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인 분의 자동차 트렁크에 여행 가방을 넣은 다음 트렁크 문을 손으로 내려 닫았다. "(트렁크 안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닫히는 거야." 지인 분으로부터 이 얘기를 듣자마자 예전에 그런 식으로 트렁크 문을 닫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음에도 나는 왜 또 손으로 닫아버린 걸까? 순간적인 망각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생활의 관성이 작용한 탓일 테다. 스위치가 없는 내 차의 트렁크 문을 오랫동안 손으로 내려 닫은 습관ㅡ생활의 관성 말이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사람은 과거와 완전히 절연될 수 없다는 사실이고,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그저 타성적으로만 생활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소한 것에도 이런 관성이 작용할진대...
문득 어떤 철인의 견해가 떠오른다. 예컨대 우리가 익숙한 어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문을 여는 행위를 의식하면서('나는 지금 문을 열고 있는 중이야'라거나 혹은 '나는 이 문의 손잡이를 돌리고 당겨서 열어야 해'하는 식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문을 의식하는 순간은 평상시와는 달리 문이 열리지 않을 때이다,라는.
도종환 시인은 어느 시에서 자신의 처를 '가구'로 비유했다. 가구라는 것은 없으면 몹시 불편하지만 평상시에는 딱히 의식되지 않아 존재감이 흐릿하다. 요컨대 생활의 관성에 편입된 존재다. 이런 것들이 선명하게 존재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부재할 때다.
익숙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딱히 의식되지는 않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할는지도 모르겠다.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은 아마도 곁에 있을 때 그 대상을 타성적 존재로 격하시키지 말라는 의미일 테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오랫동안 '가구'였다. 어느 시구처럼 '꽃'이 아닌 그저 '몸짓'.
전화 벨이 울린다. 폐가구 수거업체로부터의 전화다
오래된 소파를 용달차에 싣는다. 이것들 역시 부재함으로써 존재하게 될까?
한동안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머잖아 잊힐 것이다. 다만 '한동안'의 시간만큼 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힘겨워한다.
편의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습관대로 대문을 잠궜다.
담배를 사고 돌아와 대문을 열기 위해 호주머니 속의 열쇠를 꺼내 들었다.
대문 자물쇠에 열쇠를 넣고 최대한의 느린 속도로 열쇠를 돌렸다. 빠른 속도로 돌릴 경우 대문이 열리는 '달캉'하는 소음을 듣고 2층에 있는 개들이 떼거지로 짖어대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항상 열쇠를 천천히 돌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대문을 열어 마당으로 들어선 다음 문득 깨달았다. 더 이상 개들의 소음에 민감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제 2층에는 개들이 없으니까....
문득 故 신해철의 어느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너에게 전화를 하려다
수화기를 놓았네
잠시 잊고 있었나봐
이미 그곳에는
넌 있지 않은 걸
때로는 생활의 관성이 나를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