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운이 시들었다. 심심풀이로 오늘의 물병자리 운세를 보니 그런 날이란다. 산책을 권하길래 운동 겸 광합성을 위해 뒷동산을 오른다.
동산 뒷편을 지나가다가 비석 없는 봉분을 발견한다. 봉분 바로 앞에 푯말이 꽂혀 있길래 가까이 다가가 봤더니 붙여놓은 쪽지에 이런 게 적혀있다.
<이장, 평장, 개화장, 납골당...010-XXXX-XXXX>
잠시 생사의 대조(생계의 원색적인 처절함과 죽음의 무색무취한 평안함)에 대해 30초간 묵념.
동산을 거의 내려가니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푯말이 나무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 사는 개는 기르는 개입니다. 잡아가지 마세요.>
그리고 푯말 하단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동물을 사랑하자.
(동물 애호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개는 보이지 않는다. 푯말을 지나 언덕 위쪽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엉성한 울타리 너머에서 황구가 나를 향해 짖는다. "왈왈~왈왈왈(저리 꺼져)!"
면식일 리가 없을 그 동물애호가 분에게서 인간에 대한 신뢰가 느껴진다. 개도둑의 양심에 호소하고 있다니. 푯말이 오히려 '여기에 훔쳐 갈 법한 개가 있어요'라고 알려주는 꼴 아닌가...
우짖는 황구를 뒤로 하고 작별 인사를 건넨다. 잘 있거라. 부디 생계의 처절함에 처한 개장수들의 표적이 되지 않기를 빈다.
뒷동산에서 내려와 골목길을 걷다가, 익숙한 캐릭터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추어 선다. '이웃집 토토로'다. 카페 이름도 '검댕이 카페'다. 마쿠로 쿠로스케!
가게 안에는 토토로, 원피스, 케로로 등의 온갖 피규어들로 가득하다.
카페를 떠나고 연습/레슨실로 향한다. 햇살이 무척이나 따뜻한 것이 마치 4월 초의 날씨 같다. 여전히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로 가득한 뒷동산을 흘낏 돌아본다. 그리고 거리든 마음이든 멀리 있어서 만나지 못할 이들에게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건넨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2017.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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