 아름다운 까닭은 벚꽃이 피는 시기가 일시적이고 곧바로 지는 덧없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그런가 하면 지금 이 순간밖에 없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름다움이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고 해서 아름다움이 불완전해진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꽃이 시들어 끝내 져버리는 것을 배반이나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긴 나머지 결국 분노심에 못 이겨 상대방의 복부에 칼을 꽂아 넣는 수컷들에 비하면 <봄날은 간다>에서 변심한 이영애의 자동차를 자신의 자동차 키로 긁어버리는 찌질남 유지태는 차라리 얼마나 구원의 가능성이 큰 것인가.
문득 칼부림에 대비되는 예이츠의 어떤 시가 떠오른다. 고미숙이 언급한 '우주의 법칙과 생명의 리듬'을 예이츠는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가을은 우리를 사랑하는 긴 잎새들 위에도,
보릿단 속 생쥐 위에도 와 있다.
머리 위 로웬나무 잎사귀도 노랗게 물들고
젖은 들딸기 잎도 노랗게 물들었다.
사랑이 시드는 시간이 닥쳐와
이제 우리들의 슬픈 영혼들도 지칠대로 지쳤다.
우리 이제 헤어집시다, 정열의 계절이 우리를 잊기 전에.
그대 수그린 이마에 입맞추고 한 방울 눈물을 남기고서.
ㅡ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낙엽(The falling of the leaves)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