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좌충우돌 잡글쓰기

한때는 절절함이요, 작금에는 지질함이라

 

한 후배(일명 아쿠마)의 방에서 발견한 케케묵은(1978년 출판) 책.
후배의 아버님께서 보신 책이란다. 더 찾아보니 <백범일지>도 있는데 허걱. 이건 1964년 출판이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세로 읽기.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손예진은 읽지도 않을 장서들을 헌책방에서 구입하는 취미가 있다. 의아해 하는 김주혁에게 오래된 책에서 나는 향기(냄새라고 해야 하나)가 좋기 때문이란다.
책에 코를 파묻고 맡아보니 과연 그렇다.
세월의 냄새라고 해야 할까.

종이의 모서리는 쉽게 바스라져 버린다.
세상에 나온지 겨우(?) 42년밖에 안 되었는데.

 

신학계의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쟁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예수에 대한 전기라 할 복음서는 외경을 제외하고 왜 네 권밖에 없을까? 아니, 그보다는 각 복음서는 왜 이리 분량이 적은 걸까? 복음서 저자(혹은 기자)들이 더 많이 썼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보다 명료한 그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을.

분량이 적은 이유에 대해서 학계가 뭐라 하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애초에 구전된 내용이나 Q문서(복음서 저자들이 참고했을 거라 추정되는 가상의 문서)의 분량이 적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저자들이 가난해서가 아닐까?

 

종이가 없던 당시에 양피지나 파피루스는 가격이 꽤 비쌌을 거다. 고로 길고도 상세하게 쓰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했던 거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일종의 원시 공산주의 생활 방식을 했다는 기록(사도행전)을 보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종이가 더 일찍 발명되어서 싼 가격에 보급되었다면 아마도 장편소설 분량은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다면 성경은 전해지지 않았을 거다. 세월의 풍화에 다 바스라져 버렸을 테니.

그럼에도 종이는 우리네 수명보다는 길다.

 

사랑에 눈 뜰 무렵, 연애편지질(?)을 시작했다. 양피지가 아닌 종이 위에 수놓아진 미문의 오글거림.
'상심의 낙엽이 포도 위를 뒹구는 낙조의 어느 가을날에 이 편지를 쓴다.'
혹은,
'인파가 한껏 물러간 해변가에서 저 머나먼 수평선 보다 멀리 있는 너의 얼굴을 떠올리며....'

오글오글, ㅆ........

 

가끔은 두렵다. 그녀들 중 무심한 누군가가 책상 서랍 깊은 곳 어딘가에 방치해 둔 나의 창작물들을 그녀들 측근의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하여 웃음과 오글거림의 동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기억보다 오래 가는 종이의 공포여.

 

고 기형도 시인은 이별의 심정을 담은 <빈집>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그래, 바로 이런 뜻이었어.
30년 만에 자의적으로 깨달은 의미.
양피지에 쓰지 않은 것을 위안 삼아야 하나.

 

아니면 그녀들이 무심하지 않기를.
부디 휴지는 쓰레기통에.

 

'좌충우돌 잡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를 형성한 법칙  (0) 2020.05.06
객관과 주관  (0) 2020.05.06
좋은 사람 컴플렉스  (0) 2017.03.03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0) 2017.02.28
구제역  (0) 2017.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