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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리뷰

테레즈 라캥



친구 S모 군의 권유로 보게 된 영화 <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의 소설이 원작이고, 박찬욱 감독의 <박쥐>도 이 작품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영화 곳곳에 주옥같은 대사가 빛을 발한다.

고모의 아들 카미유와 애정 없는 결혼을 한 테레즈는 남편 카미유의 친구인 로랑을 만나자마자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미화하자면 관습과 제도를 초월한 사랑이고, 흔히 하는 말로는 불륜이다. 
로랑과 테레즈의 인상적인 대화 :

테레즈 : 당신, 나를 너무 늦게 찾았어.
로랑 : 아니, 제때 찾았어...제때 찾은 거야.

이 대사를 음미(?)하다 보면, 문득 어렸을 때 구독하곤 했던 어떤 소년소녀잡지에서 소개된 '남을 골탕먹이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땅에 말뚝을 하나 박아 넣은 다음 깡통을 그 위에 씌워 놓는다. 그리고 바로 앞에 이렇게 써놓는다. "절대로 걷어차지 마시오." 그러면 십중팔구는 걷어차게 되어 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심리이므로.
이런 소설 제목도 있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어떤 철학자의 통찰대로, 욕망의 불씨는 금기(禁忌)의 휘발유로 발화된다. 금단의 열매를 더 달콤하게 여긴 로랑으로서는 '제때 찾았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한편, 동물원에 가기를 좋아하는 카미유는 상처 입은 곰을 친구인 로랑에게 보여주며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넨다.

카미유 : 지난 주에 어떤 애가 꿀 바른 빵을 가져와서는 곰에게 주려다 잘못 던진 거야. 꿀 묻은 부분이 곰의 등에 붙어버렸어. 꿀 냄새는 나지, 손은 안 닿지....곰은 결국 미쳐버렸어. 자해를 하고 말았지. 
로랑 : 안됐지만 어쩔 수 없잖아.

영화의 맥락으로 보건대 결혼은 했으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손에 닿지 않는 꿀'인 테레즈를 갈망하는 카미유의 내상에 대한 은유일 테다. 하지만 광의로 보면,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이 자초하는 자멸적 상처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해석에 눈이 간다. 
이디스 워튼의 소설 <여름>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구절이 있다. "만약 그녀가 미래를 생각했다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강이 너무 깊고, 열정이 그 강에 가로질러 놓은 다리는 무지개만큼이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손에 닿지 않는 꿀'은 실체 없는 무지개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순간 실족에 의한 익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금기가 촉발하는 강력한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는 범인(凡人)인 로랑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안됐지만 어쩔 수 없잖아." 
다만, 로랑과 테레즈는 어쩔 수 없는 것을 넘어 나가도 너무 나갔다. <아메리카의 비극(영화 '젊은이의 양지'의 원작소설)>의 주인공처럼 범인(凡人)을 넘어 범인(犯人)의 길로 들어서고 만 거다.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ㅡ이성복, <금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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