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좌충우돌 잡글쓰기

A time of innocence



간혹 우연적이지만 필연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만 같은(하지만 역시 우연에 불과한) 사건과 종종 맏닥뜨리게 된다. 예컨대 초딩 시절, 형 따라 형의 친구 집에 갔더니 바로 내 짝궁인 여자애가 형 친구의 여동생이었음을 알게 된다든지, 미팅했던 어떤 여자애가 알고보니 아버지 친구의 딸이었다던지....


며칠 후면 이사를 가야한다. 일단 작업실을 구해야 하는데 언제든 기타 연습과 레슨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가 건물에 입주하는 게 최선이다. 다세대 주택이나 아파트는 늘 소음 문제가 말썽이니까. 소음 문제도 그렇지만, 주거지와 사무실에 들어가는 이중의 월세도 부담된다. 하지만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자니 역시 사람 꼴이 말이 아니게 될 것 같은 걱정이 따른다.


인터넷 부동산을 통해 비교적 월세가 저렴한 동네를 검색해 보았다. 내가 사는 W시에서 가장 저렴한 곳은 역시 군부대가 밀집해 있는 T동이다. 확인해 보니 방 두 개짜리가 고작 보증금 400에 월세 30이다. 그리고 드물게도 집 한 채를 전세로 내놓은 집도 있다. '흠...살만한 곳인지 확인하러 한번 가볼까?' 하지만 마음에 살짝 걸리는 것이 있다. 에라, 알 게 뭐람. 20년도 더 지난 얘기잖아. 차를 몰고 T동으로 향했다.

대충 지도가 알려준대로 XX목욕탕을 끼고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해당 집을 찾으려는 순간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닫는다. 검색한 집의 주소를 잊어버린 것이다. 운전하는 동안 이런저런 실의와 상념에 빠진 탓이다. 부동산 중개업소도 눈에 띄지 않아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그냥 한번 둘러보기로 한다. 동네는 지나가는 개 한 마리도 눈에 뜨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대여섯 채의 주택을 둘러보다가 초록색 대문의 단층 집을 발견한다. '이 집인가?' 혹시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를 것 같아 대문께로 가서 주소를 확인한다. 이상한 느낌이다. 주소가 눈에 익지만, 내가 잠시 기억하고 있었던 그 주소는 아닌 듯싶다. 안을 둘러보니 고희의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뭣 좀 여쭤보려고 그러는데요..." 내가 말을 건네자 할머니가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혹시 이 집이 전세로 내놓은 집인가요?" 잠시 대답을 보류하시더니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후에야 말씀을 하신다. "아니에요. 이 집은 제가 계속 살 건데요." 나는 혹시 이 동네에 전세를 놓은 집을 알고 계시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대각선 맞은편에 있는 집을 가리키시며 "저 집이 전세로 나온 집인데 얼마 전에 내부 수리를 했어요"라고 친절히 알려주신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머릿속에서 '혹시.....'하는 어떤 예감이 설핏한다. 대화 중에 그 할머니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한다. 자글자글한 주름 속에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다. "혹시 이 동네에 오랫동안 사셨나요?" 내가 묻자 그렇다고 대답하신다. 나는 소심하게도 질문의 어떤 의도가 간파될까봐 재빨리 첨언한다. "그럼 이 동네 전세나 매물도 잘 알고 계시겠네요."
대화를 마치고 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에 다시 한번 대문의 우체통 아래에 적혀있는 주소를 확인해 보았다. 핸폰의 메모장에 저장을 해 둔 뒤에 그 동네를 떠났다.




노화에 따른 기억력의 쇠퇴에도 불과하고, 내 머릿속에는 과거의 일부 정보에 대한 기억들이 여전히 잔존한다. 때로는 명료하게, 때로는 흐릿하게나마. 나는 흐릿한 기억의 숫자들 속에서 뭔가 특별함을 감지한다. 집에 도착하여 20년 전의 일기장을 꺼낸다. 일기장의 뒷편에는 당시 알고 지냈던 이들의 전화번호나 주소가 적혀있다. 20년 전 여친의 주소를 확인한다. 새삼 깨닫는다.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는 데는 애를 먹는 나의 기억력이지만, 오래된 과거의 것을 보존하는 데는 탁월하다는 것을. 
일기장에 메모된 주소는 핸폰에 메모해 둔 그것과 일치했다.


군입대 시절, 여친의 집에 전화를 했다가 그분께 이런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XX는 집에 없는데....근데 지금 군대에 있다면서? 어휴...고생이 많지? 힘들어도 밥은 꼭 챙겨 먹고 건강히 지내. 알았지?" 그 시절의 기억이 어머님의 숱한 주름과 중첩되어 떠오르면서 가슴 한켠이 먹먹해진다.

A time of innocence.
A time of confidences.


T동은 20년 전에 거의 6년동안 썸만 타다가 끝난(그러면서도 군대에 면회도 왔던) 여(사)친이 살았던 동네다. '마음에 살짝 걸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었다. 목욕탕을 낀 그 골목에 집을 얻는 건 포기하기로 한다. 이건 뭐, 전혀 의도하지 않아도 겉보기에는 세월을 뛰어넘는 스토커 같아 보이지 않겠는가. 게다가 지금은 그녀의 얼굴조차 마치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처럼 뭉개진듯 명료함을 잃어 애착의 특정 이미지가 아닌 단지 '이목구비가 뚜렷했다'는 언어적 기억으로만 허망하게 남은 마당에.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철학자와 늑대>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에게 순간(현재)만으로 완전한 그런 순간(현재)이란 없다. 인간의 모든 순간들은 불순물이 첨가되어 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순간들은 혼탁해져 있다." 현재가 서글픈 인간은 지나가버려 꿈을 꾼 상태와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된 과거에 붙들리게 되는 것일까. 과거는 불현듯 우연의 형식으로 유령처럼 주위를 배회한다. 아니, 그 유령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것이다.

머잖은 때에 일기장을 다 불태워 버리게 될 것 같다.











'좌충우돌 잡글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선  (0) 2017.02.16
시간의 관성  (0) 2017.02.16
거리 조정  (0) 2016.10.10
오늘을 잡아라  (0) 2016.10.08
무의식  (0) 2016.07.19